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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무주에 전하는 '박문수전'과 무주구천동의 유래

무주에 전하는 '박문수전'과 무주구천동의 유래

무주 덕유산의 본래 이름은 광여산(匡廬山)입니다. 이성계가 태자를 얻으려고 지리산에서 기도했지만 지리산 산신이 들어주지 않았으나 광여산으로 와서 기도를 하고 태자를 얻었기 때문에 ‘덕유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이성계가 덕유산에서 수도를 했을 때 산에 사나운 짐승들이 많았으나 한 번도 해를 입지 않아 ‘덕이 많은 산’이라고 한 데서 ‘덕유산’이라고 불렀다는 지명 유래 전설도 있습니다.
이런 이성계 관련 이야기가 지명 유래와 관련, 덕유산 곳곳에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성계가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머물렀던 자리는 ‘제자동’, 이성계가 밥을 짓던 곳은 ‘밥진골’, 제사를 올린 곳은 ‘유점등’, 산신제를 올릴 때 동비(銅碑)를 묻었던 곳은 ‘동비날’ 혹은 ‘동비현’, 태자가 태어나 태를 묻은 곳은 ‘태봉’이라고 하는 것 등이 그 예입니다.
무주 지역의 설화는 일반적으로 민중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 전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덕유산과 적상산, 구천동이라는 천혜 자연, 지리적 조건이 전설에 강력하게 반영되어 ‘신성’, ‘호국’, ‘이상향’의 이미지를 더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입니다.
또, 설화를 전승시키는 주체들은 이야기의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최영 장군이나 이성계 같은 역사적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편 구원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어사 박문수 이야기를 통해 구천동과 같이 지역적, 지리적으로 외부와 차단된 곳에서의 문제 해결 방식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최영, 이성계, 박문수 등의 인물이 무주라는 장소와 결합되면서 무주 지역 설화는 지역민들의 삶의 터전과 삶의 양태를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고 그에 의미 부여를 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왜 태권도 하면 무주인가요. 백련사를 둘러싸고 빼어난 절경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의 수도승들이 몰려들기 시작, 그 수가 9,0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구천동의 지명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인 삼한시대 때부터 9,000명의 호국무사들이 무술을 연마하기 위해 주둔했던 곳 즉, 구천인(九千人)의 둔지(屯地)라는 의미의 ‘구천둔(九千屯)’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해 ‘구천동(九千洞)’이 됐다는 유래담입니다.

‘이 산(덕유산)의 청고(淸高)하고 웅장한 경승은 지리산에 버금간다. 그러나 세상일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으면서 죽장망혜(竹杖芒鞋) 차림으로 유람하는 자들은 반드시 두류산과 가야산만 칭할 뿐, 이 산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거기에는 선현들이 옛 풍류의 자취를 남겨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흠모토록 하였기 때문인데, 이 산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지, 처음부터 이 산이 보잘 것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사물은 스스로 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즉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것이 산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만약 산의 좋은 경치를 보고 마음에 얻음이 있으면 되는 것이지 어찌하여 꼭 사람들이 남긴 유적만을 의지하려 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옛 사람들이 남긴 자취만을 헛되이 따를 뿐, 산의 훌륭함을 잃어버리고 있다'

조선시대 임훈(林薰)이 1552년 덕유산을 오르고 쓴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등덕유산향적봉기)'에 따르면, ‘구천동은 삼한시대부터 9,000명의 호국무사가 수련을 하며 살았다’ 고 해서 그들의 ‘둔지’라는 뜻에서 ‘구천둔(九千屯)’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구천둔(九千屯)’에서 둔(屯)이라는 글자의 ‘진칠 둔’은 이곳에 주둔했던 군대가 사병이 아닌 국가가 인정한 군대였다는 증거로, 무주군 설천면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의 원래 지명이었다고 합니다. 9,000명의 호국무사가 아침에 밥을 짓기 위해서 쌀을 씻은 물이 눈같이 하얀 내(川)를 이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설천(雪川)면입니다. 또, 홍만종의 ‘해동이적’은 조선시대 ‘수박’의 달인 권진인(權眞人)이 적상산에서, 또 다른 문헌에 따르면 박치원선생이 백운산에서 심신수련과 무예인을 배출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호국의 땅 무주입니다. 1645년 이조판서겸 대제학 이식(李植)의 건의로 호국사(護國寺)를 창건하여 많은 군병과 승병들이 무술을 연마하며 '조선왕조실록'을 지켜 적상산내에 있는 적상산 사고에서 300여년간 보관․관리했습니다.

