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인문 스토리] 소리꾼에게 부채는 실과 바늘입니다
판소리 소리꾼에게 부채는 몸이다; 국립국악원국악박물관에서 ‘명인 명창의 부채-바람에 바람을 싣다’ 기획전
심청가에서는 심봉사의 눈을 대신해 주는 지팡이로, 흥보가에서는 박을 가르는 톱으로. 이처럼 부채는 소리꾼에게 내용을 구체적으로 전달하여 장면을 실감 나게 하고 지위와 자격을 부여하여 규정하는 지휘봉이기도하다.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춤과 연희·무속 분야 명인·명창 58명의 부채 80여점을 통해 이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살필 기회가 마련됐다.
국립국악원은 29일부터 오는 9월 25일까지 서울 서초구 국악박물관에서 ‘명인 명창의 부채-바람에 바람을 싣다’ 기획 전시를 갖는다.
이 전시는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며 함께한 교유(交遊)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
선풍기, 에어컨 등 냉방시설과 장치가 없던 시절 부채는 손과 한몸이 돼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물건이었다. 전통예술가에는 부채가 고마움 이상이다.
판소리뿐 아니라 한량춤, 부채산조, 부채춤과 같은 전통춤과 줄타기, 탈춤, 굿 등 연희에서도 필수적으로 활용되는 게 부채로, 예술 동반자와 같은 소품이다.
때문에 예로부터 명인과 명창들은 부채 하나에도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이상을 담았다. 부채에 새겨진 글과 그림이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애절한 사연과 인생 이야기가 하늘거리며 퍼져나간다. 예술가들이 부채를 소중하게 간직하며 때론 사제 간 인연의 증표로 주고받는 이유다. 이렇게 부채에 담긴 글과 그림을 통해 명인·명창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이상을 엿볼 수 있다.
전시명 ‘명인 명창의 부채, 바람에 바람을 싣다’의 붓글씨는 한글서예가로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이 직접 써 그 의미를 더욱 빛냈다.
전북 출신 소리꾼들이 사용한 부채가 한 둘이 아니다.
고 오정숙 명창(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은 아천(雅泉) 김영철 화백에게 받은 사슴이 그려진 두 개의 부채 중, 하나는 이일주 명창(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에게 , 또 하나는 김소영 명창(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에게 물려주었다.
김소영의 부채는 사슴이 큰 모습이 인상적이며, 이일주의 부채는 먹의 깊이가 서로 다르다.
이일주 명창에게 물려준 부채는 다시 제자인 장문희 명창(전북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에게 물려져 스승의 마음을 담은 소리는 부채를 통해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부채는 고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이 썼다.
고 강도근 명창(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의 부채는 1993년 가을에 제자 조영희가 준 부채로, 박창주가 썼다. '축국창강도근선생수산복해계유년중추(祝國唱姜道根先生壽山福海癸酉仲秋)
제자 조영희'로 적혀 있다.
'수산복해(壽山福海)'는 수명은 산처럼 높고 복은 바다만큼 깊게(壽如山高 福似海深) 받으라는 뜻이다.
유영애 명창(전북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의 심청가를 들은 청봉(靑峰) 유기원은 부채에 심청가의 눈대목인 '추월만정(秋月滿庭)'의 가사를 담아 선물했다.
'추월은 만정허여 산호주렴의 비치어들제
청천(靑天)의 외기러기난 월하(月下)의 높이 떠서 뚜루루루루루 낄룩 울음을 울고 가니 심황후 반기 듣고 기러기 불러 말을 헌다 오느냐 저기럭아 소중랑(蘇中郞) 북해상(北海上)의 편지 전턴 기러기냐 도화동(桃花洞)을 가거들랑 불쌍허신 우리 부친전의 편지일장(便紙一張)을 전하여라'
'추월만정'은 심청가에서 가장 슬픈 대목이다. 가을 달빛이 뜰에 가득하다는 뜻으로, 심청이 가을 달밤에 귀뚜라미가 울고, 맑은 하늘에 기러기가 높이 떠 울음을 우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겨나서 편지를 쓰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노래했다.
