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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허균(許筠)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인문학 스토리]때론 나도 도사가 되고 싶습니다.

허균(許筠)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소설 속 남궁두(南宮斗)의 모습을 작가인 허균의 모습으로 투영해 보았을 때 작품의 인물 형상은 그의 주변 인물로 비춰지게 됩니다.

남궁두(1526∼1620)는 조선 중기 단학파(丹學派)의 한 사람. 전라도 함열 출신으로 대대로 임피에서 살았습니다.

허균은 거만하였고 기생과 많이 놀고 아버지 3년상을 안 지킬정도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를 만나면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작품에 대입을 시켜보면 기생을 만나던 것을 첩으로 볼 수 있고, 첩을 죽임으로서 그런 생활을 청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는 현실과 소설에서 같은 양상을 보여주는데 남편에게 헌신적인 성격이 그렇고, 전란 속에 죽은 아내와 딸이 포졸에게 굶어죽은 아내와 딸과 겹쳐지는 것이 그렇습니다. 현실의 허균의 아들 또한 죽습니다. 매창은 허균이 후에 만난 첩으로서 육체적 관계를 초월한 진실한 사랑을 합니다. 이는 후에 남궁두와 만나 결혼하는 상민의 딸로 연관 지을 수 있다. 상민의 딸과 두가 낳은 1남1녀는 작자인 허균이 현실에서 잃어버린 아들, 딸에 대한 욕망의 결과물로 볼 수 있습니다.

허균은 「홍길동전」과 함께 「남궁선생전」, 「장생전」, 「장산인전」 등 세 편의 신선전을 지었습니다.
특히 「남궁선생전」은 다른 작품보다 허균 자신의 선도사상과 관련된 지향의식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허균은 1608년 부안현 우반 정사암으로 들어가 쉬게 됩니다.

우반 정사암은 부안현(扶安縣) 해안에 변산(邊山)이 있고 변산 남쪽에 계곡이 있는데 우반(愚磻)이라 합니다. 그 고을 출신 부사(府使) 김공청(金公淸)이 그 빼어난 곳을 택하여 암자를 짓고 정사(靜思)라 이름 지어, 노년에 즐겨 휴식하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나는 일찍이 사명을 받들어 호남을 왕래하였는데, 그 경치에 대해 소문은 많이 들었으되, 미처 보진 못했었다. 나는 본시 영예와 이익을 좋아하지 않아, 매양 상자평(尙子平)의 뜻을 지녔으나, 그 소원을 아직도 이루지 못했었다. 금년에 공주에서 파직 당하자 남쪽 지방으로 돌아가서 장차 소위 우반이란 곳에 집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김공의 아들 진사(進士) 등(登)이란 이가,
“우리 선군(先君)의 폐려(弊廬)가 있으나 저는 지킬 수가 없으니, 공이 수리해서 사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고군 달부(高君達夫) 및 두 이씨(李氏)와 함께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보았다.
-『성소부부고 제6권』, 문부3 기 정사암 중수기'

이때 만난 남궁두에 대해 '남궁선생전'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남궁두 집은 대대로 임피에 살면서 재산도 넉넉해, 고을에서 내로라는 집안이었습니다. 또한 남궁두는 재능도 뛰어나 어려서 성균관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며, 서른 살에 사마시에도 합격했습니다. 이때부터 남궁두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하여, 감히 재주만 믿고 고을에서 호탕하게 제멋대로 지내는” 위인이 됩니다.
남궁두 나이가 서른셋이 되던 명종 13년(1558), 자신의 애첩이 외조카와 사통하는 현장을 발견하고 우발적으로 그들을 살해합니다. 그러자 평소 무례하고 거만한 남궁두에게 앙심을 품었던 현령과 아전들이 죄를 무겁게 꾸며 그를 검거했습니다. 남궁두는 아내의 도움으로 도망쳤으나, 이 일로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은 옥중에서 굶어죽고, 전답과 재산은 모조리 흩어지고 맙니다.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자신은 졸지에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합니다.
도망친 남궁두는 곧바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무주의 치상산에 들어가 선도를 전수한 스승을 만납니다. 남궁두 스승은 상주의 큰 성씨 후손으로 태사 권행의 증손자로 송나라 희령 2년(1069, 고려 문종23)에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흔히 ‘권진인’으로 불리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만력 무신년(1608, 선조41) 가을 허균이 공주에서 파직을 당하고 부안에서 살았습니다. 선생이 고부로부터 도보로 나의 여관방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의 오묘한 뜻을 나에게 전해 주시고, 또 그분이 선사 만났던 전말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위에서와 같이 말해주었습니다.
선생의 나이는 그해에 83세였으나 얼굴은 마치 46~47세 된 사람과 같았습니다. 시력이나 청력이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톡 쏘는 눈동자나 검은 머리털이 의젓하여 여윈 학과 같았습니다. 어떤 때는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으며 『참동계』나 『황정경』을 쉬지 않고 외곤했습니다.




