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토리] 당신은 노을을 좋아하나요
-임실 호숫가의 찻집 '하루(霞樓)'와 임제가 자하주를 맛본 노을의 고장 무주 '한풍루'
전북 임실, 호숫가에 작은 돌담을 끼고 단아하게 자리 잡은 한옥 찻집 ‘하루’.
옥정호 너머로 먼 산이 바라다보이는 다실. 사계절 바뀌는 풍광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이곳에서 자그마한 차 밭을 가꾸며 소박하게 살고 싶어 하던 주인장은 아름다운 풍광을 더 많은 이와 즐기고자 작은 다실을 만듭니다. 그의 이런 소박한 바람이 간결한 공간을 낳았고, 이 간결한 공간은 여러 사람에게 고요한 휴식을 주고 있습니다.
'하루(霞樓)' 는 아름다운 노을(霞)을 보며
차를 마시는 누각(樓)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루’의 한옥 본채는 편액이 송하정(松霞亭)입니다. 소나무와 노을이라는 뜻입니다.
고창의 해리에 있던 '송계정(松溪亭)' 건물을 이쪽으로 옮겨오면서 송하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조선조 말 성영덕(창녕성씨)이 나라가 기울어지자 귀향해 지은 건물로 본래는 '송계정'이었다고 합니다.
1911년 보수, 1921년, 1933년 그의 아들 성한수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이곳은 선조들의 사랑방으로, 또는 은밀히 독립자금을 조달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합니다.
'송산리(松山里)'는 고창 고창군 해리면에 속하는 법정리입니다.송산리는 동학 농민 혁명 이전에는 ‘청산’으로 불렸습니다. 동학 혁명 중에 뒷산의 우거진 소나무 덕에 마을이 무사했다는 이유로 ‘송산(松山)’으로 개칭되었다고 합니다.
1530년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본래 무장군 청해면(靑海面)의 지역으로, 문화 유적으로는 상송마을에 고려시대 문신인 성사달(成士達) 등 창녕성씨(昌寧成氏) 5명을 모신 송양사(松陽祠, 전북 문화재자료 제163호)가 있고, 호서쇄관을 지낸 성영덕(成永德)의 옛 송계정(松溪亭) 정자 터가 있습니다. 행산마을에도 성터(城址)인 원턱골이란 지명과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해리면의 정자로 유명한 것은 송계정(松溪亭), 풍욕루(風浴樓), 경현당(景賢堂)이 있었습니다. 다음은 성영덕이 지은 송계정 칠언율시입니다.
솔 푸르고 시냇물 희니 고을의 안개 붉었다
고요한 자리에 난간 이루니 안계(眼界)가
통한다
과거의 분망한 일들이 꿈속 같거늘
만년의 소일거리 시 속에 묻히는 것 더 하더라
높은 절개 성글고 야위었으니 몇 번이나 풍설을 견디었는가
참된 근원 맑고 맑으니 청렴한 바람이 움직이더라
향사(香社)와 난정(蘭亭)은 천년 아래
뒷사람 감히 취미가 같기를 바라네
'솔 푸르고 시냇물 희니 고을의 안개 붉었다'는 한자로 '松靑溪白霞
紅.(송청계백동하홍)입니다.
때문에 이 자리엔 강천수의 '차성침랑영더식송계운'(次成寢郞永悳松溪亭韻, 침랑은 종묘 등을 관리하는 참봉)과 '차송계정(次松溪亭) 십승운(十勝韻)'이 전합니다.
노송학관(老松鶴觀, 늙은 소나무의 학을 보다), 평천어기(平川漁磯, 평천의 낚시터), 방현초거(榜峴樵籧, 방고개 나무꾼 피리 소리), 고성청람(古城靑嵐, 옛 성의 푸른 이내), 안시야등(安市夜燈, 안산시장 등불), 도솔효종(兜率曉鐘, 도솔암의 새벽 종소리), 붕산명월(鵬山明月, 한산의 밝은 달), 계교가화(鷄郊嘉禾, 계교의 황금 들판, 죽림초설(竹林初雪, 죽림에 내리는 첫눈), 봉래귀운(蓬萊歸雲, 봉래산으로 돌아가는 구름) 등 10개의 좋은 경치가 전합니다.