모보경 명창(전북 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의 부채는 송하진 전북지사가 썼다. '취석산인 송하진(翠石散人 宋河珍)'으로 나오며, '유어애(遊於藝)'란 글귀를 썼다.
‘유어예’란 공자의 논어 제 7편 술이(述而)에 나오는 말이다.(子曰志於道據於德依於仁遊於藝, 자왈, 지어도, 거어덕, 의어인, 유어예니라) 공자가 말했다.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키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서 노닐어야 한다”
이외의 전북 관련 예인의 작품으론
송재영 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전북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을 비롯, 국수호, 김무철, 김소영, 김수연, 김영자, 김일구, 고 김조균, 모보경, 박양덕, 안숙선, 왕기석, 장문희, 조소녀, 조통달, 주운숙, 채상묵, 최승희 등의 부채가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한편 판소리 명창 채수정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는 서예가인 부친 오당 채원식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채를 전시에 내놨다.
오당은 부채 위에 ‘청풍명월본무가’(淸風明月本無價)라는 글귀를 적어 줬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본래 값이 없어 한 푼을 내지 않아도 무한히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소리를 많은 이에게 들려주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한량무의 대가 고 임이조 명인의 부채도 전시된다. 명인이 춤추는 모습이 마치 학과 같다며 누군가가 ‘학무학’(鶴舞鶴)이라는 글귀를 적어 선물한 것이다. 남해안별신굿에서는 무당이 이상 세계를 담고 있는 부채를 들고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는 큰무당인 유선이 명인 때부터 100년 넘게 대물림된 부채를 제공했다. 신영희 명창은 소리 인생 70년간 사용한 부채 중 닳아 사용할 수 없는 24점을 모아 8폭 병풍에 담았다.
관련 특강도 오는 8월부터 마련된다.
서인화 국악연구실장은 “명인 명창들의 이야기와 바람이 담겨있는 그리고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소중한 부채를 전시를 위해 기증 또는 대여해 주신 모든 명인 명창이 있었기에 이번 전시가 가능했다”면서 “명인 명창의 이상과 예술에 임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예술의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될 것”이다고 했다.
왕기석 명창과 유태평양의 부채
소리에 입문한 초기, 왕기석명창은 합죽선을 구해 쓸 여력이 없어 값싼 줄부채를 사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제는 소리꾼으로 인정 받으면서 왕 명창을 아끼는 시인 묵객들의 글과 그림이 들어있는 합죽선을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다.
왕명창이 공연 때 사용했던 부채들 가운데 송하진 전북도지사의 '유어예-예술에 놀아라 '를 비롯 창현 박종회 한국문인화협회 회장, 중하 김두경 선생 등이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부채로 표현했다.
이철량, 길산 김길록 화백의 그림이 그려진 부채와 창극 시집가는 날과 광대가 공연 때 사용되었던 부채 등 왕기석 명창이 사용했던 진귀한 부채도 있다.
특히 시집가는 날과 광대가에서 사용했던 부채에는 왕명창의 해당 대사나 사설이 적혀 있어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2016년 소리꾼 유태평양이 '흥보가' 완창 무대에서 들었던 부채에도 각별한 의미가 담겼다.판소리를 하는 소리꾼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어떻게 소리를 할 것인가’ 만큼 고심하는 게 있다. ‘어떤 부채를 들 것인가.’ 국악 신동에서 국립창극단 단원이 된 유태평양도 다르지 않다.
2016년 유태평양의 ‘흥보가’ 완창 무대. 6세 때 처음 ‘흥보가’를 완창한 이후 약 20년 만이라 부채를 고르는 데 더 신중했다. 그는 사물놀이를 하는 모습이 흘림체 그림으로 담긴 부채를 택했다. “역동적인 그림체가 박을 탄 흥보가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와 잘 맞을 것 같아서”였다. 부채에는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감전 사고로 잃은 두 팔을 잃어 의수로 그림을 그리는 석창우 화백이 유태평양에게 선물한 그림이 그려진 부채였다.