고부에서 남궁두가 허균을 찾아와 네 가지 도교 경전을 전해주고, 자신이 스승을 만나 수련한 과정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남궁두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도피합니다. 남궁두는 전라도 무주에서 신선을 만나 그에게서 술법을 사사받아 도통하였으며, 허균이 나중에 1608년 남궁두를 우연히 만났는데 83세의 남궁두는 생김새가 마치 40대와 같았다고 합니다.

「남궁선생전」은 남궁두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기록한 이야기로 허균은 남궁두를 만나 신선 공부에 대한 경험담을 듣고 그 비결을 물어보고 있는 대목에서 그가 신선술에 관심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남궁두의 수련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데서 그가 단학 수련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궁두가 겪은 수련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먼저 정신을 모으기 위해 잡념을 제거하고 수마(睡魔, 졸리움)를 몰아내는 훈련을 한다.

2. 일주일 동안 잠자지 않고 견디는 훈련을 마친 후 『참동계』와 『황정경』 등 기본경전을 독송한다.

3. 곡식은 안 먹고 솔잎, 대추, 밤 따위만 날로 조금씩 먹는 벽곡(辟穀)법을 단련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식사 양을 줄이고 차차 죽 밥을 끓어가며 검은 콩 등을 물에 타 먹는다. 그 후 잣나무 잎 등을 복용하자 몸에 종기가 나서 백일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다.

4. 3년 후부터 조식법(調息法, 호흡조절)과 운기(運氣, 기의 운행)를 통해 기운을 돌리는 화후법(火候法, 불기운)을 단련한다.

5. 운기가 익숙해지자 혀에서 甘津이 흘러내리고 단전 충일하여 단전에서 황금빛이 발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남궁두는 빨리 선인이 되고자 하는 조급한 마음에서 불기운을 억제하지 못하자 갑자기 불기운이 온몸에 뻗쳐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와 그만 성선의 단계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새만금 아리울 스토리텔링 문화권에 있는 삼신산은 고대부터 신선사상의 뿌리가 깊은 공간입니다. 부안과 고군산은 허균, 남궁두, 권극중, 강증산의 선도사상과 최치원에 대한 신선담이 널리 퍼져있는 곳으로 선도문화 활동의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때문에 신선의 바다와 산이 있는 부안 변산, 정읍 두승산, 고창 방장산을 삼신산으로 봉래, 영주, 방장산으로 불렀다. 이는 아래 민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동방(我東方) 금수강산/ 두루돌아 구경할제// 춘변산(春邊山) 돌아드니/ 반도명산 일봉래(一逢萊)라// 동남에는 영주방장(瀛州方文)/ 삼각으로 벌려 있고// 서북에는 만라해도/ 십이모산 통하였다// 해상의 삼신산(三神山)을/ 오늘이야 알리로다

- 김민성, 『오오, 변산이여』, 고글, 1995, 38쪽.(1972년도에 채록한 작자 연대 미상의 부안지방 구전민요)'

이들 산은 선도에 대한 중요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남궁두와 권극중 같은 선도사상의 내단 수련가들이 새만금 아리울 스토리텔링 문화권 지역에 등장한 이후 선도 수련에 대한 관심은 널리 퍼집니다. 선도 수련으로 좌절과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면서 이곳 민중들은 미륵불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 보겠다는 꿈을 꾸기 시작하고 이는 ‘개벽’ 사상으로 이어집니다. 미륵신앙과 선도는 개벽사상의 기초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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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이름은 두(斗)이다. 대대로 임피(臨陂)에서 살아 집안도 오래되었고, 재산도 넉넉하여 고을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2대에는 과거에 뽑혀 관리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남궁두만은 박사(博士)의 제자로서 과거 공부를 하여 집안을 일으켰다. 30세에 처음으로 을묘년(乙卯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과거 시험장에 이름이 울리게 하였다.