옥정호로 이전되기 전에는 춘암(春菴)의 송계정(松溪亭) 등 현판 30개가 자리했다고 합니다.
2003년 현재의 장소로 옮겨 차 문화공간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효봉 여태명 서예가가 입구의 입간판 '하루'와 '송하정'이란 글씨를 한글로 써 단아한 맛을 더합니다.
노을은 선비들도 광적으로 좋아했습니다. ‘연하벽(煙霞癖)’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안개 연 煙 자, 노을 하 霞 자입니다. 안개와 노을을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뜻이 바로 ‘연하벽’입니다. 이 ‘연하벽’이라는 병에 걸리면 세속을 떠나야 합니다. 갑자기 산이 좋아집니다.
문명과 백화점과 쇼핑과 돈과 멀어지면 연하벽이 가까워집니다.
‘단하실(丹霞室)’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을 단하실이라고 합니다. 옥황상제의 도서관 주위를 붉은 노을(霞)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붉은 노을이 둘러싸고 있어야 마귀나 잡귀들이 감히 책을 훔쳐가지 못한다. 마귀를 쫓아내는 장치가 바로 단하입니다.
임제가 노래한 무주 한풍루(寒風樓)와 자하주
경북 안동에서 또 한 권의 옛 조리서가 발견됐습니다.
고성이씨 간서(澗西) 이정룡(李庭龍·1798-1871) 선생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음식절조'(飮食節造)라는 책입니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명문가의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宾客) 문화 및 조선 후기 언어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됩니다.
한글과 한문으로 쓰여진 이 책은 가로 8.5cm 세로 12cm의 손바닥 정도 크기입니다. 경북유교문화원 이재업 이사장이 선조들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 공개했습니다.
모두 75종의 음식이 실려 있는 바, 음식조리법이 46종, 술 제조법이 29종입니다.
음식 종류로는 한과와 떡, 찜, 탕, 김치, 간장, 식초 등이 수록돼 있다. 다른 옛 조리서에서 찾을 수 없던 향온주, 하일주, 보리청주, 자하주 등 독특한 술 제조법이 포함돼 앞으로 가양주 개발·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일 전망입니다.
전북의 대표적인 누각(三寒)으론 무주 한풍루(寒風樓)와 남원 광한루(廣寒樓), 전주 한벽당(寒碧堂)이 있습니다. 보통 이를 호남의 3한(三寒) 건물이라고 합니다. 한기를 느낄 정도로 깊은 물 위에 자리해 경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무주읍 당산리 남산 언덕의 한풍루(寒風樓)ㆍ환격정(喚毄亭) 모두 적천(赤川) 가에 있습니다.
한풍루(寒風樓,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는 조선시대 지어진 2층 누각입니다.
한풍루는 수 많은 문인묵객들이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어 글을 남기며 풍류를 즐겼습니다.
호통화통하게 살다간 기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도 무주 한풍루(茂朱寒風樓)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습니다.
보허사 노래하던 집 신선들이 흩허지니 / 고루(高樓) 따로 서서 거오 탄 형상이라/반가운 손이 와서 뜻밖에 만났으니 /자하주(紫霞酒)에 실컷 취해 거들며 노닐밖에
步虛堂上散仙曹 別起高樓駕巨鰲 靑眼客來逢邂逅 紫霞杯亞醉遊遨
고요한 밤 달 밝은데 여울이 꽁꽁 얼고 / 찬 구름 바람에 쏠려 눈산이 우뚝하이 두어라/백화난만(百花爛熳)한 늦봄을 기다려 /꿈결에 물새 따라 강뚝 거닐어 보세
月當靜夜氷灘壯 風折寒雲雪岳高 會待芳菲春暮節 夢隨沙鳥過江皐
'자하주'는 신선이 마시는 술로, 신선은 보라색 운하(雲霞)를 타고 다니는가 하면 자하주 를 마신다는 전설이 있는데, 무주는 신선이 사는 곳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임제의 '면앙정부'에도 자하주가 나옵니다.
