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훈의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
흰 소를 닮은 덕유산이 상고대만 빼고 모든 걸 내주었습니다.
덕유산(德裕山, 1,614.2m)은 크고 높습니다.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지만 어느 한 곳 거친 곳 없이 부드러운 산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향적봉에서 바라보는 덕유산 산줄기는 마치 소의 부드러운 등걸을 닮았습니다.
이름에서도 넉넉함이 묻어납니다. 덕유산의 원래 이름은 광여산(匡廬山)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나갈 때면 안개가 자욱해져 산속에 숨어 있는 이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안개 덕분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었고, 이것이 산 덕분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덕이 많은 산’이라 하여 덕 덕(德)자에 넉넉할 유(裕)자를 붙여 덕유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및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에 걸쳐 있는 덕유산(德裕山)은 현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산 중 하나로 꼽히는 곳입니다. 조선후기 문인 허목(許穆, 1595-1682)과 이만부(李萬敷, 1664- 1732)는 덕유산을 우리나라 남쪽의 대표적인 산으로 일컬은 바 있습니다.그러나 조선전기까지만 해도 덕유산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듯합니다.
덕유산에는 벌써 상고대가 내려 순백의 산을 뽐내고 있습니다.겨울 산행의 백미, 덕유산입니다. 눈꽃산행으로 겨울 등산객이 제일 많이 찾는 산입니다. 조선 선비들도 제법 찾은 듯합니다. 조선 중기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고 남인의 정수였던 허목은 그의 문헌집 '기언' 제28권 하편 덕유산기에 지리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남쪽 명산의 정상 가운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니, 구천뢰(九千磊) 구천동(九千洞)이 있고, 칠봉 위에 향적봉이 있다. 덕유산은 감음(感陰, 안음의 옛 이름이며, 지금 함양의 옛 지명)·고택(高澤, 전북 장수의 옛 이름)·경양(京陽, 금산의 옛 이름)의 여러 군에 걸쳐 있는데, 곧장 남쪽으로 가면 천령(天嶺)과 운봉(雲峰)이다. 지리산 천왕봉과 정상이 나란히 우뚝하며, 이어진 산봉우리에 연하(煙霞,안개와 노을 또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가 300리나 서려 있다. 봉우리 위에 못이 있는데, 못가에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곳에 자라는 나무는 특이한 향기가 풍기는 사철나무가 많은데, 줄기는 붉고 잎은 삼나무와 같으며, 높이는 몇 길이 된다. 못의 모랫가엔 물이 맑으며, 깊은 숲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난다. 산을 오르는 데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감음의 혼천(渾川)을 따라 구천뢰 60리를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양의 자갈길을 따라 사자령(獅子嶺)에 올라서 이르는 것이다.’
허목보다 앞서 갈천 임훈(林薰, 1500~1584)은 '登德裕山香積峰記(등덕유산향적봉기)'를 통해 1552년(명종 7) 최초로 덕유산 유산기를 기록했습니다.
추석이 막 지난 음력 8월 24일부터 29일까지 5박6일에 걸쳐 덕유산의 일출과 일몰, 향림의 경치를 만끽했습니다.
'등덕유산향적봉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는 덕유산 관련 정보를 풍부하게 수록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불교 유적, 식생, 지명 유래, 지리 등에 대한 정보가 그것입니다. 그중 덕유산 지리 정보를 제시한 것이 백미입니다.
임훈은 향적봉에 올라 주변을 조망한 부분에서 김종직(金宗直)이 '유두류록」(遊頭流錄)'에서 사용한 체계, 즉 내부 정보와 외부 정보를 교직하는 방식을 끌어와 덕유산의 다양한 지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한편 거기서 그치지 않고 구체성을 더하는 방식 등을 활용해 기존 체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함으로써 '유두류록'보다 한층 섬세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지리 정보를 제시하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 지리 정보는 신경준(申景濬)의 산수고(山水考)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같은 후대 문인들의 저술한 산지(山誌)에 수용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등덕유산향적봉기'가 후대 문인들에게 덕유산 관련 긴요한 정보를 수록한 작품으로서 인정받은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 이전에 누군가 올랐겠지만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그가 올라간 목적과 동기에 대해서 유산기 초반부에 비교적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산에는 상봉(上峰)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셋 있으니 황봉(黃峰)·불영봉(佛影峰)·향적봉(香積峰)이다. 나는 어렸을 때, 영각사에 잠시 머물렀을 때는 황봉을 올라가 보았고, 삼수암에 우거하면서 불영봉에 올랐다. 오직 향적봉만은 지금까지 인연이 없어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내려왔다. 세 봉우리 가운데 향적봉이 가장 높으면서 경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내가 한 번도 오르지 못한 것은 잊을 수 없는 한이 되고 있다. 내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두 봉우리를 올랐던 것은 반드시 인연이 있어서인데, 비록 가장 아름다운 경승지라 하더라도 인연이 없었기에 아직 끝을 맺지 못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 인생사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 50세를 넘겨서 이미 몸이 쇠약해진 것을 늦게야 깨닫게 되니 한평생 하나의 한으로 남을 것 같다. 인생사 한낱 보잘 것 없는 한송이 눈과 같지 아니한가?