일찍이 대신불약부(大信不約賦)라는 글을 지어 성균관(成均館) 시험에 수석으로 뽑혔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 글을 외워 암송하기도 했다.

남궁두는 거만하고 고집이 세며, 자신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 감히 재주만 믿고는 고을에서 호탕하게 제멋대로 지냈고, 거들먹거리면서 고을 수령에게도 예의 바르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읍내의 상하 간이 모두 남궁두를 흘겨보며 앙심을 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선생은 처음으로 서울로 이사하여 적극적으로 출세하고자 하려 하고, 첩(妾) 한 사람만 시골집에 남겨 두었다. 다만 해마다 가을이면 곧장 내려가 가을 수확을 처리하였다.

첩(妾)은 무인(武人)의 딸이었는데, 매우 예쁘고 영특하였고, 글과 계산법을 가르쳐 주면 뛰어나게 빨리 알아차렸다.

그래서 남궁두는 첩을 가장 사랑했으나, 주인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여러 달 동안 홀로 지냈으므로, 몰래 남궁두의 성(姓)이 다른 당질(堂姪)과 정을 통하고 있었다.

무오년(戊午年) 가을, 남궁두는 급한 일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일사(一舍)를 남기지 못하고 날이 저물었다. 하인들만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는, 혼자서 말 한 필을 타고 시골집으로 달려와 보니, 이미 등불이 밝혀 있는 밤이었다.

노복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으나 중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보이는 첩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섬돌에 서 있었다.

당질이 동쪽의 낮은 담을 넘느라 발이 땅에 반 자쯤 닿지 않고 있었는데, 첩이 급히 달려가 안아서 맞아들이고 있었다.

남궁두는 분노를 참으며 마지막까지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바깥문의 기둥에 매어 두고 몸을 숨겨 가린 채, 틈 사이로 그들을 엿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며 온갖 음란한 말을 주고받다가, 옷을 벗고 함께 잠자리에 들려 하였다.

남궁두는 당장 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어둠 속으로 갔다가 벽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화살통에 화살 두 개와 활 하나가 걸려 있었다.

마침내 화살을 당겨서 쏘아, 먼저 계집의 가슴을 꿰뚫어 즉시 넘어뜨렸다. 그러자 그 사내는 놀라서 일어나 북쪽 창문으로 뛰어넘으려 하자, 또 쏘아 늑골을 맞추어 죽게 하였다.

남궁두는 관아에 알리려 하였으나, 가문을 더럽히게 되고, 또 고을 수령의 마음을 얻기에도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두 시체를 끌고 가서, 논의 도랑 속에 파묻어 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서울로 돌아갔다.

다음날 날이 밝은 뒤에, 집안의 종들은 첩이 보이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녀와 당질이 함께 도망친 것으로 여기고 당질의 집에 가서 물어보았으나, 역시 간 곳을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농장에 어떤 종놈이 있었는데, 남궁두의 곡식 1백여 석을 훔친 적이 있어, 남궁두가 오면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항상 염려하고 있었다. 그자는 남궁두가 두 사람을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고는 그 자취를 찾아보았다. 논 도랑의 물 위에 기름이 떠 있는 걸 보고서 삽질하여 파보니, 두 시체가 엎어지고 뒤집혀 있었다.

곧바로 첩의 집에 알리자, 늙은 병졸이 수령에게 고발하고, 사내 집안에서도 오랜 원한이 있었다는 증거를 세웠다.

수령이나 여러 아전들은 본래부터 남궁두를 불쾌하게 여겼기에, 모두 기뻐하여 잘 걸려들었다고 하면서, 사사로운 미움으로 당질을 모살했다고 죄안(罪案)을 꾸몄다.

남궁두는 서울에서 잡혀 형틀에 묶이고, 오독(五毒)을 첨가한 죄인의 수레에 태워져 이산(尼山)에 이르렀다. 남궁두의 아내가 어린 딸을 업고 뒤늦게 도착해서는, 간수에게 취하도록 술을 먹이고, 밤에 형틀을 풀어 빠져나가게 하였다.

날이 밝아서야 간수가 그가 없음을 알아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그의 아내를 관아에 끌고 가 딸과 함께 옥중에서 굶겨 죽였다. 임피의 전답과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두 원수의 집안에 나누어 주었다.

