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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강은교시인이 1969년 2월 18일 신석정시인에게 쓴 편지 첫 공개



‘존경하는 신(석정)선생님께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전주에 편안히 도착하셨는지요? 서울에 계신동안 저와 저의 친구가 더욱 피곤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저희로서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너무 철없이 들떠서 선생님을 편안히 모시지 못한 것을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참 가치를 떠나서 대부분 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서울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저희를 기운 없게 만듭니다’
이는 강은교시인이 1969년 2월 18일에 신석정시인에게 쓴 편지다.
신석정과 고은 등 전북출신 문인들의 편지글이 전시를 통해 대중과 처음으로 만난다.
서울 영인문학관은 23일부터 한달간 기획전 '편지글 2022'를 열고 법정스님을 비롯, 여러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편지와 메모 100여 점을 공개한다.
편지는 한 사람이 1인칭으로 쓰는 내면의 풍경화다. 그래서 단 한 사람의 특별한 독자를 위해 쓴 문인들의 편지는 하나 하나가 보배롭다. 사람에게는 한 사람을 통해 우주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살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숙달이 되지 않고 힘이 들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내면에 일대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건 경하할 일이다.
세상이 많이 변해 이제 사람들은 편지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종이 위에 옮기는 수고스러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다고 문자 메시지로는 다 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힘들게 종이에 편지를 써서 우체국을 찾아가 부치던 시대의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서 우리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편지전은 희소가치를 지닌다. 아름다운 사연도 많고, 힘든 사연도 많고, 슬픈 사연도 많지만 깊은 사연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영인문학관에서는 이번에 엽서 글은 배제했다고 한다.
김성우가 보낸 사르트르와 이오네스코의 편지, 루이제 린자가 이어령에게 보낸 편지, 법정스님이 젊은 날 김채원에게 보낸 편지, 작고 문인인 김광균, 김영수, 노천명, 박경리, 박완서, 박용래, 박용철, 유치환, 이광수, 이용악, 이주홍, 전봉건의 편지, 평론가의 편지롬 이어령 선생에게 보낸 김승옥, 김승희, 김용직, 김은국, 김현, 이근배, 이명자, 이병주의 편지, 김열규, 김윤식, 이태동의 것이 전시된다.
시인의 편지는 강은교, 고은, 김남조, 김영태, 김초혜, 나태주, 마종기, 성찬경, 송수권, 신달자, 이상범, 이해인, 임성조, 최승범, 최원규, 홍윤숙이 썼다.
우선, 강은교시인이 1969년 2월 18일 신석정시인에게 쓴 편지에 눈에 띈다.
‘존경하는 신선생님께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십니까? 전주에 편안히 도착하셨는지요? 서울에 계신 동안 저와 저의 친구가 더욱 피곤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저희로서는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저희들이 너무 철없이 들떠서 선생님을 편안히 모시지 못한 것을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인간의 참 가치를 떠나서 대부분 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서울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저희를 기운 없게 만듭니다. 여기서 말없이 있는다는 것은 정말 힘드는 일이예요. 더구나 일푼의 생산적 가치도 없는 시를 쓴다는 일은 조롱거리밖에 안되지요. 한마디로 서울은 정신이 없는 죽은 도시입니다. 그날 만나보신 임정남씨가 요즈음 이 죽은 도시에의 연가를 쓰고 있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모한 일이겠습니까? 아마 장시로 신문에 발표되리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저희들은 해 보아야지요. 모두가 무능하다고 비웃어도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살려야 할 것입니다. 이 비정신의 위험한 도시, 모든 책임의 소재는 결국 위대한 정신일테니까요. 선생님을 뵙고나니 더욱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에 쓴 저의 시 한 편을 동봉하오니 바쁘신 중이라도 한번 보아주십시오. 마침 며칠 전에 여류문학인회에서 원고청탁이 와서 갖다 줄까 하고 있습니다. 아마 홍윤숙씨의 배려이겠지요. 그러면 변덕스런 날씨에 항상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오. 또 편지 드리겠습니다.
이는 신석정이 보내신 편지에 대한 강시인의 답장이다.
강은교시인은 “60년대 말 ‘사상계’ 신인 문학상으로 시단을 두드렸을 무렵, 신석정시인은 나에게 한지에 쓴 편지를 보냈다. 아마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받은 시가 마음에 들어서 대학원 시간에 강의를 했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친구에게 자랑을 했다가 그의 편지를 뺏겼는데, 그 친구가 잃어버리는 바람에 내 답장만 남게 되었기에, 정확한 기억이 나질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신시인은 그 뒤에도 몇 번 그런 편지를 보냈던 것 같고, 그 인연으로, 전주의 댁으로 친구와 함께 초대받는 행운을 누렸었다. 이를 답례삼아 그가 서울 왔을 때 친구와 함께 대한극장 앞에서 만나 ‘닥터 지바고’를 보았고, 불고기를 대접해 드렸었다. 다시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했다.
고은시인이 1984년 5월 31일에 최일남 소설가에게 쓴 편지도 눈길을 끈다.
‘언젠가 우리 둘이서 큰 산 한번 올라가 노래 한번 불러댑시다요 청춘으로다가.... 최일남 선생께
‘학원(學園)’ 6월호 안성장 사진에 기쁘게도 일남형께서 앉아계시더군요. 어찌나 천연스러운지 그런 표정은 하루이틀에 나오는 것 아니겠지요. 저한테 들릴 틈도 없이 안성장 취재에 다녀가신 안성국도 38번을 저는 바라봅니다. 이번에 참으로 귀중한 소설집 ’누님의 겨울‘을 배수(拜受)했습니다. 꼭 두고 두고 읽고 욕도 하고 감복(感服)도 하렵니다. 그러기전에 한번 모시고 ’출판 기념‘을 하겠습니다. 니나노 하 이것 기막히지요 허지만 저는 술병신이라.... 1984년 5월말 고은’
전시엔 박종화, 신석정, 어효선의 족자 편지도 모습이 드러난다. 소설가의 편지는 권지예, 안영, 이인화, 조정래, 여류화가의 편지는 김향안, 박안경, 이성자, 조문자, 음악가 장사익의 편지, 독자에게 받은 편지는 박완서, 윤후명, 정과리의 것이다.
강인숙관장은 "편지는 한 사람이 일인칭으로 쓰는 내면의 풍경화"라며 "다른 사람의 내면에 일대일로 다가갈 방법이 있다는 것은 경하할 일"이라고 했다./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