임자년(1552) 8월에 아우 언성과 효응이 두류산 유람을 계획하고 4, 5명의 동지들을 불러 날짜를 정하고 행장을 꾸렸다. 그 뜻이 매우 독실하고 기백이 매우 대단했는데 나는 슬프게도 몸이 쇠약해진 지 이미 오래되어 부득이 그 약속을 함께 할 수 없는 심정이다. 하지만 향적봉은 가까이 있으니 마땅히 한 번 오르면 좋을 것 같아 한번 오르기로 했다. (중략) 그리하여 삼수암의 승려 혜웅, 성통과 함께 오르기로 약속하고 탁곡암에 만나기로 하였다.’
이 유람에는 동생들 대신 생질 이칭(李稱, 1535-1600)11)이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삼수암의 승려 혜웅(惠雄)과 성통(性通)이 안내자 역할을 했다. 유람 둘째 날부터는 전날 묵은 탁곡암(卓谷菴) 승려 옥희(玉煕)와 일선(一禪)도 함께해 일행의 유람을 도왔습니다.
임훈은 8월 24일에 길을 떠나 같은 달 29일 돌아왔습니다. 당시 그는 5년여 간의 성균관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1545년 낙향해 8년째 고향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집에서 길을 떠났을 그는, 첫날인 24일에는 탁곡암에서 일행과 만나 하룻밤 묵고 다음날 25일 향적봉 아래의 향적암(香積菴)에 도착합니다.
이후 향적봉 부근에서 2박 3일을 머무르며 향적봉과 그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려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궂은 날씨로 인해 하산을 재촉하는 승려들에게 “며칠 시간을 보내더라도 반드시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내 뜻일세”라고 말하며 향적봉을 온전히 유람하고 싶은 강한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상응하게 작품 속에는 향적봉을 유람한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 임훈은 유람이 사실상 마무리된 시점에 승려들과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대화는 일종의 유람에 대한 총평에 해당합니다. 나는 성통 등에게 말했습니다.
'이 산의 고고함과 웅장한 형세는 지리산에 버금가는데 세상의 유람객들은 두류산과 가야산(伽倻山)만 높이고 이 산은 언급하지 않소. 저곳들은 선현의 유풍과 고적을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을 우러러 사모하게 만들기에 그런 것이오. 이 산은 아직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애초에 이 산이 볼 만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오. ‘사물은 스스로 귀해지지 않고 사람으로 인해 귀해진다’라는 말이 옳소.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이 산에게 무슨 상관이겠소. 산의 승경을 보고 마음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어찌 선현의 유적에 의지할 필요가 있겠소. 세상의 무리가 선현의 유적만 좇고 산의 승경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오.” 성통이 말했다. “공의 말이 어찌 이 산이 알아주는 사람을 한 번 만난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인용문에서 임훈은 덕유산에 주변의 지리산·가야산과 달리 유람객들이 찾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으로는 덕유산이 산의 가치를 알아준 선현의 자취가 없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산의 가치를 알아준 선현의 유적이 있느냐와 무관하게 산의 승경을 완상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산 그 자체임을 강조한 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통의 답변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통은 임훈의 말이 덕유산의 입장에서 볼 때 지우를 입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임훈의 말이란 ‘산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한데 그 말을 실천한 인물이 바로 다른 누구도 아닌 임훈입니다. 따라서 성통의 답변에는 ‘임훈이 바로 덕유산을 알아준 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임훈은 승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덕유산을 알아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요컨대 덕유산 발견자로서의 긍지를 표출한 셈입니다.