남궁두는 곧바로 금대산(金臺山)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법명(法名)을 총지(摠持)라 하고 계율을 무척 엄하게 지키며 1년을 지냈다.

원수의 집안에서 있는 곳을 알아내어 병졸들을 거느리고 붙잡으러 오고 있었다. 그날 새벽에 꿈을 꾸는데, 산신이 일러주기를,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올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겠다.”

하였다. 잠에서 깨어나자 급히 산에서 내려왔고, 잡으러 오던 사람들은 도착했지만, 붙잡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남궁두는 두류산(頭流山)으로 향하다가 쌍계사(雙溪寺)에서 한 달 정도 기거하였지만, 이름 있는 절이라 중들이나 속인들이 모여드는 것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곧 그곳을 버리고 태백산(太白山)으로 향하다가 의령(宜寧)에 있는 야암(野庵)에 이르러 휴식을 취했다.

뒤따라 스님 한 사람이 도착하였는데, 예쁘게 생겼고 나이도 어렸다. 삿갓을 벗고 당(堂)으로 오르더니 자세히 얼굴을 살펴보며,

“그대는 본래 선비였군요. 왜 삭발하였습니까?”

묻고는, 조금 뒤에 다시,

“참을성이 있는 분이군요.”

하더니, 잠시 뒤에 다시,

“유도(儒道)를 업으로 하시면 큰 벼슬 하실 텐데.”

하였다. 얼마쯤 지나 웃으면서,

“두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하고 죄를 지어 도망 온 사람이군요.”

하는데, 네 마디가 모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밤이 되어 그의 침소로 찾아갔다. 머리를 두드리며, 모든 말이 사실이라고 하고, 이어서 무척 간곡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젊은 스님이,

“나는 겨우 관상(觀相)만을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모든 예(藝)을 아십니다. 어떤 사람을 관상하고는 어떤 예를 전해 주십니다. 더러는 부주(符呪)로, 더러는 상위(象緯)로, 더러는 감여(堪輿)로, 더러는 추점(推占)을 그 그릇에 따라 친절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관상 보는 법을 전수 받았으나 아직 지극한 경지에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감히 남의 스승이 되겠습니까.”

하였다.

남궁두가 지금 스승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자, 스님은,

“무주(茂朱)의 치상산(雉裳山)에 계시오. 그대가 그곳으로 가면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하자, 남궁두는 절하고 나왔다. 다음날 날이 밝아 안부를 살피러 가 보았더니 이미 떠나 버린 후였다.

곧바로 방향을 돌려 막대를 짚고, 치상산에 도착하여 온 산을 두루 살폈다. 절이 거의 수십 곳이었으나 모든 절에 특별한 중이라고는 없었다.

한 해 동안 온갖 고생을 하면서 머물며, 돌이 구르는 층계와 산의 정상과 새도 날아간 적이 없는 곳까지를 찾아다녔다. 서버 번 돌며 뒤졌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스님에게 속았다고 여기고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한 골짜기에 이르자 숲속으로 흐르는 시내가 있었는데, 물 위에 큰 복숭아씨가 흐르고 있었다.

남궁두는 마음속으로 기뻐서 중얼거리기를,

“이곳이 선사(仙師)가 계시는 곳이 아닐는지.”

하고는, 걸음을 재촉하여 물줄기를 따라 몇 리 정도를 걸어 들어가 우뚝 솟은 한 봉우리를 바라보았더니, 소나무와 삼나무가 해를 가리고 있는 곳에, 허름한 세 칸 집이 있었다. 벼랑에 기대어 지은 집인데, 돌로 쌓은 층계로 대(臺)를 만들었고 맑고 깨끗한 곳에 위치를 정하였다.

옷깃을 거머쥐고 길을 따라, 그 위로 오르니 동자(童子)가 맞이해 주며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

하기에, 남궁두는 읍(揖)하면서 말하기를,

“총지(摠持)가 선사를 찾아뵈러 왔습니다.”

했더니, 동자가 동편의 왼쪽 합문(閤門)을 열어주었다. 노승이 계셨는데, 모습은 마른 나무 같았다. 해진 가사(袈裟)를 입고 나오면서 이르기를,

“화상(和尙)의 풍채가 우람하여 보통 사람 같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

하였다.

