전북연구원 전북학연구센터가 ‘반계 유형원-부안에서 실학의 문을 열다’ 등 4권의 책자를 펴냈다.
△‘반계 유형원-부안에서 실학의 문을 열다’
전북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환경과 드넓은 평야에서 농산물을 생산해온 풍요의 땅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이 지역을 유람하거나 터를 잡고 정착해 뜻을 펼쳤다. 반계 유형원 또한32세에 부안 우반동에 서당을 마련하며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뒤, 자신의 현실인식과 국가개조론을 담은 경세서 ‘반계수록’을 펴냈다. 기획총서 ‘반계 유형원 부안에서 실학의 문을 열다’는 유형원의 개혁과 사상을 비롯, 뿌리와 문학, 계승과 영향력을 이해할 수 있는 반계 유형원 개론서다. 전국의 명망 높은 유형원 연구자들이 각각의 장을 맡아 펼쳐낸 여덟 개의 글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유형원을 소개하고 있다. 흔히 그를 수식하는 중농학파 실학자에 결을 더하여 유학자 유형원, 개혁가 유형원, 정책 유형원, 시인 유형원, 스승 유형원 그리고 부안을 각별히 아꼈던 인간 유형원을 만날 수 있다. 2022년은 반계 유형원 탄생 400주년을 맞는 해다. 이를 맞아 전북학연구센터는 반계 유형원의 고향 부안에서 '전북지역의 유학과 유학자'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제16회 동아시아 실학 국제학술회의'를 후원했다. 또, 반계 유형원과 전북 실학에 관한 영상 콘텐츠를 제작, 온라인상으로 배포했다. 이 총서 또한 우리 전북지역의 학자이자 큰 어른인 반계 유형원의 업적과 의미를 도민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기획됐다. 하우봉, 송양섭, 이동희, 이의강, 김승대, 정재철, 함영대, 정성희가 필자로 참여했다.
△‘조선시대 정여립 모반사건과 전라도’
전주 혁신도시 옆을 지나는 정여립로는 조선의 문신 정여립의 이름을 붙인 도로명이다. 진주 출생인 정여립의 생가는 완주군 상관면에 있어 지역의 누구나 그의 이름을 돌아보게 된다.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혁신적인 사상으로 조선에 파장을 일으켰던 정여립, 그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 '대동계를 구성했으며,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로 동인의 추종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 비운의 혁명사상가로 주목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실패에 그친 인물로 기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바탕에는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 기축옥사(獄事)가 있다. 일명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22년(1589)에 일어나 정여립과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모반사건임에도 이후 전라도 지역은 중앙정계에서 위세가 약화됐으며, 향촌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축 가운데 하나가 정여립의 출생지인 전북 전주였다. ‘기축옥사, 정여립 사건과 전라도(지은이 이동희)’는 정여립의 가문으로 시작해 사건의 발발과 기록, 이후 전라도의 모습으로 나아가며 현상을 규명하고 있다.
△‘호남보고 이리안내’
만경강과 금강 사이에 위치한 이리(里)는 과거 전라북도 북서부의 행정구역이자 현 익산시의 중심 시가지로, 현재는 지명으로 과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912년 호남선철도가 개통되며 이리역이 설립되었을 때, 이리는 전북 교통의 요충지이자 발전된 도시로 그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 식민지의 쓰라린 기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호남보고 이리안내(지은이 야마시타 에이지, 역주 해설 양은용)’는 과거의 이리와 현재의 익산을 톺아보기 위한 귀한 자료다. 근대문화유산 연구 및 보호가 주목받는 지금, 당대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그 첫 발자국이 되어야 한다. ‘호남보고 이리안내’는 지배와 수탈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의병투쟁과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 야마시타 에이지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폭도'로 기록한 우리의 의인들을 향후 전북 의병 연구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응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
호남평야가 자리한 전북은 대표적인 농도(道)로써 대한민국의 식량안보를 책임지는 든든한 곳간이다. 2020년 복원된 전라감영 앞에 새겨진 '약무호남시무국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은 우리 지역 농업이 가진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근대 이후 전북은 일제의 농업 침탈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지역이기도 하다. 전북 근대 농업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된 데 이어, 이 총서는 조선후기 농업사를 밝혀나감으로써 한국 농업사의 전체 전개 양상을 검토함으로써 전북 연구의 당면과제를 짚어내고 있다. 이 총서의 중심자료인 웅지농서에서는 무엇보다 당대에 조정과 백성이 농업을 대했던 자세를 알 수 있다. ‘웅지농서’란 정조 임금의 왕명에 응하여(응지;應旨) 중앙 관료부터 지방 서민까지 농업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작성하여 올린 글이다. 조선 각지의 견문과 경험이 진상된 가운데 호남, 그 중에서도 전북 지역 군현과 연관된 응지농서는 16편이다. ‘응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지은이 염정섭)’은 ‘응지농서’의 배경과 응지를 진상한 지인의 성격을 비롯, 전북지역 농업기술의 지역적 성격, 개간과 간척을 비롯해 수리시설의 특징 등을 고찰하고 있다. 과거 전북의 농업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하고 현재의 가치를 되새기는 초석이 ‘웅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응지농서’는 기본적으로 농법(法)과 농정(農政)을 다루고 있지만 그 근간에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해결 방안에 대한 모색이 있다. 국가를 지탱하는 산업이기 이전에 백성의 삶과 안녕을 위해 의견을 모았던 조정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도민들에게도 뜻깊은 일이다./이종근기자
△‘반계 유형원-부안에서 실학의 문을 열다’
전북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환경과 드넓은 평야에서 농산물을 생산해온 풍요의 땅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이 지역을 유람하거나 터를 잡고 정착해 뜻을 펼쳤다. 반계 유형원 또한32세에 부안 우반동에 서당을 마련하며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18년이 흐른 뒤, 자신의 현실인식과 국가개조론을 담은 경세서 ‘반계수록’을 펴냈다. 기획총서 ‘반계 유형원 부안에서 실학의 문을 열다’는 유형원의 개혁과 사상을 비롯, 뿌리와 문학, 계승과 영향력을 이해할 수 있는 반계 유형원 개론서다. 전국의 명망 높은 유형원 연구자들이 각각의 장을 맡아 펼쳐낸 여덟 개의 글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유형원을 소개하고 있다. 흔히 그를 수식하는 중농학파 실학자에 결을 더하여 유학자 유형원, 개혁가 유형원, 정책 유형원, 시인 유형원, 스승 유형원 그리고 부안을 각별히 아꼈던 인간 유형원을 만날 수 있다. 2022년은 반계 유형원 탄생 400주년을 맞는 해다. 이를 맞아 전북학연구센터는 반계 유형원의 고향 부안에서 '전북지역의 유학과 유학자'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제16회 동아시아 실학 국제학술회의'를 후원했다. 또, 반계 유형원과 전북 실학에 관한 영상 콘텐츠를 제작, 온라인상으로 배포했다. 이 총서 또한 우리 전북지역의 학자이자 큰 어른인 반계 유형원의 업적과 의미를 도민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기획됐다. 하우봉, 송양섭, 이동희, 이의강, 김승대, 정재철, 함영대, 정성희가 필자로 참여했다.
