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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라감사 송인수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전라감사로 부임했다. 
 송인수는 각처를 순찰하며 민정을 살피고 효자와 열녀를 포상하였다. 또한 '사서오경'을 간행 보급하고, 향교를 방문하여 교생을 격려하고 '소학' 가르쳤다. 기대승도 훗날 선조에게 아뢰었다. "송인수가 관찰사로 와서 '소학'을 읽도록 하였기 때문에 소신은 비로소 성현의 사업이 수신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양과동정, 광주 남구 이장동. 훗날 송인수는 청주의 신항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전주의 화산서원 등에서 제사 지냈다. 
장성의 청백리 송흠을 위한 위로연을 정성껏 치렀고, 뜻있는 선비도 많이 만났다. 특히 태인의 이항은 하인까지 물리치고 직접 찾아갔다. 한때 협객에서 학문의 길로 들어선 이항이 얼마나 반가웠으면 감사의 위세나 격식을 차리지 않았을까? "호해(湖海) 남녘의 한 사람, 영광의 벼슬도 구하지 않고 가난해도 걱정이 없구려." 이항도 흔쾌하였다. "호남을 관찰하니 교화는 순박하고, 도의를 몸소 실천하니 시골 사람이 본받는다오."
 한편 동료와 선후배가 여러 고을을 맡아서 좋았다. 남원부사 오겸(吳謙), 남평현감 백인걸(白仁傑), 무장현감 유희춘, 광주목사 송순, 옥과현감 김인후였다. 전라도사는 기묘사화로 파직당했던 고운(高雲)이었다. 백인걸을 제외하곤 호남인으로 기묘사림에게 직접 영향을 받았다.
 이들 또한 민생 보호와 교육 진흥은 괄목할 만하였다. 무명잡세를 없애고 공평 과세하고, 향음주례나 양로연을 거르지 않으며, 학당을 세워 학동을 가르친 것이다. 호남에 신풍이 불었고 송인수는 신명났다. 어느덧 감사 1년 임기를 마쳤다. 그런데 조정은 6개월 후에야 후임을 보냈다. 외척이 송인수를 꺼려하여 더 묶어두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사신으로 보냈다. 이때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했다.<출처 조선일보 입력 2012.06.25 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