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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양촌 권근, 익산으로 유배와 '입학도설'을 짓다



[인문학 스토리] 원래 '귀양'은 형벌이 아닌 '귀향'이었습니다.

양촌 권근, 익산으로 유배와 '입학도설'을 짓다

다산 정약용은 긴 유배생활을 통해 명저 『목민심서』를 비롯한 5백여권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다산은 잘 알려져 있듯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유배 기간 중 다산초당이라는 조그만 집에 기거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지요. 그 결과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저술이 바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입니다. 유배 중에 이처럼 위대한 저술을 완성하였기에 어떤 이들은 다산이 유배생활을 그렇게 오래 하지 않았으면 과연 그와 같은 저술을 남겼겠는가? 라고 의문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맞는 말입니다. 다산 선생은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이 같은 대작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추사 김정희는 13년간의 유배생활속에서 유명한 『세한도』를 그렸고 추사체를 완성했습니다.
국문학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 고산 윤선도 또한 17년간의 유배생활과 30여년의 귀향생활을 통해 『어부사시사』『산중신곡』등 주옥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교산 허균도 역시 유배지에서 『홍길동전』을 비롯한 여러 시문을 썼습니다.
유배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귀양살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원래 「귀양」은 형벌이 아닌 「귀향」이었습니다. 관직에 있던 사람이 벼슬을 마다하고 향리나 전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벼슬을 그만두는 이유는
신병인 경우도 있고 관운이 좋지 못해 벼슬을 잃는 삭직의 경우도 있지만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싫어 스스로 낙향하는 경우도 적지않았습니다.이같은 향리방축의 뜻으로 쓰이던 「귀향」이 어느새 「귀양」으로 바뀌면서 조선조후기에는 도배·유배·정배란 용어까지 생기고 점점 형벌의 뜻을 지니게 되었습다.물론 고향으로 유배보내는 향배란 말까지 있었습니다.
요즘들어 현대인들은 숲이나 섬을 찾아 자발적 ‘유배’에 나섭다. 속도 만능의 시대에 ‘쉼’과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문입니다.

권근(權近, 1352∼1409)은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 초명은 진(晋). 본관은 안동. 권희의 아들로, 1368(공민왕17) 문과에 급제해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습니다.
‘입학도설(入學圖說)’은 권근이 1390년 익산(현 팔봉면 임상리 일대)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초학자들을 위해 저술한 성리학의 입문서입니다.
그는 1375년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정책을 주장했습니다. 1389년 첨서밀직사사 때 부사로 명에 다녀왔습니다. 이때 가져온 명 예부(禮部)의 글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峰)에 유배됐다가 경주, 흥해, 김해 등지로 이배(移配)됐습니다. 1390년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다시 청주로 옮겨졌다가 홍수 때문에 풀려 나왔으나 곧 다시 익주 지금의 익산군 팔봉면 임상리로 유배됐습니다. 이곳에는 양촌대(陽村臺)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습니다.

아득아득 마한 땅을 더듬어 보니(渺渺馬韓地)
구구하다 저 한 바다 물가로세(區區鯨海濱)
세 나라가 분할하여 점령하더니(三方初割據)
통일로써 마침내 화친되었네(一統竟和親)
봉적이라 천년이 지나간 뒤에(鋒鏑千年後)
사방들엔 상마가 우거졌네(桑麻四野春)
더더구나 성명의 시대 만나니(況今逢聖代)
먼 곳도 동인을 입었답니다.(遠俗被同仁)

남태보가 편찬한 금마지(金馬志)는 '양촌대(陽村臺)는 고을에서 서쪽으로 15리 떨어진 몽곶리 뒤의 작은 구릉에 있습니다. 죽림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40리 넓은 들을 바라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익주(益州. 익산)로 귀향왔습니다. 그날 밤에 크게 우레와 번개가 치고 비가 왔으므로 다음날 벽 위에 기록하니, 때는 백로절(白露節) 뒤 9일입니다. 다음은 그의 ‘익주에 이르러’란 시입니다.

서원 당일에 물이 하늘에 닿았으니(西原當日水漫天)
과오를 용서하는 큰 은혜가 이미 패연하였네(肆眚洪恩已霈然)
이 밤 익주에 우레와 비가 급하니(此夜益州雷雨急)
누가 쫓겨난 몸 홀로 잠 못 드는 것을 불쌍히 여기랴(誰憐逐客獨無眠)