남궁두는 꿇어앉으며,

“어리석고 우둔한 저는 아무런 기예(技藝)가 없습니다. 노사(老師)께서 많은 방술(方術)을 알고 계심을 듣고, 세상에서 한 가지의 방술이라도 행하고 싶어서 천 리 먼 길에 스승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1년을 지내고야 겨우 찾았으니, 제자가 되어 배우려 하오니 가르쳐 주소서.”

하였다.

장로(長老)가,

“산야(山野)에서 죽음이 임박해 있는 사람일 뿐인데 무슨 방술이 있겠소.”

하자, 남궁두는 계속 절하며 간절히 애걸했으나, 굳게 거절하며 문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남궁두는 처마 아래서 엎드린 채, 새벽이 되도록 슬프게 하소연하면서 아침이 되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장로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기며, 책상다리로 앉아 선정(禪定)에 들어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3일을 보냈다.

남궁두가 갈수록 더 정성을 올리자, 장로는 그때에야 그의 정성을 알아보고는 문을 열어주며 방으로 들어오도록 해주었다.

방이 한 길밖에 되지 않았고 목침(木枕) 하나가 놓여 있었다. 또 북쪽 벽을 뚫어 여섯 굽이의 감실(龕室)을 만들었는데, 자물쇠로 닫아 놓고 열쇠 하나를 감실 기둥에 걸어 놓았다. 남쪽 창문 위의 선반에는 책 대여섯 권이 있을 뿐이었다.

장로가 오래도록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그대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네. 투박한 성품이니 다른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없고, 오직 죽지 않는 방술은 가르쳐 줄 수 있네.”

했다. 남궁두가 일어나 절하며,

“그거면 족합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하였다.

장로가,

“대저 모든 방술이란 먼저 정신을 모은 후에 이룰 수 있는 것이라. 더구나 혼(魂)과 정신을 단련하여 신선으로 탈바꿈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게 있겠나. 정신을 모으는 일은 잠을 자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 그대는 먼저 잠을 자지 않도록 하게나.”

하였다.

남궁두가 그곳에 도착한 지 나흘이 되어도, 장로는 음식을 먹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하루에 한 차례 검은 콩가루 한 홉만 먹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배고프고 피로한 기색이 없어, 마음에 별다르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한 가르침을 받고는 온 정성을 다하여 큰 소원을 이뤄 달라고 빌었다.

첫날 밤에는 앉아서 사경(四更)을 지나자 눈이 저절로 감겼으나, 참아내고 새벽까지 보냈다. 둘째 날에도 정신이 흐리고 고달파 움직일 수도 없었으나 각고의 뜻으로 굳게 참아냈다.

셋째와 넷째 날의 밤에도 피로하고 고달파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더러는 머리를 벽에 찧고 부딪히며 겨우 참았다. 일곱째 밤을 지냈더니 탁 트이듯 정신이 밝게 깨쳐 상쾌함을 자각할 수 있었다.

장로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그대에게는 정말로 큰 인내력이 있으니 무슨 일인들 이룰 수 없겠나.”

하고는, 이어서 두 가지의 경전(經傳)을 꺼내 주며 이르기를,

“위백양(魏伯陽)의 라는 책이니 수련(修煉)하는 데 가장 좋은 비결이며, 선가(仙家)에서 가장 높은 교리를 밝힌 책이다. 의 내옥경경(內玉景經)은 기(氣)를 끌어내고 오장(五臟)을 단련하는데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역시 도가(道家)의 묘한 진리를 밝힌 것이다. 이 두 책을 만 번 정도 읽으면 저절로 깨달아 이해할 수 있으리니, 매일 열 번씩 읽도록 하게나.”

하였다.

또 이르기를,

“무릇 학문으로 높은 곳에 오르려 하는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릇된 번뇌를 끊어 버리고, 편안히 앉아서 기력과 정신을 단련해야 하네. 또 삼보(三寶)를 닫아야지 용호(龍虎)가 서로 싸우는 틈에서도 도술은 이루어지니, 그렇게 하는 것이 지름길이네.

스스로 높은 지혜나 뛰어난 성품을 갖추지 않는다면 빨리 이루어질 수는 없네. 그대의 성품은 순박하고 강인하니, 높은 교리로는 가르쳐주기는 어렵네. 맨 먼저 곡식으로 식사하는 걸 끊어보게.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낮은 곳에서 최상까지 도달하는 방법일세.