면앙정부(俛仰亭賦)는 1576년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의 나이 27세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면앙집 제3권에 보면 84세의 송순은 1576년 5월 18일에 임제에게 부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6일에 임제에게 글을 써주어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씁니다. '면앙정부(俛仰亭賦)'엔
'큰 고을은 남쪽에 놓여 있고 넓은 들판은 동쪽으로 펼쳐 있네. 용이 서려 있는 일곱 굽이요, 선천적으로 아늑한 한 마을이었네. 경치가 세상에 빼어난 별유천지요. 바람과 달은 천만년 한가로웠네.(중략) 이 정자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이 정자에서 머리 숙여 땅을 보니 이 산정에서의 삶이 더 없이 좋구나. 이 정자에서 바람을 쏘이고 이 정자에서 달을 구경하니 한 푼의 돈도 들일 것이 없구나. 학의 모습처럼 더욱 깔끔하고 소나무 그림자처럼 건장하도다. 자하주(붉은 안개 빛 술) 마시면서 세월을 머무르게 하고, 신선을 초청하여 함께 어울리네. 속인들의 발자취 몇 번이나 올라와 왔으련만 늙은 임의 눈에 보였네.어린 시절부터 고기 잡고 놀았던 곳, 안개 속에 고결하게 보였네'
한풍루는 조선전기부터 오늘까지의 모습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자 임진왜란 당시의 소실은 물론, 중수와 정비 과정 전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 수탈의 아픔 속에서도 우리 군민들이 당당히 지켜낸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1592년 왜군의 방화로 소실됐다가 1599년 복원돼 1783년까지 보수, 중수과정을 거치고 1910년 이후에는 불교 포교당과 무주 보통학교 공작실로도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1936년에는 영동 양산면 가곡리 금강 변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1960년대에 비로소 한풍루복구추진위원회가 결성돼 1971년 무주군 무주읍 지남공원 내 현 위치로 이건했습니다.
이건 과정에서 원부재를 최대한 활용해 역사성과 건축성, 학술성이 뛰어난 누정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한풍루 편액은 조선시대 명필 한호(석봉_보존처리 후 다시 수장고에 보관 중)선생과 현대 송성용(강암)선생이 쓴 것이 있으며, 현재 한풍루에는 강암 선생(1913~1999)의 작품(190×73㎝)과 2002년 제작된 석봉 선생의 모사품이 걸려있습니다.
춘향전에 '자하주' 나옵니다
작가 미상의 한글 소설 '춘향전'에 등장하는 월매는 매사에 준비가 철저한 어미였습니다. 이도령이 백년가약을 맺으려고 춘향집을 찾자, 이런 날을 대비해서 그동안 준비했다며, 산해진미와 갖가지 술을 내놓는다.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의 한 대목을 보도록 해요.
대(大)양푼 가리찜, 소(小)양푼 제육찜, 풀풀 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매추리탕에 동래(東萊) 울산(蔚山) 대전복 대모 장도 드는 칼로 맹상군(孟嘗君)의 눈썹처럼 어슷비슷 오려 놓고, 염통산적, 양볶이와 춘치자명 생치 다리, 적벽 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률 숙률 잣송이며 호도 대추 석류 유자 준시 앵두 탕기 같은 청술레를 칫수 있게 괴었는데…(중략)…술 이름을 이를진대 이적선 포도주와 안기생 자하주와 산림처사(山林處士) 송엽주와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金露酒), 팔팔 뛰는 화주, 약주,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 골라내어(중략) 불한불열(不寒不熱) 데어 내어 금잔 옥잔(玉盞) 앵무배를 그 가운데 데웠으니(후략)
자하주(紫霞酒)는 보랏빛 노을을 닮은 술입니다.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의 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과하주(過夏酒)는 소주와 약주를 섞어서 빚은, 주로 여름에 많이 마시는 술입니다. 방문주(方文酒)는 약방의 처방에 따라 특별한 재료와 방법으로 빚은 술입니다.
천일주(天日酒) 얘기는 더 흥미롭습니다. 빚어 담근 지 1000일 만에 마시는 술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한 번 마시면 1000일 간 기분 좋게 취하는 술이란 전설이 마음에 더 와 닿습니다. 담근 뒤에 100일 동안 땅 속에 묻었다가 거른 백일주(百日酒), 금로주(金露酒), 화주(火酒: 소주)가 뒤따릅니다.
월매가 사위 이몽룡에게 주려고 심혈을 기울여 선택한 술은 연엽주(蓮葉酒: 연잎술)였습니다.
