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고산(南固山) 등성이 한가닥이 동쪽으로 뻗어내려 전주천에 쏟아진 낭떠러지를 좁은 목이라 한다. 좁은 목은 옛날 목조의 소년 시절, 호운석(虎隕石)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나 신작로를내는 바람에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오늘날엔 약수터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승암산(僧岩山) 기슭과 맞대 지르고 있는 곳이어서, 옛날에는 나뭇짐을 지고 오가는 사람이 간신히 비껴 갈 정도로 좁은 길목 이었다. 어느 산골짜기나 다름없이 언 듯 보기엔 별것도 아닌 것 같으나, 호남의 모든 애환이 스쳐간 길목 이기도 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남하한 마지막 길목이요,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서울로 압송된 마지막 길목이기도하다. 남도로 유배되는 사람들의 눈물을 쏟고 전주 부중을 빠져나간 길목이요.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이 밀어닥친 골목이기도하다. 또한 남원 춘향의 애환이 서린 낭만이 스쳐간 길목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상관(上關)의 요새인 만마동(萬馬洞)과 더불어 남고산의 진영을 등지고 있는 좁은 목은 군사요지로써 많은 사적이 남아 있는 지대라서, 남고산성 등을 뒤에 두고 좁은 목에 면해 있는 대승사는 필연적으로 전주를 방어해야 할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곳이어서 이러한 사정으로 대승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 이 주둔한 곳이었다. 당시 이치(梨峙)전쟁을 위시하여 여러전쟁에서는 무기가 빈약했던ㅍ 까닭에 백병전에 있어서는 손에 쉽게 잡힐수 있는 돌을 사용한 투석전이 많았었다. 육지뿐만 아니라 명량해전 같은 수상전에 있어서도 수마석으로 왜적의 머리통을 부쉈다. 일제 침략 시절인 1920년 무렵까지만ㅍ해도 전주에서는 의례 정월 대보름날에는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갈라져 전쟁이 벌어 졌다. 현재 대승사 경내에 있는, 15개의 돌무더기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들이 전투에 대비하여 쌓아 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이세우(남, 대승사 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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