무릇 사람의 생명이란 오행(五行)에서 정기(精氣)를 받았기 때문에, 오장(五臟)은 각각 오행이 주관하는 거라네. 위장(胃臟)은 토(土)의 기운을 받아, 사람이 마시거나 먹는 것은 모두 위장으로 들어가네.

비록 곡식으로 몸이 건강하게 되고, 병을 없게 한다고 하더라도, 정기가 토(土)에 끌려, 끝내는 찌꺼기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는 법이네. 옛날에 곡식을 먹지 않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래서였네. 그대 역시 먼저 곡식 먹지 않는 것을 시험해 보게.”

하였다.

그리고는 곧 남궁두로 하여금 7일 동안 하루에 두 끼니만 먹도록 하였다. 또 7일 동안은 한 끼니는 밥, 한 끼니는 죽을 먹도록 하였다. 다시 7일 동안은 한 끼니의 죽을 없애고 밥만 한 끼니 먹도록 하였고, 다시 7일 동안은 밥 대신 죽만 한 끼니 먹도록 하였다.

28일이 지나자 밥과 죽을 모두 먹지 못하게 하고, 열쇠로 감실(龕室) 위의 자물쇠를 열어 칠(漆)을 한 그릇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검은 콩가루가 든 것이고, 하나는 황정(黃精)과 복숭아씨 가루가 들어 있었다.

각각 한 숟가락씩 물에 타서 하루에 두 차례 먹으라 하였다.

남궁두는 본래 먹는 양이 많아서 허기증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몸이 수척해지고 피곤해지며 눈이 흐려져 물건을 분별할 수 없었지만 계속 참아냈다. 검은 콩가루를 복용한 지 21일째 되던 날, 갑자기 배 안이 채워진 듯하여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 후에는 곧바로 측백나무 잎과 호마(胡麻)늘 먹도록 해 주자, 온몸에 촘촘히 부스럼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또 1백 일이 지나자 부스럼 딱지가 떨어지고 새살이 나와 완전히 이전처럼 되었다.

장로가 기뻐하며,

“그대는 참으로 훌륭한 성품과 체질을 타고났네. 다만 욕심만 없애면 되겠군.”

하였다. 3년 동안 머무르며 두 책을 모두 만 번씩 읽으니, 가슴속이 씻은 듯이 시원해져 신과 통함을 느끼는 듯하였다.

장로는 수식관(數息觀)을 가르쳐 주었고, 또 운기(運氣)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자, 기(氣)가 이미 움직이게 되었다.

마침내 자(子), 오(午), 묘(卯), 유(酉)로써 육자비결(六子祕訣)을 행하여 호흡의 도(道)를 이루자, 얼굴에 점점 살이 찌고 기운은 갈수록 상쾌해지며 온갖 상념이 모두 사라졌다.

6년을 지나자 장로는,

“그대에게는 도사의 골격이 있어, 법으로는 마땅히 신선이 되어 승천할 만하네. 지금 여기에서 내려간다 해도 왕자교(王子喬), 전갱(錢鏗) 정도는 될 것이네.

욕망이 비록 일어나더라도 오직 그걸 참아야 하네. 무릇 욕망이란 비록 식욕과 색욕이 아니더라도, 일체의 망상은 진리를 찾는 일에 해로우니, 반드시 모든 유(有)를 없애고 고요한 마음으로 단련해야 하네.”

하였다.

그런 후에 비어 있는 두 번째 집에다 남궁두를 앉게 했다. 오르고 내리며 구르고 넘어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가르쳐 주는 말마다 자상하고 친절하였다.

남궁두는 가르침에 따라 태연히 앉아 움직이지 않으며, 눈을 감고 내면으로 장로를 보았다.

그런 때에는 춥고 더움, 주림과 배부름을 견디어 낼 수 있었다.

하루는 윗잇몸에 있는 조그마한 오얏 같은 것에서 혀 위로 단물을 흐르게 하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장로에게 알렸다.

장로는 천천히 빨아 뱃속으로 삼키라 하고는 기뻐하며,

“이제 서주기(黍柱基)가 세워졌으니 화후(火候)를 움직일 수 있네.”

하면서, 곧바로 벽에 삼재경(三才鏡)을 걸고, 좌우에 칠성검(七星劍) 두 개를 꽂았다. 그리고 절름발이 걸음을 걸으며 주문을 외어, 마귀를 물리치고 도(道)를 이루게 해달라고 빌었다.

