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연 전 기령당 당장이 1983년(癸亥) 신정(新正)에 지은 ‘호남시’
‘높은 산(高山) 위에 익산(益山)이 있으니 어느 누가 여산(礪山)을 녹록하게 여길까 전주(全州)와 무주(茂朱)는 임실(任實)을 거치고 기쁘고(咸悅) 평안(咸平)하니 모두 낙안(樂安)일세 여름날 잔잔한 바람 구름봉(雲峯)에 불어오고 겨울 날 눈보라에도 양기를 일으키네(興陽) 강진을 휘감아 안은 비단같은 나주(羅州)요 우뚝 선 영험한 바위(靈巖) 광주를 빛내네 용담(龍潭)의 아래 긴 강(長水)이 흐르고 방죽 옆 금도랑(金溝)은 옥구(玉溝) 사이라네. 진도와 진산은 진원(珍原)으로 날아가고 안정에 힘쓰고 안녕을 도우니 바로 진안(鎭安)이라 곡성(谷城)과 능성(綾城)은 하나같이 긴 성이요 예 구하고(求禮) 덕 일으키니(興德) 참 보물성이네(寶城) 만약 호남이 순박과 창성(淳昌)을 노래하면 크게 어질고 길이 흥하여 제주(濟州)를 구제하리 세 산의 정기 어린 골짜기로 금산(錦山)이 순수하고 네 강의 물결 멀어도 만경(萬境)의 연못이 되네 퉁소 구멍 같은 정읍(井邑)에서 고창(高敞)이 시작되고 넓고 밝은 광양(光陽) 진실로 무성하고 길다(茂長) 민심이 화순(和順)하니 복록이 함께 하고 집안 번성하는 창평(昌平) 천명을 따라서 라네(順天) 누가 임피(臨陂)를 찾아 김제로 갈꼬 못 남쪽(潭陽)에 쌓고 용안(龍安)을 보전하네 눈 가득한 옛 언덕(古阜)은 오직 옥과(玉果) 뿐 남평(南平)에 달 비쳐 신령한 빛(靈光) 퍼지네 봄 구름에 호랑나비 남쪽 언덕(南原)을 날고 가을날 기러기 해남(海南)에서 부르짖네’
흥양은 고흥의 옛 이름이며, 진원은 장성군 진원면 지역입니다. 능성은 화순군 능주면, 후에 능주군이 됐습니다. 무장은 고창군 무장면 지역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호남가(湖南歌)'는 다음과 같습니다.
'함평천지(咸平天地) 늙은 몸이 광주(光州) 고향(故鄕)을 보랴하고 제주어선(濟州漁船) 빌려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갈제 흥양(興陽)의 돋는 해는 보성(寶城)에 비쳐있고 고산(高山)에 아침안개 영암(靈巖)을 둘러있네
태인(泰仁)하신 우리성군(聖君) 예악(禮樂)을 장흥(長興)하니 삼태육경(三台六卿) 순천(順天)이요 방백수령(方伯守令)이 진안(鎭安)현이라 고창(高敞)성 높이 앉아 나주(羅州)풍경 바라보니 만장운봉(萬丈雲峰) 높이 솟아 층층(層層)한 익산(益山)이요 백리 담양(潭陽)의 흐르는 물은 굽이굽이 만경(萬頃)인데 용담(龍潭)의 맑은 물은 이 아니 용안처(龍安處)며 능주(陵州)의 붉은 꽃은 골골마다 금산(錦山)이라 남원(南原)에 봄이 들어 각색(各色) 화초(花草) 무장(茂長)허니 나무나무 임실(任實)이요 가지가지 옥과(玉果)로다 풍속(風俗)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인디 기초(奇草)는 무주(茂朱)하고 서기(瑞氣)는 영광(靈光)이라 창평(昌平)한 좋은세상 무안(務安)을 일 삼으니 사농공상(士農工商)이 낙안(樂安)이요 부자형제(父子兄弟) 동복(同福)이로구나 강진(康津)의 상고선(商賈船)은 진도(珍島)로 건너갈제 금구(金溝)의 금(金)을 이뤄 쌓인제 김제(金堤)로다. 농사(農事)하던 옥구(沃溝)의 백성(百姓) 임피상의(臨陂裳衣) 둘러입고 정읍(井邑)의 정전법(井田法)은 납세인심(納稅人心) 순창(淳昌)허니 고부청정(古阜靑靑) 양유색(楊柳色)은 광양(光陽)춘색(春色)이 팔도(八道)에 왔네 곡성(谷城)에 숨은 선비 구례(求禮)도 하려니와 흥덕(興德)을 일삼으니 부안(扶安)제가(齊家)이 아니냐 우리 호남(湖南)의 굳은 법성(法聖) 전주백성(全州百姓)을 거나리고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아들어 여산석(礪山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꽃았으니 삼례(參禮)가 으뜸인가 거드렁 거리누나'
호남가는 단가의 일종이며 남도소리 곡조이고 장단은 중머리이며 4,3각이 있습니다. 호남출신이면 누구나 직접 부르지는 못할 망정 한번 들으면 곧바로 흥을 느끼게 되고 특히 첫머리인 "함평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하고"까지는 거의가 부를줄 아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호남가"의 이름은 몰라도 "함평천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 노래 제목이 "함평천지"인줄 아는 사람이 많을 정도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지은 사람에 대해 국악보(國樂譜)에는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다른 고을처럼 제 고장에 대한 노래가 없는 것을 아쉬워 하여 지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재효(申在孝) 계통에서는 신(申)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노래는 전라도 주군현(州郡縣, 조선조 때) 57고을중 40개 고을의 이름을 산수와 순후한 풍속, 그리고 충효와 선행에 따라 말 풀이를 했습니다. 함평에서 시작하여 임피(臨陂)에서 끝나는 호남가는 1백년만에 볼까말까한 목소리라는 임방울(林芳蔚)에 의해 불려 지면서 진가를 나타냈습니다. 1821∼1823년까지 함평현감을 지낸 권복(權馥)이 함평을 노래한 함산가(咸産歌)의 첫 구절에 "호남의 여러 고을을 노래한 호남가도, 첫머리에 함평을 부르지 않았던가"라고 한 것을 보면 170년전에도 호남가가 널리 불리어 오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호남가가 함평에서 머리를 잡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여기에 대해 여러 가지 말이 있으나 다음과 같이 귀결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함평(咸平)이라는 이름이 호남에서 제일 좋기 때문입니다.