박문수(朴文秀, 1691~1756)는 조선 경종 때 과거에 급제해 영조 때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 호조판서(기획재정부 장관) 등을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나라의 방비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백성을 위하여 세금 제도를 고치는 등 관리로서 많은 공을 쌓았습니다. 그가 영남 지방에 별견어사(재난의 구제 등 특별한 목적을 띠고 공개적으로 파견된 어사)로 내려갔을 때, 하루는 동해안을 따라 많은 가재도구와 목재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흠, 함경도 지방에 필시 큰 홍수가 난 게로구나.'
박문수는 나라에 알리기 전 우선 세금으로 거둬 들인 영남의 곡식을 급히 함경도로 보냈답니다.
조정에 보고를 하고 처분을 기다렸다면 날짜가 늦어져 많은 백성이 목숨을 잃을지 모를 상황이라 판단한 것이지요. 그 덕분에 꼼짝없이 굶주려 죽을 뻔했던 수많은 백성이 살아날 수 있었어요. 임금의 명을 받지 않은 탓에 나중에 큰 문책을 당할 수 있었지만, 박문수는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백성을 위해 먼저 행동에 나섰어요.
또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를 벌주어 쫓아내고, 나라의 곡식을 풀어 가난한 백성이 살아갈 수 있도록 밑천을 만들어 주어 큰 환영을 받았어요.

'조선 영조 때 박문수가 팔도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를 거쳐 무주 땅에 들어가 덕유산에 이르렀다. 험한 길을 헤매다가 등불을 찾아 한 집에 이르자, 노인이 젊은이에게 소리를 지르며 '죽여 달라'고 하고 있었다. 박문수가 그 사연을 알아보니, 구씨와 천씨가 살아 구천동이라 불리는 이 마을에 노인 혼자만이 유씨인데, 천씨 집안에서 이 노인의 아들이 천씨의 며느리와 정을 통했다고 거짓으로 모함하며 내일 신시(오후 3~5시)까지 유씨의 며느리를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하여, 가족이 모두 죽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어사 박문수는 무주 고을에 출두하여 천씨를 잡아다 벌주고 호남 일대를 돌아서 조정에 올라왔다. 그 뒤 유씨는 수백 석의 부자가 되어 청년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고을 사람들의 높임을 받게 되었다. 임금님도 박문수가 구천동에서 행한 일에 대해 듣고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박문수전' 중에서)

소설 '박문수전' 외에도 지역마다 그에 대한 많은 구전 설화가 전해집니다. 그만큼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지요. 나라와 임금에게 큰 힘이 되었던 박문수가 죽자, 영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해 벼슬을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으로 더하여 주고, 충성스럽고 공적이 많아서 모범이 된다는 뜻으로 '충헌공'이라는 시호(죽은 뒤에 공적을 기려서 높여 부르는 이름)를 내려 주었습니다.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서 어사 박문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게 '어사 박문수'입니다.

어머니와 총각 둘만이 사는 가난한 집에 들어가 아버지 제사용 멥쌀로 지은 밥을 대접받은 어사 박문수가 이를 보답하고자 관상가가 되어 부잣집 노인에게 ‘분명히 감사 장인이 될 것이다’라며 가난한 총각과 부잣집 딸의 혼인을 성사시켰는데, 총각은 결국 충청 감사가 되었다는 예지담입니다.

'어사 박문수는 암행 중에 유난히 빈곤해 보이는 집으로 들어가 점심을 청했다. 어머니와 총각 둘만이 사는 이들은, “손님 대접할 쌀이 어디 있냐?”는 어머니의 타박에 “낼 아버지 제사 모시려고 구해 놓은 멥쌀로 대접하자”는 아들의 말을 듣고, 아버지 제사용 쌀로 밥을 지어 극진히 대접했다. 이 모자를 보고 감동한 박문수는 이번에는 아주 부잣집에 들어가 하루 묵어갈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천하일색의 처녀를 발견하고 그의 아버지에게 “내가 관상을 잘 본다”면서 노인의 얼굴을 보더니, “장차 감사 사위 얻을 관상이다”고 하면서 급히 일어나 큰절을 했다. 깜짝 놀란 노인은 “나는 출가도 안한 딸만 하나 있는데 무슨 감사 사위냐?”고 반문했고, 자기가 잘 아는 총각이 있는데, 지금은 가난해 혼사 비용이 없으니 노인네가 다 부담하라며 중신을 했다. 둘은 혼인을 했고, 신부는 신랑을 성심껏 뒷바라지해서 결국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충청감사가 됐다. 가난한 총각이 제사용 쌀이지만 기꺼이 대접한 것에 대한 은공을 박문수가 갚앞다'

이 작품의 주요 모티프는 ‘백성 구원’이다. 전국적으로 박문수와 관련된 설화는 가히 설화군(說話群)을 이룰 정도로 많습니다. 설화에 등장하는 박문수의 성격은 정의의 심판자, 백성의 구원자, 지혜의 실패자, 성욕의 수용자 등 다양합니다.