이는 늦여름이나 입추 전에 채취한 연잎을 술에 넣는 가향주(佳香酒)이자 계절주입니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면 연잎의 수분이 점점 줄어들면서 향이 좋아집니다. 연꽃은 동트기 전에 ‘벅’하는 소리를 내며 꽃망울을 터트립니다.
옛 선비들은 이 소리를 ‘개화성(開花聲)’이라 부르며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연엽주는 그런 풍류와 잘 어울리는 술입니다.
작가 미상의 한문소설 '운영전(雲英傳)'에도 자하주가 나옵니다.
조선왕조 세종의 제3자 안평대군의 수성궁은 세월이 흘러 폐허가 되었습니다. 유영이라는 한 선비가 춘흥을 못이겨 그곳을 찾아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문득 잠이 들어 밤을 맞습니다.한 곳에 이르니 어떤 청년이 아름다운 여인과 속삭이다가 유영이 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여인은 곧 시비를 불러 자하주(紫霞酒)와 성찬(盛饌)을 차려오게 합니다. 그 뒤 세 사람이 대좌하여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유영이 그들의 성명을 물으니 청년은 김진사, 여인은 안평대군의 궁녀 운영이라 합니다. 유영이 안평대군 생시의 일과 김진사의 슬퍼하는 곡절을 물으니 운영이 그들의 사연을 먼저 풀어 놓습니다.
김만중의 구운몽에도 자하주(紫霞酒)가 나옵니다
한림이 더욱 놀라 어린 선녀(仙女)를 따라 가니 층암절벽 위에 한 정자가 있으되, 온갖 화초가 만발한데 앵무 공작이며 두견새 소리가 낭자하니 진실로 선경(仙境)이었습니다.
한림이 마음이 황홀하여 들어가니 비단 장막에 공작 병풍을 둘렀는데 촛불을 밝게 켜고 서있다가 한림께 나와 예를 올린 후에 말하였습니다.
"양랑께서는 어찌 저물어 오십니까?"
한림이 대답하여 말하였습니다.
"소생은 인간 사람이라 신선과 혼약(婚約)할 연분이 없는데 어찌 더디다 하십니까?"
선녀가 말합니다.
"한림은 의심치 마십시오."
하고, 여동을 불러 말하였습니다.
"낭군께서 멀리 와 계시니 급히 차를 드려라."
하니, 여동이 즉시 백옥 쟁반에 신선의 과일을 배설하고 유리잔에 자하주(紫霞酒)를 부어 권하거늘, 그 술이 인간 술과 달랐다'
고려시대의 문학작품 속에도 멋있는 술 이름이 나타납다.
이규보의 시에는 이화주(梨花酒), 자주(煮酒), 화주(花酒), 초화주(椒花酒), 파파주(波把酒), 백주(白酒), 방문주(方文酒), 춘주(春酒), 천일주(千日酒), 천금주(千金酒), 녹파주(綠波酒), 동동주 등이 나옵니다.
이외에 우리 선조들의 상상력과 풍류를 엿볼 수 있는 전통 술 이름들이 꽤 많습니다. 술빛이 흰 노을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백하주(白霞酒), 푸른 파도와 같다는 녹파주(綠波酒), 푸르고 향기롭다는 벽향주(碧香酒), 차마 삼켜 마시기 아쉽다는 뜻의 석탄주(惜呑酒) 등입니다.
우리나라 술 종류를 가장 많이 기록한 책은 19세기 초에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입니다. 술 이름이 무려 170여 가지나 나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조선 말기까지 600여 종이 넘는 우리 술이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상상력을 훨씬 뛰어넘는 다양한 술이 존재했던 셈이다. 명망이 높은 집안에서 제사에 쓸 술을 직접 빚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009년 8월 정부는 ‘우리술 복원 프로젝트’를 가동했습니다. 임원경제지 등 옛 문헌에 기록된 전통주 제조방법을 과학적으로 복원해 50종을 생산한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전통술이 아직도 복원되지 않고 있습니다. 희석식 소주와 맥주와 위스키, 서양 포도주에 밀려 우리의 기후와 풍류를 닮은 술이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주군과 무주문화원은 한풍루를 국가 보물로 승격시키기 위해 학술적 · 역사적 · 예술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자하주 스토리를 입혀 문화관광자원화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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