단련한 지 거의 6개월 만에 단전(丹田)이 가득 채워지고, 배꼽 아래서 금빛이 나오고 있었다. 남궁두는 도(道)가 이루어짐을 기뻐하다가, 급히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솟아남을 억제할 수 없었다. 타녀(姹女)에 불이 붙어 이환(泥丸)이 타오르자 고함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장로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치면서,

“슬프다, 크게 이루어지지 못하는구나.”

하고는, 급히 남궁두를 편안히 앉게 하여 기(氣)를 내리게 하였다.

기는 비록 수그러졌으나 마음이 두근거려 온종일 안정되지 않았다.

장로가 탄식하기를,

“세상에서 드문 사람을 만났기에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업(業)의 가로막음을 제거하지 못하여 끝내 엎질러지고 말았다. 이는 그대의 운명(運命)이라. 내 힘으로 어찌하리오.”

하고는, 이어 소다(蘇茶)를 마시게 하니, 7일 만에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에서 뜨거움이 오르지 않았다.

장로가 이르기를,

“그대는 비록 신태(神胎)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역시 지상(地上)의 신선(神仙)은 될 수 있을 것이네. 조금만 더 수양한다면 8백 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거네. 그대의 운명(運命)에는 당연히 아들을 두게 되어 있으나, 정기(精氣)가 나오는 길이 이미 막혔으니, 약을 먹어 트이게 하게나.”

하면서, 붉은 오동 열매와 같은 환약(丸藥) 두 알을 꺼내 주며 그걸 삼키게 하였다.

남궁두가 청(請)하기를,

“우둔한 사람이 가르침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나 자신의 운명이 기구하였기 때문이니, 무엇을 한스러워하겠습니까. 그러나 제자가 스승님을 모신 지가 이제 7년입니다만, 아직도 스승님이 오신 곳도 모르고 있습니다. 제발 자세하게 가르쳐 주셔서, 다른 날에라도 사모하는 정성이 위안받을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이 어떠할는지요?”

했다.

장로(長老)가 웃으면서,

“다른 사람이 묻는다면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대는 능히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므로 자세히 말해 주겠네.

나는 상락(上洛)의 큰 성씨(姓氏)의 후손으로,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증손자였네. 송(宋)나라 희령(熙寧) 2년에 태어났지. 열네 살에 풍라(風癩)에 걸려 부모가 거두어 주지를 않고 숲속에 버렸네. 밤에 호랑이가 안아다가 돌굴에 놓아 주고는, 눈에 불을 켜고 두 마리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그 곁에 있는 나를 끝내 해치려 하지 않더군. 아픔이 한창 극도에 달하여, 차라리 호랑이의 어금니에 물려 속히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더군.

초라(草羅)라는 풀이 벼랑의 구멍에서 자라고 있었는데, 잎이 넓고 뿌리가 크더군. 시험 삼아 씻어서 먹었더니 배 속이 조금 채워졌네. 몇 개월 동안 그걸 먹자, 부스럼이 줄어지고 점점 혼자서 일어설 수 있었네. 그리하여 많이 캐다가 끼니마다 그걸 먹었었네. 산 중턱의 것을 거의 전부를 캐 먹으며, 몇백 일을 지내자 부스럼이 다 벗겨지고, 온몸에 푸른 털이 돋아나기에, 기뻐하며 실컷 먹었지. 또 1백 일이 지나자 몸이 저절로 움직여져 산의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더군.

이미 나병은 나았으나 옛날의 마을을 분별하지 못하여, 길에 나와서도 갈 곳을 몰라 서성거리고 있었네.

뜻밖에 스님 한 사람이 산봉우리 아래로 지나가고 있어, 그곳으로 찾아가 길을 막으며 물었지,

‘이곳은 어떤 산입니까?’

그랬더니 스님이 답하기를,

‘이건 태백산(太白山)이요, 지역은 진주부(眞珠府)에 속합니다.’

하더군. 그래서 근방에 절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서쪽 봉우리에 절이 있으나 길이 끊어져 쉽게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하더군.

나는 곧 날아서 그 암자에 이르렀네. 선방(禪房)은 낮인데도 문이 닫히고, 사람이라곤 없더군. 손으로 곁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운데에 있는 집으로 가 보았지. 늙고 병든 스님 한 사람이 굵은 베옷을 두르고 탁자에 기대어 숨 가빠 하고 있더군.