그는 탁곡암에서 일행을 만나 1박을 한 뒤 장유암→해인사 터→지봉 서쪽 등마루→향적봉 제3계→향적봉 제2계→향적봉 제1계→향적암 앞→하향적암→향적암→판옥→향적봉→지봉→탁곡암으로 다시 돌아온 듯합니다. 등산코스는 어느 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지만 하산코스는 안개와 구름이 잔뜩 끼어서 그런지 급히 내려간다며 유산기를 마무리해서 어느 코스로 내려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의 유산기만 보면 정상 향적봉을 제대로 밟았는지에 대한 기록이 불명확합니다. 하지만 ‘안개 낀 상태에서 봉우리에 닿으니 암석으로 만들어진 돌무더기가 작은 돌을 사용해 틈새를 채워 보충해 놓았는데 혹은 제단이 아닌가’라는 묘사를 보면, 지금의 향적봉 정상 비석 주변을 설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임훈 일행은 지봉을 지나서 구천둔계곡으로 내려갔습니다.
‘골짜기가 끝나고 넘어진 회檜(노송)나무를 타고 넘어 계곡을 따라 가다가 물을 건너니 이곳이 곧 향적봉의 제3계이다. 개울가를 따라 1리쯤 걸어가다 보면 백암봉으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모여드는 곳이 있으니, 이곳이 곧 향적봉 제2계이다. (중략) 이 계곡을 따라 산기슭을 행하여 1리 못미처 또 제1계를 건너니 여기가 곧 향적암 앞 아래다’
주목을 향목(香木) 또는 적목(積木)이라 하며, 그는 향림이 즐비하게 있으므로 산봉우리 명칭을 향적봉이라 했다고 했습니다. 향적봉의 유래입니다. 향적봉은 당시 명칭과 지금 그대로 입니다. 임훈의 향나무, 즉 주목에 대한 설명입니다.
‘향목(香木)은 처음대로 넝쿨로 자라다가 해가 오래될수록 곧게 자라서 성목이 되면 절반은 땅에 눕게 되고, 비록 노목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무의 키는 몇 길에 불과하고 크기도 몇 아름에 불과하다. 나무줄기와 잎은 무리 중에서 뛰어나 만년송 같다. (중략) 이 나무의 지엽(枝葉)에서는 왜 달리 향기가 없느냐고 물어본 즉 반드시 미륵부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살게 될 때를 기다려야만 된다고 말을 하니 승려들은 온갖 것에 말들이 많아 가히 우습다.’
중봉 올라가기 적전 드넓게 펼쳐진 덕유평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뒤로 구름과 안개가 뒤섞인 산 그리메가 너울처럼 일렁입니다. 오수자굴은 영락없이 사람의 눈을 닮았습니다. 어찌 보면 윗입술 같기도 합니다.
이 커다란 바위에 어찌 이런 구멍이 생겼나 신기할 따름입니다. 오수자굴은 조선 명종 때 광주목사를 지냈던 갈천 임훈이 '향적봉기'에 ‘계조굴’로 적은 곳이지만 오수자라는 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했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은 오수자굴로 불립니다.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관산개심(觀山開心)
-물을 보면서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면서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고, 산을 보면 이내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관수(觀水)’라는 뜻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연유한 것으로,
‘물을 보는 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는 글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세상을 보는 일, 나 자신을 추스르는 방법을 일러주는 말씀인 셈입니다.
'물을 보고 마음을 씻고(觀水洗心) 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花美心)’란 글귀를 마음에 새겼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흐르는 물을 보면 언제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어느 새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잡념을 모두 헹군 채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면서 겸양의 물보라를 만듭니다.
시나브로 한 송이의 꽃을 피웁니다.
마음이 순수해야 꽃을 보아도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내 마음꽃도 피어납니다. 누구라도 보는 것이 아름다워야 마음이 평안해지는 까닭입니다.
산은 물과 꽃을 포용하며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올곧게 한곳에 심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아무런 말없이 조용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우직하게 생명붙이들을 잘도 지켜냅니다.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더 이상 치우치지 않고, 더 이상 혼란하지 않고,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향기롭게 사는 지혜를 삼백예순다섯날마다 물과 꽃, 산을 통해 배우곤 합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 이들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으면 참 좋겠습니다. 당신, 지금 ‘뭘 보고 있나요.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5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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