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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춘향가 십장가와 흥부 매품팔이

[인문학 스토리]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 유죄(無錢有罪)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나요

ㅡ춘향가 십장가와 흥부 매품팔이

춘향과 십장가

춘향이 훌륭한 것은 기생이지만 기생이기를 거부하고 주체적으로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지켜나가고자 한 데 있습니다. 춘향은 변학도의 수청 요구를 온몸으로 거부합니다. ‘십장가’는 춘향의 이러한 몸짓을 보여주는 백미입니다.

(진양) 집장사령 거동을 보아라. 별형장(別刑杖) 한 아람을 덥숙 안어다가 동(東)뜰 밑에다 좌르르..... 펼쳐놓고 형장(刑杖)을 고른다. 이놈도 잡고 늑끈 능청 저놈도 잡고 늑끈 능청 그 중의 등심 좋은 놈 골라 쥐고 갓을 숙여 대상을 가리고 사또 보는 데는 엄령이 지엄허니 춘향을 보고 속 말을 헌다. “이얘 춘향아, 한 두개만 견디어라. 내 솜씨로 살려 주마. 꼼짝 꼼짝 말아. 뼈 부러지리라.” “매우 쳐라.” “예이.” 딱. 부러진 형장 가지는 공중으로 피르르 떨어지고 동뜰 위의 춘향이는 아픈 말을 퇴심 실어 아니 허고 고개만 빙빙 돌리면서, “일자로 아뢰리다. 일편단심 먹은 마음 일부종사 나뿐이요 일개형장이 웬일이요. 어서 급히 죽여주오.” “매우 쳐라.” “예이.” 딱. “이자로 아뢰리다. 이부불경 이내 마음 이군불사(二君不事) 다르리까. 이비(二妃) 사적 아옵거든 두 낭군을 섬기리까. 가망 없고 무가내요.” 삼자 낫을 딱 붙이니, “삼생가약 맺은 언약 삼종지법(三從之法) 알았거든 삼월화(三月花)로 알지 마오.” 사자를 딱 붙여노니, “사대부 사또님이 사기사(事其事)를 모르시오. 사지를 짝짝 찢어서 사대문에다 걸드래도 가망 없고 무가내요.” 오자로 또 붙이니, “오자로 아뢰리다. 오마(五馬)로 오신 사또 오륜을 밝히시오. 오매불망 우리 낭군 잊을 가망 정녕 없소.” 육자를 딱 붙여노니, “육부의 맺힌 마음 육시허여도 무가내요.” 칠자 낫을 붙여 노니, “칠척검 높이 들어 칠 때마다 동갈러도 가망 없고 무가내요.” 팔자 딱 붙이니, “팔방부당 안될 일을 팔짝 팔짝 뛰지 마오.” 구자를 또 붙이니, “구중분우(九重分憂) 관장되어 궂은 짓을 그만하오. 구곡간장 맺힌 마음 어서 급히 죽여 주오.” 십자를 딱 붙여놓니, “십장가로 아뢰리다. 십실 적은 고을도 충령이 있삽거든 우리 남원교방청에 열행 하나 없으리까. 십맹일장 날만 믿든 우리 노모가 불쌍허오. 이제라도 이몸이 죽어 혼비중천 높이 떠 도령님 잠든 창전(窓前)에 가 파몽(破夢)이나 이루어지고.”(보성소리 성창순 <춘향가> 중에서)

현실세계에서라면 매를 맞으면서 노래 부르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고통을 견디기도 어려운데, 어찌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지요? 하지만 상황의 정서나 의미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사설을 짜 나가는 판소리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가능합니다. 동편제 명창 조기홍의 더늠으로 전하는 ‘십장가’는 여러 명창이 즐겨 불렀습니다. 근대 5명창에 속하는 송만갑 명창이 남긴 유성기 음반을 들어 보면 내면에서 토해내는 춘향의 절규가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좌우에 나졸들이 늘어서서 능장(稜杖), 곤장(棍杖), 형장(刑杖)이며 주장(朱杖)을 집고, "아뢰라! 형리(刑吏)를 대령하라!" "예, 머리 숙여라! 형리요." 사또는 어찌나 분이 났던지 벌벌 떨며 기가 막혀 '허푸허푸'하며, "여봐라! 그년에게 무슨 다짐이 필요하리. 묻지도 말고 형틀에 올려 매고 정강이뼈를 부수고 물곳장(物故狀)을 올려라!" 춘향을 형틀에 올려 매고 쇄장의 거동 봐라. 형장이며 태장(笞杖)이며 곤장이며 한 아름 담쑥 안아다가 형틀 아래 좌르륵 부딪치는 소리에 춘향의 정신이 혼미하다'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는 춘향에게 매질하는 장면입니다. 번역문은 1916년 완판본(完板本)인 다가서포본(多佳書鋪本)의 한글본 『춘향가』(內題 ‘열여춘향슈졀가라’)를 현대문으로 다듬어 보았습니다.