"咸"은 모든 것이 가득차고 원숙함을 뜻하며 "平"은 평탄할 평, 바를평, 다스릴 평, 화할 평,고를 평, 쉬울 평, 거듭 풍년들 평 등의 뜻을 가지고 있고 제왕(帝王)의 가장 보람된 꿈인 태평성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두루 화평스럽고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는 천지(天地),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없고 이러한 속에서 늙은 노인네가 빛고을(光州) 고향의 길을 떠나는 것은 참으로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함평이 맨 먼저 노래되었을 것입니다.(함평군청 홈페이지)
끝의 '삼례'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서구가 전라도지역을 지나며 전주를 향해 삼례지역에서 세 번의 예를 갖추었기 때문에 생긴 지명이란 설명이 있지만 조선이전인 고려시대부터 삼례지명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는 후대의 잘못된 설명으로 파악됩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교통의 요지인 이곳 삼례를 지나기 위해서는 지역 사람들에게 세 번 절하고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이 또한 단지 삼례지명을 한자 뜻으로 풀어 설명한 소박한 해석일 뿐입니다.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관련항목 보기는 본래 전주군 오백조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삼례도찰방이 있어 삼례역 또는 삼례라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신후리, 산후리, 서여리, 구주리, 상주리, 중주리, 만경동, 마천리, 인좌리, 신안리, 하백리, 가인리, 동여리, 서신리, 대천리, 구금리와 익산시 두촌면 학연리 일부를 병합해 삼례도찰방역의 이름을 따서 ‘삼례리’라 했습니다.
삼례지명의 의미는 이 지역을 부르는 원지명이 ‘한내’라는 표현임을 고려할 때 삼례의 의미가 확인될 수 있습니다. 즉, 한내란 ‘커다란 강’을 지칭하는 우리 고유지명으로 앞서 세 물줄기가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룬 한내가 있는 지역이란 의미로 삼례를 옛날에는 한내벌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내를 한자로 기록할 때 소리나는 대로 적어 삼례(參禮)로 기록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때문에 삼례가 호남의 하일라이트라는 의미같습니다.
조선후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대동맥은 9대로로 촘촘히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전북은 2개의 대로가 통과했다. 서울에서 차령고개를 넘고 여산을 지나 삼례를 거쳐 전주, 남원, 진주를 지나 통영에 이르는 제6로인 통영대로가 그것이며, 삼례에서 갈재를 넘어 해남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제7로 삼남대로가 그것입니다.
"삼례지역은 조선시대에는 현재 전라북도 권역에 설치되었던 13개 역참을 총괄하는 관리인 종6품의 찰방이 주재하는 곳으로 교통 및 정보통신의 중핵지역이었다. 전주를 연결하는 다리가 찰방다리라고 불릴 정도로 그 위상이 부각되었다.
이 같은 정보통신등의 중요성은 1892년 동학 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을 위한 집회장소로 삼례가 활용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삼례가 동학농민군의 총지휘부로서 기능하였을 뿐 아니라 10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동학농민군이 삼례에서 2차봉기한 근거가 되었다.
이같은 도로교통의 중심지적 성격은 이후 신의주에서 목포로 연결되는 국도1번 도로가 삼례를 지나게 되었으며 전라선 철도와 호남고속도로가 지나며 현재까지 그 역사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말했습니다.
전라남,북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명칭으로 호남지방이란 말을 즐겨 쓴다 말 그대로 자면 호남은 '호수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 이남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종실록에는 그 호수가 김제의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적혀 있고, 또 다른 문헌에는 금강을 옛날에는 호강이라고 불렀는데, 금강을 가리킨다고 적혀 있습니다.
호남이란 명칭의 유래는 문헌상 세 갈래(금강, 벽골제, 황등호) 설이 있지만 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재조명해 볼 때, 호남의 3호(三湖, 즉 김제 벽골제, 정읍 눌제, 익산 황등제) 가운데의 하나인 익산의 황등호라고도 합니다.
호남(湖南)은 말 그대로 '호수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이곳에 등장하는 호수는 지금껏 여러 설이 제기됐으나 전북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또는 충남과 전북을 가르는 호강(湖江, 지금의 금강·錦江)이 유력 근원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즉 벽골제 이남 혹은 금강 이남을 호남이라고 칭한 것이고 전라 지역 대부분을 포괄합니다.
아무튼 호남은 원래 충청남도의 공주, 부여, 논산, 금산 지역 등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호남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습니다.
전라도로 칭하고 있는 것은 예로부터 호남지방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던 전주와 나주에서 한 음절씩 따온 것입니다.
고려조 현종 재위시 전라도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전국을 13도로 개편을 하면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뉘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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