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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무주 '잠을 깨우는 정자’ 환수정


[인문학 스토리] 너무나 고요해서 주변의 온갖 자연의 소리가 맑고 높아지고 싶습니다

-무주 '잠을 깨우는 정자’ 환수정

제영(題詠)은 정해진 제목에 따라 읊은 시(詩)를 일컫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경승지나 유명한 누정, 재실, 사찰 등을 대상으로 그곳의 아름다움이나 그 장소의 의의 등을 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무주 지역은 덕유산을 중심으로 굽이굽이마다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고, 곳곳마다 감탄이 절로 나올 만한 곳이 많습니다.
또한 적상산은 산세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존해 낸 역사적 의의를 간직한 곳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무주 지역 수령이나 관찰사, 또는 여행객들은 그 풍치에 감동해 시를 지어 그것을 후세에 남기는 데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무주의 정각으론 강수정(講樹亭)·둔세정·만벽정(晩碧亭)·분의정(分宜亭)·비암정(秘巖亭)·사유정(四柳亭)·서벽정(棲碧亭)·집승정(集勝亭)·초려정(草廬亭)·풍호정(風乎亭)·환수정(喚睡亭) 등이 있습니다.
무주의 제영시 작가들은 대부분 무주 지역에서 벼슬살이를 하거나 여행객, 또는 무주 출신의 문인들입니다.
제영시가 많은 곳으로는 옛날 무주현 관청인 와선당(臥仙堂), 관 누정이었던 무주읍 남대천 변에 위치한 한풍루(寒風樓), 환수정(喚睡亭) 등이 대표적입니다.
‘잠을 깨우는 정자’라는 의미의 환수정 역시 시인들이 많이 찾았던 곳입니다.
‘환수정 제영시’를 쓴 작가들을 보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서구(李書九, 1754~1825)를 비롯,관찰사 유엄·이해조 외에 이기연, 이노익 등이 있습니다. 한풍루나 환수정 제영시의 내용적 특징을 살펴보면 선경 이미지, 예컨대 선학이 내려올 만한 곳, 신선굴, 무릉도원 등으로 표현되었고, 아름다운 산세와 풍류가 가득한 곳임을 공통적으로 읊기도 했으며, 적상산 사고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도 있습니다.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터 환수정(喚睡亭)은 1707년(숙종 33)에 무주부사(茂朱府使) 조구상(趙龜祥)이 지은 관아의 누정입니다. 1872년(고종 9)에 부사 정익영(鄭翼永)이 남루(南樓) 2칸을 증축하면서 문의 이름을 ‘천일(天日)’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환수정은 무주군 무주읍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사라졌으나, 규장각(奎章閣)에 소장된 '무주부지도'를 보면 관아의 남쪽 남대천 변에 자리해 있었고, 그 우측에는 한풍루(寒風樓)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현재의 무주군은 1414년(태종 14)에 무풍현(茂豐縣)과 주계현(朱溪縣) 등 두 현이 합해져 무주현(茂朱縣)이 되었습니다. 무주현 관가 건물 항목을 보면 객관(客館), 아사(衙舍), 향사당(鄕射堂), 훈련청(訓鍊廳), 환수정(喚睡亭)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환수정은 관아에서 관리했던 누정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환수정은 무주군청 남쪽에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남대천 변의 북쪽이자 당시 관아의 남쪽에 자리했습니다. 무주군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훼철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권섭(權燮, 1671~1759)의 '옥소산록(玉所散錄)'에 환수정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전에 무주 서촌에 들어갔을 때 안음군수인 외삼촌께서 환수정(喚睡亭)에 나와 앉아 횃불을 보내어 나를 맞이해주었다. 밥 지을 쌀을 솥에 앉히려고 하다가 거두어(빨리) 떠났다.도착하니 자리에 가득한 기생들은 여름날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얼굴은 시커먾고 의복은 남루한 내 모습을 보고 거만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외삼촌이 말씀하시기를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라고 하시기에 내가 답하기를 "외삼촌께서 여기 와 계시다는 말을 듣고서 문안 인사를 여쭙기도 하고 밥을 얻어먹기도 하려고 왔습니다"고 했다"

