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토리] 임피사람 김모(金某), 부농이 되다
임피사람 김모(金某)는 그 고을 공생(貢生, 향교의 교생)이었습니다.
일찍이 아전 구실을 그만두고 물화를 교역하는 일로 인근 장터를 두루 다녔습니다.
그는 나이가 젊고 풍류남인 까닭에 가는 곳마다 여색을 가까이 했고 그때마다 잉태를 시켰습니다.
게다가 영락없이 사내 아이만 낳았습니다. 그래서 비록 한때 잠깐 가까이한 여자라도 반드시 관청에 입지(立旨)를 내어두니 전후 낳은 아들이 합해서 여든 셋을 헤아렸습니다.
20 여년이 지나 아들들이 대체로 자라서 성인이 되었으나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중에 장성한 아들들 역시 그 아버지의 힘을 입지 않고 대부분 어머니 손에서 성취했으며, 더러는 제가 혼자 장가를 들기도 했습니다.
갑을(甲乙) 양년, 즉 1814년 갑술과 1815년 을해의 흉년을 겪은 다음, 김공생은 파락호 신세인데가 이미 나이까지 많이 먹었습니다.
하루는 자기가 낳은 자식들을 전부 불러모았습니다. 온 자도 있고 오지 않은 자도 있어 모여든 아들이 70여 명이었습니다. 이 자식들을 끌고 김제
만경 두 고을 사이의 들녘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긴 행랑 100 여 간을 짓고 아들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고 질그릇장이가 되는 등 구색을 갖춘 탓에 편안히 앉아서 밥을 멋게 됐습니다.
그곳의 어영청(임금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군영) 둔전(각 궁과 군영 및 관아에 속한 전답)으로 여러 해 묵어 있었습니다.
둔전은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로 군인이 직접 경작하는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 가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둔전은 각 궁과 관아에 속한 토지로 관노비나 일반 농민이 경작하였으며, 소출의 일부를 거두어 경비를 충당했습니다.
소설 장길산에 보면 둔전을 이야기하면서 ‘어영청의 둔전으로 여러 해 묵어 있던 황무지를 개간하여 메밀과 보리, 콩을 심어 육칠백 석을 거두었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김공생은 이른 봄날에 여러 아들들을 거느리고 부지런히 개간해 메밀을 파종해 여름에 6~7백석을 거두었습니다.
이듬해는 보리, 콩, 팥 등속을 심어서 근 천석을 수확했고, 그 다음해는 논을 만들어 벼를 심었던 바, 그 해의 추수는 전년의 곱절이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3년이 지나자 가산이 점차 풍족해졌습니다. 김공생은 직접 어영청에 가서 진전(농사를 짓지 않는 땅)을 개간한 사실을 대장에게 아뢰고, 소작을 통해 지금까지 경작해오고 있습니다.
그 후로 10여 년이 지나자 70여 명의 아들들이 자손을 낳아서 인구가 점점 불었습니다.
김씨 마을은 수백 호의 큰 마을을 이루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번창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해동야서'와 '청구야담'에 실린 글입니다.
경영형 부농설은 1960, 70년대 김용섭 전 연세대 교수 등이 전북 고부군 용동궁 전답 양안 등을 분석해 제창한 학설입니다. 조선 후기 임노동자를 고용한 광작(廣作)이 이뤄졌고 시장 출하를 목적으로 상업 작물이 대규모로 재배되는 등 자본주의의 싹이 텄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뒷받침합니다. 이후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이 고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여전히 담겨 있는 통설입니다.
경영형부농은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부를 축적한 조선 후기의 부농(富農)을 말합니다.
농민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영농 기술을 개발함과 동시에, 경영을 합리화하여 소득을 높이기도 합니다.
농민들이 의도한 방안에는 많은 농지를 적은 노동력으로 일구어 소득을 늘리는 법과 적은 토지에 소득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여 수익을 늘리는 법이 있었습니다.
전자의 방안을 흔히 광작이라 하는데,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앙법과 견종법으로 노동력이 절감되어 농민 1인당 경작 면적이 넓어지니까 가능했습니다.
후자의 방안으로 농민들은 고소득을 보장하는 인삼, 담배, 목화, 채소, 과일, 약재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합니다.
특히 인삼과 담배는 인기있는 상품 작물이었습니다. 서울 근교에서는 채소 재배가 성하여 농민들의 소득을 높여 주었습니다.
광작이나 상품 작물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은 임노동자의 고용으로 해결했습니다.
농업에서의 경영형 부농의 존재는 상공업에서의 도고나 선대제와 함께 조선 후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싹으로 주목됩니다.
경영형 부농은 부를 축적한 후 신분 상승에 노력함으로써 봉건 사회 해체기의 새로운 변혁 세력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구복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최근 한국고문서학회 연구발표회에서 책을 논평하고 “책에 따르면 조선 후기 농촌 사회구조를 설명하는 정설로 거의 수용된 경영형 부농설이 통계 처리가 완전히 잘못돼 나온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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