무주군의 '어사 박문수'는 이 가운데 백성의 구원자에 해당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캐릭터는 민중들이 고난을 겪고 있다는 현실 인식을 설화적으로 수용한 결과입니다.

보통 박문수와 관련된 설화에는 억울하게 뒤집어 쓴 살인 누명을 풀어 주거나, 노모가 손자를 죽인 사건을 효부 효자로 표창하여 해결하거나, 남에게 아내를 빼앗긴 사람을 어사출두 후 역졸을 동원하여 징치하거나, 무주군 설화처럼 가난하여 혼인 못하는 총각을 암행어사 직분으로 중매하여 혼인은 물론이고 출세까지 시키는 내용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박문수의 구원자 캐릭터에는 기존 질서의 유지라는 지배층의 의도적 노림수가 있습니다. 즉 박문수가 암행어사라는 직분을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민중들은 다시금 현실을 인정하거나 순응하게 됩니다. 따라서 민중에게 박문수는 메시아적 존재가 되어 고난을 감내하는 결과로 귀결되고, 지배층은 유교적 지배 질서를 회복한다는 장치가 내재해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구천동과 박문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천동과 박문수'는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지방을 암행하던 길에 무주 구천동에 들러 천석두의 악행으로 인해 어려움에 빠진 구재서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인물담이자, 박문수로 인해 이곳을 ‘구천동’이라 부르게 됐다는 지명 유래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인 숙종 시절, 나라가 평온하고 백성들이 안정되게 살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다가 날이 저물게 됐다. 저 멀리 비치는 불빛을 따라가 보니 예상 밖의 큰 마을이 나타났다. 나그네가 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어서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고, 한참을 헤맨 끝에 불이 켜진 외딴집을 발견했다. 나그네가 외딴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방 안에서는 칼을 들고 날뛰며 같이 죽자는 노인과 죽여 달라는 아들의 격한 소리가 들렸다. 나그네가 다시 주인을 불러 방 안으로 들어가 하룻밤 묵을 것을 청하니 노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나그네를 맞았다. 나그네는 집안에 무슨 언짢은 일이 있는지 물었다. 노인은 망설이다가 자신은 본래 서울 사람 구재서인데 젊어서 몸이 약해 요양 차 이곳에 왔다가 마음에 들어 아예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었는데, 같은 마을에 사는 천석두라는 거부가 자신을 시기하고 미워해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다. 천석두는 노인 구재서의 아들이 천석두의 며느리를 꾀어내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을 빌미로 노인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노인 며느리를 자기 며느리로 데려가겠다고 했고, 내일이 결혼하는 날이라고 했다. 나그네는 관아에 가서 고하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구재서는 이곳이 천씨 일가의 천지라서 소용없는 일이라고 답했다. 나그네는 목숨은 소중한 것이니 함부로 버리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그네는 이른 아침 무주부 동헌에 도착하여 고을의 사또 임혜진에게 광대 네 명을 대령시키도록 명령하고 네 명의 광대에게 황, 청, 흑, 백색의 옷을 입힌 후 점심때 조금 지나 구재서의 집에 도착했다. 구재서의 집 마당에는 혼례를 치르려는 천석두네 청년들로 복잡했고, 곧 사모관대를 쓴 천석두 부자가 나왔다. 구재서는 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며 있었는데 그때 밖에서 황, 청, 흑, 백색의 중앙황제 대장군, 동방청제 대장군, 남방직제 대장군, 북방흑제 대장군이 나타나 천석두 부자의 목덜미를 휘어잡고 사라졌다. 억울한 구재서 집안을 구하고 천석두 부자를 잡아 혼내 준 사람은 바로 어사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천석두 부자를 멀리 귀양 보내고, 구재서 노인의 아내와 며느리를 돌려보내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이후로 구씨 성과 천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잘 어울려 살게 되어 이 마을을 ‘구천동’이라고 부르게 됐다'