그는 이곳에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저술했고 조선 개국 후에는 계속 관직에 있었습니다.
‘입학도설’은 어려운 성리학 이론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이한 책으로 천인심성합일지도(天人心性合一之圖) 등 40종의 도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권근은 어떤 연유로 그리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입학도설』을 저술하게 되었을까요. 책머리에 실려 있는 자서(自序)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왜 책이름을 『입학도설』이라 붙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홍무 경오년(1390) 가을, 나는 금마군(익산)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 때 초학자 한 두 사람이 찾 아와 『대학』과 『중용』을 읽었는데, 정성스럽게 반복해서 설명해주었지만 여전히 능히 깨닫지 못했다. 이에 주자(周子, 주렴계)의 태극도(太極圖)를 근본으로 삼아 장구(章句)의 학설을 참조해서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었다. 다시 또 선현들의 격언(格言)을 취해서 그 뜻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의문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으면, 그에 대해서 되돌아보고 답해주었다. 이제 그 묻고 답한 내용을 기록해서 그림 뒤에 붙이고 이름하기를 입학도설이라 했다. 그밖에 다른 경전도 취해서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그렸다. 때대로 나의 억견(臆見)을 덧붙여놓기도 했다’

그가 익산에 유배되어 있을 때, 초학자 몇몇에게 『대학』과 『중용』을 가르쳐주었지 만 잘 이해하지 못해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장구(章句) 학설을 참조해 그림으로 쉽게 설명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제대로 이해했던 듯하다. 그런 문답이 계속됐고, 그 것을 모아서 기록했다는 것, 거기다 다른 경전도 그림으로 정리하게 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입학도설’은 당시 처음 학문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성리학 입문서입니다. ‘도설’(圖說)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듯이‘그림과 도표’(圖象)로 정리하고 있으며, 유배 당시 초고를 작성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유배된 1390년 7월부터 11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저술된 것입니다. 이어 유배에서 풀려나 충주 양촌(陽村)에서 지내면서 초고에 대한 수정 및 보완 작업을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호 ‘양촌’은 거기서 따온 것 이다.

‘입학도설’은 오늘날 전하는 도설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후세에 나오는 도설과 학문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며 조선시대 성리학을 한층 심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특히, 퇴계와 율곡의 『성학십도』와 『성학집요』 등은 이 입학도설을 근간으로 연구 발전한 것입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여 경학과 문학의 양면을 조화시켰습니다.

그는 ‘미륵사(彌勒寺)’에 들려 읊은 시로 또다른 정자의 흔적을 찾아 나섭니다.

창밖에 푸른 산 깎은 듯 솟아 있는데(窓外靑山似削成)
시름 올 때 눈 들면 더더욱 뚜렷하네(愁時擧目轉分明)
가을바람 불어와 나날이 옷깃을 스치니(秋風日日吹巾杖)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서울을 바라보고자 하네(欲上高岑望玉京)

그는 기록에 남기기를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조세(租稅)를 물로 운반하는 조전(漕轉)의 역사는 큰 일이니 국가의 경비와 공사의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다 이에 관계가 있다. 남쪽 지방에서 조전해서 들여오는 것은 오직 전라도만이 가장 멀어서 반드시 바다에 띄운 뒤에야 서울로 도달할 수 있는 처지인데 왜란이 일어난 뒤부터는 조세 받아들이는 장소를 바다 입구에서 아니하고 산협(山峽)의 모든 성에서 하게 되니 백성들이 조세 바친 것을 소와 말에 싣고, 험하고 어려운 것을 넘고, 눈 얼음에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3동이 다 지나서야 겨우 마친다. 그리고 봄이 되어 또 뱃길로수송하는데 길이 너무멀어서 몇 날이 지나서야 도달하므로 농사일을 하지못하고 여름이 되어서야 그친다. 도관찰사(都觀察使) 노숭(盧崇)공은 민생(民生)의 이익과 병통을 모두 연구하고 도모했는데, 이 조세의 운반에 대해서 더욱 관심을 가졌다. 이에 먼 계획을 세워 백성을 이롭게 하려고 바다를 따라 살펴보고 그 적당한 곳을 기억하였는데 전주의 경계에서는 진포(鎭浦)의 용안(龍安)을 얻었고 나주(羅州)의 경계에서는 목포의 영산(榮山)을 얻으니 모두 물가에 언덕이 있고, 높으면서도 넓었다. 공이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서 꾀하기를 이곳에 성을 쌓고 조세를 거두면 백성들이 실어 오는 일을 한 번에 다 마칠 것이요. 바다로 운반하는 데 이르러서도 성 밑에 배를 바로 대니 짊어다가 실을 수 있으며, 도적이 오더라도 이 성을 울타리로 삼고 굳게 지킨다면 또한 깊이 들어와서 도둑질 할 수 없을 것이니 그러니 어찌 쌓지 않을 것인가 했다’

용안 진포(鎭浦)인 이 덕성창은 나라에서 유일하게 좋은 조창지로서 거대한 규모의 창성(倉成)까지 쌓았던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