흥부의 매품팔이

흥부 아내는 방아 찧기, 술집의 술 거르기, 시궁발치의 오줌 치기, 얼음이 풀릴 때면 나물캐기, 봄보리를 갈아 보리 놓기, 흥부는 이월 동풍에 가래질하기, 삼사월에 부침질 하기, 일등 전답의 무논 갈기, 이집 저집 돌아가며 이엉 엮기, 궃은 날에는 멍석 맺기 등 이렇게 내외가 온갖 품을 다 팔았습니다.
품팔이는 품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 주는 일을 말합니다. 흥부의 아내는 방아 찧기, 술집의 술 거르기, 시궁발치의 오줌 치기, 나물 캐기, 봄보리 갈아 보리 놓기 등의 일을 했습니다.
흥부도 이월 동풍에 가래질하기, 삼사월에 부침질하기, 일등 전답의 무논 갈기, 이집 저집 돌아가며 이엉 엮기, 궃은 날에는 멍석 맺기 등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게을러서 가난한 것이 절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품일을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살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자본이 있지 않은 이상 돈을 모을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흥부는 매를 맞아 30냥을 얻는 매 품팔이까지 하게 됩니다.

“나랏곡식 얻을 생각 말고 매를 맞으시오. 고을 김부자를 어느 놈이 영문에 없는 일을 꾸며 고소했소. 김부자를 압송하라는 공문이 왔는데 김부자는 마침 병이 나고 친척도 병이 있어 누구를 대신 보내고자 찾고 있소. 연생원이 김부자 대신 영문에 가서 매를 맞으면 그 값으로 돈 삼십 냥을 줄겁니다. 그 돈 삼십 냥은 예서 증서를 줄테니 영문에 가서 대신 매를 맞고 오는 것이 어떻소?”

흥부는 삼십 대를 맞는 댓가로 30냥을 받게 됩니다. <흥부전>에서 조선시대 30냥을 체감해볼 수 있는 문장이 존재합니다. 30냥이면 10냥으로 고기를 사고 10냥으로 쌀을 사 포식하고 열 냥으로 소를 사서 스물 넉 달 배내기를 줄 수 있을 정도로 큰 돈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흥부는 김 좌수 대신 30냥을 받고 감영에 매를 맞으러 갔으나 마침 나라에서 죄인을 석방하라는 사면령이 내려져 그나마 매품도 팔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청성잡기』에 실린 어리석은 사람이 맞은 매는 곤(棍)과 태·장의 매입니다. 곤 7대는 엽전 다섯 꿰미, 장 100은 엽전 일곱 꿰미의 값으로, 맞는 부위가 넓적한 면적의 매인 곤이 회초리인 장보다 훨씬 무겁고, 집장자(執杖者)에 따라 맞는 매의 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도움말 조윤말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지방관의 경우,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빈번하게 벌어졌습니다. 막대한 돈을 들여서 지방관의 자리에 오르면 본전을 찾고, 더 높은 관직을 사기 위해서 돈을 끌어 모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부패한 관리들의 먹잇감이 된 것이 바로 돈으로 신분을 산 뼈대 없는 양반들이었습니다.

누명을 씌우거나 혹은 이런 저런 죄목으로 잡아다가 가두고 매를 친다고 협박을 가하면 돈으로 산 양반의 체면이 손상될까 두려워진 이들은 대신 매를 맞아줄 매품팔이를 구했습니다. 물론 대신 매를 맞아주는 것을 허락해주는 명목으로 관리와 아전들에게도 막대한 돈이 흘러들어갔습니다. 부패의 먹이사슬 제일 끝에 대신 매를 맞아주는 매품팔이라는 직업 아닌 직업이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매품팔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양반들이 별다른 기록을 남겨놓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인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돈을 받고 매를 대신 맞거나 죗값을 돈으로 대체하는 불합리함이 통상적으로 행하여졌는데, 이는 형정 운영이나 형벌 집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실형(失刑)’이었습니다. 그러한 불합리를 합리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 진보입니다. 현재 우리는 죄에 대한 벌로 신체를 때리는 일도, 대신 매를 맞는 일도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혹은 권력으로 죄를 대신하는 일도 사라졌는가에 대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요.

1978년 ‘밀조주 방지에 관한 부탁의 말씀 자료’엔 벌과금은 물론 사정에 따라 체형도 가한다는 문구가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양창묵 남원세무소장, 진상호 남원탁주주조협회장이 이 해 1월에 공지한 내용입니다. 이는 운봉주조 체험장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의미가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