주요 모티프는 ‘어사 박문수의 행적’, ‘관탈민녀’ 등입니다. 관리는 아니지만 마을에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천석두는 구재서의 아내와 며느리를 탐하여 빼앗으려고 합니다. 곤경에 빠진 백성을 어질고 현명한 어사 박문수가 구해 줘 마을의 평화를 찾는다는 '구천동과 박문수'는 박문수의 인물담과 구천동의 지명 유래담이 결합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사 ‘박문수’ 이야기와 결합된 설화는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박문수’라는 이름은 전국에 분포된 암행어사 설화에서 ‘암행어사’라는 직책과 그 함의가 일치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일반 명사화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천동과 박문수'에서는 어사 박문수가 이야기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화의 서사에서 매력 있는 역사적 인물인 암행어사 박문수 이야기가 무주 구천동의 지명 유래담과 결합되어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주 백련사에 이르는 길은 명승지로, 덕유산 입구에서 백련사에 이르는 약 5~6㎞ 사이에는 인월담, 사자담, 비파담, 구월담, 금포탄, 호탄암, 청류계, 안심대, 신양담, 명경담, 구천 폭포, 백련담 등이 있습니다. 이 구간을 구천동 어사길이라 부르는데, 어사 박문수(朴文秀)가 횡포를 부리는 자들을 벌주었다고 전합니다. 잘 조성된 산행 길을 따라 1시간 30분 정도 걷다 보면 구천동 계곡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전국의 등산객들이 연중무휴로 찾고 있습니다.
무주엔 '어사 박문수', '구천동과 박문수' 등처럼 ‘암행어사 박문수’와 관련이 있는 설화가 많습니다. 이는 심산유곡의 깊은 계곡인 무주 구천동의 자연 지리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어느 날 나타나서 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한 번에 풀어 주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여망이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이상의 설화를 통해서 보면 무주는 한편으로 명당과 신령의 땅이지만, 한편으로는 중앙 정부의 관리를 받지 못하는 깊은 오지의 산악 지대임을 보여줍니다.

'무주진안장수/눈온다//무진장 온다’

안도현시인이 석 줄로 말한 오지의 대명사를 '무진장(茂鎭長)'으로 부릅니다. 정말로 겨울에는 '무진장'에서는 '무진장' 눈이 많이 옵니다.

임실에 가면 그리운 임이 살고 있을 것 같고, 무주·진안·장수에 가면 무진장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만 같고, 양양에 가면 기가 양양하게 살아날 것만 같나요.

무주진안장수에는 무진장버스, 무진장 슈퍼 등 '무진장’의 맑은 기운과 복된 기운을 담을 수 있습니다.

'무진장은 울고 왔다가 울고 나가는 마을이라고 허는 사람들이 많였지, 그 얘기는 그만치 사람들이 정이 많고 온순허다는 뜻이지. 처음이는 오지로 알고 울고 왔다가 갈적으는 정들어서 서운헌게 울고 간다 이말여. 지금잉게 차들이 많지만, 그 옛날에는 차들이 없어서 산골짝이나 마찬가지였지. 그러니께 저기 가믄 구천동이 있잖여."

그 옛날 원님도 울고 왔다 울고 간다던 첩첩산중 무진장.

'굉장히 많다'라는 뜻을 가진 '무진장(無盡藏)'이란 말의 어원을 어떤 사람들은 전북의 무주, 진안, 장수 앞 글자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그건 전혀 아닙니다.

'무진장’(無盡藏)은 본래 ‘엄청나게 많고 다함이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불교 용어입니다.

그래서 전북에서 이 말의 유래를 무주, 진안, 장수에서 찾지만 옳지 않습니다.

다만, 무주와 진안, 장수 지역은 예부터 엄청난 오지여서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가 어렵고, 경치가 아름다워 한번 가면 나오기가 싫은 곳이어서 무언가 ‘엄청나게 많고 다함 없을’ 때 ‘무진장’이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안시인은 '무진장' 눈이 오는 장수군 산서면 산서고등학교에서 1994년부터 3년 동안 국어를 가르쳤습니다. 전교조 교사로 해직된 지 4년 반 만에 발령장을 받아들고 찾아간 산서는 팔공산을 휘감고 올라가는 '비행기재'가 올려다 보이는 곳. 시인의 표현처럼 '산토끼와 발맞추기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을테이지요?

무주, 진안, 장수가 우리나라 내륙의 대표적 산악지대로 볼만한 자연경관이 무진장 많다는 건 맞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무진장' 정도 많고,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습니다.

지구는 넓고 볼 것은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무진장 한 것이 인생사 인 것 같습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무진장 많은데 하기가 싫다 , 세상은 좁고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중 어느 부류에 당신은 속하나요?
세상은 넓고, 먹을건 무진장 많습니다.
세상은 넓고, 가볼데는 무진장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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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운봉 승동표(1918 ~1996)화백의 무주 구천동의 가을(1983년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