이때 기생들 가운데 버릇없는 말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섬월(蟾月)이었습니다. 밤이 되자 외삼촌께서 자리 하나를 빌려 누웠다가 나와서 허리띠를 단단히 맸더니 섬월이 말하기를 "처를 매우 사랑하시나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외삼촌께서 보시고는 "어찌 너 따위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외삼촌과 함께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후에 다른 자리에서 이 기생들을 만났는데 모두가 이미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공손히 대했습니다.
그는 '섬월이 계섬월(桂蟾月)만 못했던가. 내가 양소유만 못했던가. 매우 우습다"고 했습니다.
계섬월은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 속의 여주인공의 하나입니다. 남주인공 양소유를 해치기 위해 잠입했다가 도리어 사랑하게 되고 나중에 양소유 첩이 됐습니다.
'고명사의(顧名思義)’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름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름에 담긴 뜻을 생각하며 그 뜻에 맞게 살고자 했습니다. 이름은 곧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건물에도 이름을 붙여 그 이름에 담긴 뜻을 기리고 새겼습니다.
‘환수정(喚睡亭)’이라는 정자는 세상 번뇌를 다 잊고서 꿀잠을 불러들이라는 의미에서 ‘부를 환(喚)’과 ‘졸음 수(睡)’자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잠을 깨운다는 의미는 시끄러워서 잠이 깬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너무나 고요해서 주변의 온갖 자연의 소리가 맑고 높아지는 것을 강조한 말로 보입니다.
경북 함양의 하환정(何換亭)은 ‘어찌 하, 무엇 하(何)’와 ‘바꿀 환(換)’자를 써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자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하환정의 '하환(何換)'은 "어찌 바꿀 수 있겠는가?"라는 말로 함안 무기연당(咸安 舞沂蓮塘)을 삼공(三公)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뜻이 숨어 있습나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중국 남송의 문인 대복고(1167-?)의 시 '조대(釣臺)'에서 유래했습니다.

만사에 관심 없고 낚싯대 하나 드리우니
삼공의 벼슬인들 이 강산과 바꿀 쏘냐
평생에 유문숙을 잘못 안 탓에
부질없는 이름만 온 세상에 날렸구나

萬事無心一釣竿(만사무심일조간)
三公不換此江山(삼공불환차강산)
平生誤識劉文叔(평생오식유문숙)
惹起虛名滿世間(야기허명만세간)

이 시는 엄광(BC37-AD43)의 고사를 담고 있습니다. 유문숙은 엄광의 죽마고우로 훗날 후한의 광무제가 되는 유수를 말합니다. 엄광은 유문숙이 후한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자 이름을 바꾸고 부춘산으로 들어가 은거한 인물입니다. 엄광은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스스로 은둔을 택하여 삼공의 벼슬도 그에겐 부질없는 이름에 불과했습다. 하환정에는 삼공의 벼슬, 즉 출세보다는 자연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며 살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보물 '김홍도 필 삼공불환도’는 조선 후기 산수화․인물화․풍속화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57세인 1801년(순조 1)에 그린 8폭 병풍 그림입니다.
사선구도를 활용해 화면 전체에 역동감을 주었고 인물, 산수, 화조(花鳥)가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보물로 지정된 '추성부도(秋聲賦圖)'(1805년)와 더불어 김홍도 말년의 창작활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러 분야에 두루 뛰어났던 그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역작입니다.
‘삼공불환(三公不換)’은 전원의 즐거움을 삼공(三公)의 높은 벼슬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삼공불환도’에 그려진 산수와 풍속 등 다양한 장면은 후한(後漢) 시대 중장통(仲長統)이 전원생활을 찬양한 '낙지론(樂志論)'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를 토대로 강을 앞에 두고 산자락에 위치한 대형 기와집과 논밭, 손님 치례 중인 주인장, 심부름 하는 여인, 일하는 농부, 낚시꾼 등을 곳곳에 그려 전원생활의 한가로움과 정취를 표현했습나다. 김홍도는 '낙지론'의 내용을 조선 백성들의 생활상으로 재해석하였으며, 이로 인해 '삼공불환도'는 풍속화와 산수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