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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야계 송희규 전북 고산에 귀향와'양정(養正)'을 짓다


[문화인문 스토리] 학생들을 바르게 길러야 합니다

-야계 송희규 전북 고산에 귀향와
'양정(養正)'을 짓다

야계 송희규가 전라도 유배 해제 후 귀향, 거처로 마련해(1552년) 만년을 보낸 백세각(百世閣·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야계종택 중심건물인 이 백세각 안채 마루에서 불천위 제사가 진행됩니다.

이 집은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가 세운 곳으로, 명종 6년(1551)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했습니다. “비가 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잔다”는 전설이 전합니다.

당시 세도가 윤원형(尹元衡)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향을 갔었는데, 그곳에서 5년간의 귀향살이를 하고 고향에 돌아와 리명을 고산리라 고쳐 부르고 백세각(百世閣)을 건립합니다.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구멍을 뚫어 싸리로 엮은 점과 대패를 쓰지 않고 다른 연장(자귀)으로 나무를 다듬은 점이 특이한 건물입니다.

'훌륭한 송공(宋公)은/ 타고난 성품이 강렬(剛烈)하여/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니/ 아무도 그 뜻을 꺾지 못했도다/ 좌우에서 두드리고 흔들수록/ 절의와 지조는 더욱 굳었도다/ 비록 사람과는 어긋났어도/ 하늘에는 한 점 부끄러움 없었도다.’

갈암(葛巖) 이현일(1627~1704)이 야계 송희규(1494~1558)의 묘비명을 지으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인품을 표현한 시의 일부입니다.

이처럼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던 야계는 당시 사회의 최고 덕목이었던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누구보다 잘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칭송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열성을 다하는 것은 지금 사회에서도 누구나가 실천해야 할 덕목입니다.

몸가짐은 다만 효도와 공경으로 하고
뜻을 세움은 마땅히 信과 忠으로 하세
만약 사람마다 이 도리를 안다면
망국과 패가망신이 어찌 있으리오.

持身祇是孝而悌
立志要當信與忠
若使人人知此道
則何亡國敗家有

그가 7세 때 지은 시 '독소학(讀小學)’입니다.(讀小學 七歲作,倻溪先生文集卷之一 )

'사람의 욕심이 들어올 틈이 없으니/ 천리(天理)는 오직 밝고 빛나네/ 학문은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덕업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닦아졌네/ 움직이면 천하에 도가 되고/ 말을 하면 천하에 법이 되네/ 우주의 동량을 부지(扶持)하면서/ 생민(生民)의 주석(柱石)되어 안정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세상에 이름난 참 선비(眞儒)이니/ 성인의 덕으로 정중(正中)한 자이다.’

야계가 남긴 '진유부(眞儒賦)’의 일부입니다.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입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재주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좌랑 도형(都衡)에게 글을 배울 적에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고는 했다.
하루는 캄캄하여서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별안간 소나무 숲에서 어떤 노파가 나타나더니 꼭 과거부터 공을 아는 사람처럼 공의 이름을 불렀다.
장난치는 것처럼 앞으로 다가서는데 얼굴이 점차로 커지더니 나중에는 울타리에 가득히 찼다.
이것은 귀신이었는데 공이 재빨리 몸을 앞으로 내달리면서 그 귀신을 치려 하자, 그 형체는 차차 사라지고 오직 얼굴만이 울타리에 걸렸을 뿐이었다.('유분록')'

그는 을사사화 이후 1546년 대구부사에 임명됐으나, 사화 여파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1547년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곳 귀양처에서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양정(養正)’이라 짓고 날마다 주변의 유생과 더불어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경학(經學)에 심취하며 자적(自適)했습니다. 많은 고을 선비들이 야계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5년간의 유배생활 후 1551년에 사면되어 고향인 성주 고산정(高山亭) 마을에 돌아와 집(百世閣)을 짓고 '야계산옹(倻溪散翁)’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유유자적했다.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주역(周易)에 나오는 ‘어린 자를 올바로 기른다’는 몽이양정(蒙以養正)으로부터 '양정(養正)'을 추출했습니다.

주역 제4괘 산수몽 '蒙以養正 養心正己 (몽이양정 양심정기)'는 까막눈이를 바르게 기르고, 심신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옹이 다녔던 '양정고보'의 교훈입니다.
지금의 양정중학교와 양정고등학교의 전신인 양정의숙(養正義塾)을 열었습니다.
건학 이념 '蒙以養正 養心正己'는 '세상에 바른 것을 널리 펼칠 수 있는 순수한 품성의 인간으로 교육하며, 착한 본성을 갈고 닦아 올곧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힘써 배우자는 의미입니다.

'양정'의 건학이념은 원래 '蒙以養正'에서는 가르치는 자의 교육 지향으로 '순수한 상태의 인간에게 바른 것을 키워준다'는 의미가 담고 있으며, '養心正己'에는 배우는
자의 학습태도로 호연지기를 지닌 올곧은 인간이 되기 위해 쉼 없는 노력과 교정 과정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양정'이라는 이름의 학교들이 많은 것은 '양정'이라는 글자가 '바르게 기르다'는 뜻이라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이름으로는 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출저가 바로 산수몽괘입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 산수몽괘를 '교육의 괘'라고 여기고, 어떻게 교육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근거로 삼아왔습니다.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양정’의 원리에 대하여 주역 ‘산뢰이괘’는 군자의 인격적 영양소인 음식(성인지도=진리)을 먹고 스스로를 기르라고 말합니다.
즉 진리를 자각하여 자신을 먼저 바르게 한 연후에 사람들을 기른다는 만물의 양육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어둔 사람이 길(吉)하려면 밝고 어진 사람을 찾아 스스로를 개발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주역의 가르침입니다.

'양정(養正)'이란 기를 ‘양’과 바를 ‘정’으로 바르게 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르게 기른다는 것은 사람을 기르는 대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정’에는 스스로 자신을 기르는 자양과 다른 사람들을 기르는 양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도 볼 수 있다. 수기(修己)란 스스로를 기르는 자양이며 치인(治人)은 다른 사람을 기르는 양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