소리하는 창자(唱者)와 북을 치는 고수(鼓手)가 함께 오르는 판소리 무대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 창자가 손에 쥔 부채다. 소리꾼에게 부채는 “상징”이다. 작품 내용을 상징하기도 하고, 소리꾼 스스로의 정체성을 나타내게도 한다. 그저 멋으로, 혹은 손이 허전해서 드는 소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소리꾼들은 소리를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부채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부채가 없으면 북채라도 쥐고 노래하는 훈련을 받는다. 부채는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춰 온몸을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는 창자의 몸짓인 ‘발림’을 돋우는 소품이기 때문이다. 유태평양의 이야기. “판소리는 가만히 서서 노래만 하는 게 아니에요. 연기와 춤까지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장르예요. 어떻게 보면 부채는 제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거죠. 부채가 제 몸으로 표현하기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극대화 시켜주니까요.”
창극 '심청가'는 거의 모든 소품을 부채로 표현했다. 도창자가 '범피중류'를 부르기 시작하면, 배우들이 부채로 파도를 만들어 '격랑이 휘몰아치는 인당수'를 표현했다.
작품과 소리꾼에 따라 다르게 설정하지만, 판소리 다섯 마당에는 부채가 쓰이는 장면이 꼭 나온다. 판소리 속 부채는 부채 이상이다. ‘적벽가’에선 소리꾼이 부채가 활인 양 들고 쏘는 시늉을 하고, ‘흥보가’에서는 놀부가 흥부를 때리는 몽둥이로 부채를 쓴다. ‘춘향가’의 부채는 춘향과 몽룡의 사랑 편지가 되었다가 이몽룡의 마패가 되기도 한다. 지난해 국립창극단이 무대에 올린 창극 ‘심청가’에서는 빨래 방망이, 뱃사공의 노, 심봉사의 지팡이부터 바다의 파도까지 부채로 표현했다. 자그마한 부채가 무한한 상상력을 표현하는 소품인 셈이다.
국악 신동으로 불려 온 국립창극단 단원 유태평양은 20여개가 넘는 부채를 갖고 있다. 그중 자주 사용하는 부채들.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부채(아래)를 공연에서 가장 자주 사용하고, 판소리에 따라 기러기(위 왼쪽)와 소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들기도 한다.
무용수가 무용복 여러 벌을 가지고 있듯, 소리꾼도 부채를 여러 개 돌려 쓴다. 유태평양이 가진 부채는 20개가 넘는다. 대부분 화가, 팬들에게 선물 받은 부채다. 가장 자주 사용하는 건 아무 그림이 없는 흰색 바탕의 ‘백부채’다. 그림이 있는 부채는 작품에 맞춰 그때그때 고른다. ‘적벽가’를 부를 땐 강하고 힘찬 그림을, ‘춘향가’를 부를 땐 원앙 그림을 고르는 식이다.
소리꾼 부채의 그림은 난초, 소나무, 기러기 등을 그린 한국화다. 어떤 화가가 어떤 그림을 그렸느냐에 따라 부채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수백만원 짜리도 있다. 여느 공연 소품처럼 부채 관리도 까다롭다. 한지 소재라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전용 통에 제습 도구를 넣어 보관한다. 부채는 소리꾼의 영혼이기도 하다. 오래 사용해 낡고 손때 묻은 부채를 액자에 표구해 간직하기도 한다.
새 부채는 접히고 펴지는 움직임이 유연하지 않아서 공연 중 찢어지거나 바닥에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가끔 일어난다. 유태평양이 일러 준 사고 수습 방법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런 상황조차 판소리의 묘미죠. 즉흥성이 있잖아요. 당황하지 않고 관객들을 웃기고 넘어가는 센스가 필요하지요.”
그는 부채를 “소리꾼의 옷”이라고 했다. “부채는 소리꾼의 개성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유태평양 내용은 한국일보를 참고로 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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