△‘조선시대 정여립 모반사건과 전라도’
전주 혁신도시 옆을 지나는 정여립로는 조선의 문신 정여립의 이름을 붙인 도로명이다. 진주 출생인 정여립의 생가는 완주군 상관면에 있어 지역의 누구나 그의 이름을 돌아보게 된다. "천하는 공공의 물건이다",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혁신적인 사상으로 조선에 파장을 일으켰던 정여립, 그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한 모임 '대동계를 구성했으며, 뛰어난 학식과 통솔력, 활 솜씨로 동인의 추종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 비운의 혁명사상가로 주목받고 있지만, 과거에는 반역을 도모하였으나 실패에 그친 인물로 기록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바탕에는 그를 대표하는 키워드 기축옥사(獄事)가 있다. 일명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불리는 기축옥사는 조선 선조 22년(1589)에 일어나 정여립과 동인이 다수 처벌된 사건이다. 실체가 불분명한 모반사건임에도 이후 전라도 지역은 중앙정계에서 위세가 약화됐으며, 향촌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축 가운데 하나가 정여립의 출생지인 전북 전주였다. ‘기축옥사, 정여립 사건과 전라도(지은이 이동희)’는 정여립의 가문으로 시작해 사건의 발발과 기록, 이후 전라도의 모습으로 나아가며 현상을 규명하고 있다.
△‘호남보고 이리안내’
만경강과 금강 사이에 위치한 이리(里)는 과거 전라북도 북서부의 행정구역이자 현 익산시의 중심 시가지로, 현재는 지명으로 과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912년 호남선철도가 개통되며 이리역이 설립되었을 때, 이리는 전북 교통의 요충지이자 발전된 도시로 그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근대 식민지의 쓰라린 기억이 서린 장소이기도 하다. ‘호남보고 이리안내(지은이 야마시타 에이지, 역주 해설 양은용)’는 과거의 이리와 현재의 익산을 톺아보기 위한 귀한 자료다. 근대문화유산 연구 및 보호가 주목받는 지금, 당대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그 첫 발자국이 되어야 한다. ‘호남보고 이리안내’는 지배와 수탈의 고통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의병투쟁과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저자 야마시타 에이지를 비롯한 일본인들이 '폭도'로 기록한 우리의 의인들을 향후 전북 의병 연구에서 다시 만나볼 수 있다.
△‘응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
호남평야가 자리한 전북은 대표적인 농도(道)로써 대한민국의 식량안보를 책임지는 든든한 곳간이다. 2020년 복원된 전라감영 앞에 새겨진 '약무호남시무국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이순신 장군의 말씀은 우리 지역 농업이 가진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근대 이후 전북은 일제의 농업 침탈이 빠르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지역이기도 하다. 전북 근대 농업에 대해 많은 연구가 진행된 데 이어, 이 총서는 조선후기 농업사를 밝혀나감으로써 한국 농업사의 전체 전개 양상을 검토함으로써 전북 연구의 당면과제를 짚어내고 있다. 이 총서의 중심자료인 웅지농서에서는 무엇보다 당대에 조정과 백성이 농업을 대했던 자세를 알 수 있다. ‘웅지농서’란 정조 임금의 왕명에 응하여(응지;應旨) 중앙 관료부터 지방 서민까지 농업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작성하여 올린 글이다. 조선 각지의 견문과 경험이 진상된 가운데 호남, 그 중에서도 전북 지역 군현과 연관된 응지농서는 16편이다. ‘응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지은이 염정섭)’은 ‘응지농서’의 배경과 응지를 진상한 지인의 성격을 비롯, 전북지역 농업기술의 지역적 성격, 개간과 간척을 비롯해 수리시설의 특징 등을 고찰하고 있다. 과거 전북의 농업의 생생한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반추하고 현재의 가치를 되새기는 초석이 ‘웅지농서로 본 18세기 후반 전북의 농업’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응지농서’는 기본적으로 농법(法)과 농정(農政)을 다루고 있지만 그 근간에는 농촌과 농민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해결 방안에 대한 모색이 있다. 국가를 지탱하는 산업이기 이전에 백성의 삶과 안녕을 위해 의견을 모았던 조정의 역할을 돌아보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도민들에게도 뜻깊은 일이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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