거의 죽어가는 모습이었는데, 눈을 뜨고 나를 보면서 말했지.

‘간밤의 꿈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우리 스승님 비결서(祕訣書)를 전할 사람이 지금 오고 있다고 하더니, 그대의 얼굴을 보니 진정 그 사람이군.’

하면서, 일어나 보자기를 풀어 한 뭉치의 책을 꺼내 주며,

‘이것을 만 번 읽으면 그 의미를 저절로 알 것이니, 노력하고 게으름 피우지 말게나.’ 하였네.

내가 그건 누가 전해 준 것이냐고 물었더니,

‘신라(新羅)의 의상대사(義湘大師)께서 중국에 들어가 정양진인(正陽眞人)을 만나 이 책을 받으셨고, 임종하시면서 나에게 부탁하시며, 2백 년 뒤에는 반드시 전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대가 대사의 유언에 맞는 사람이니 받아 힘쓰게나. 나는 전해 줄 사람을 만났으니 이제는 죽으려네.’

하면서 부좌(趺坐)하고 조용히 돌아가셨네. 나는 곧바로 그분을 다비(茶毗)하였고, 짙은 남색 사리(舍利) 1백 알맹이를 얻어 내어, 탑(塔) 속에 매장하였네.

책 뭉치를 풀고 살펴보니 ,,,,,,, 등의 경전(經傳)이었네.

그 암자에 들어가 홀로 지내면서 수련하는데, 마귀들이 모든 곳에서 와서 둘러쌌지. 하지만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으니 사라져 갔네. 그렇게 온갖 애를 쓰며 11년 만에야 신태(神胎)를 이룰 수 있었네. 법으로는 당연히 해탈해서 떠났겠지.

하지만 옥황상제께서는 이곳에 계속 머물러서 동국(東國) 삼도(三道)의 모든 신(神)을 거느리라고 명령하셨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 지 5백여 년이었네. 기한이 차면 당연히 하늘로 오를 걸세.

나는 그동안 수십 명을 만나 보았지. 더러는 기(氣)가 지나치게 예민하고, 더러는 너무 둔하기도 하고, 더러는 참을성이 적었고, 더러는 인연이 옅었으며, 더러는 욕망이 많아 모두 성공할 수가 없었네.

만약 도(道)를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면 마땅히 내 임무를 맡기고 옥경(玉京)으로 오를 것이네. 하지만 수백 년을 헛되이 보내고도 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이건 나의 티끌 세상과의 인연이 다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게야.”

하였다.

남궁두는 장로와 함께 오랫동안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곤 했지만, 그가 숨기는 것이 있어 늘 이상하게 여겼다. 배꼽 아래 한 치 정도의 부분을 가리고 남이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점이었다.

그 까닭을 물으며 그걸 보고 싶다고 했더니, 장로는 웃으면서,

“그걸 왜 쉽게 보여 주랴. 보여 주면 그대는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인데.”

하였다.

남궁두가,

“왜 놀라겠습니까, 한 번 보기를 원합니다.”

하자, 장로가 싸맨 것을 풀어놓으니, 반짝이는 금빛 백여 줄기가 천장까지 솟구쳤다. 바로 볼 수도 없어 의자 밑으로 숨으니, 장로는 다시 그걸 싸매서 이전처럼 하였다.

남궁두가 또,

“스승님은 이미 모든 신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였는데, 왜 한 사람도 찾아와 받드는 사람이 없습니까?”

하니, 장로는,

“나는 정신을 날려서 그들의 조화를 받곤 했었네.”

하였다. 또 여러 귀신 구경하기를 청했더니,

“내년 정월 보름날을 기다려야 하네.”

하였다.

그날이 되자 장로는 감실 속에서 옷 상자를 꺼냈다. 여덟 가지 채색의 방산건(方山巾)을 쓰고, 일곱 개의 별과 해와 달을 수놓은 도포(道袍)를 입고, 둥근 청옥(靑玉)에 사자를 그린 띠를 두르고, 다섯 가지 꽃으로 무늬가 된 신을 신고, 손에는 여덟 모가 진 옥(玉)으로 만든 여의주(如意珠)를 붙잡고, 섬돌 위에 부좌하였다.

남궁두는 서쪽으로 향해서 모셨고, 동자는 모퉁이에 서 있었다.

갑자기 대(臺) 위의 두 잣나무에 각각 울긋불긋한 꽃등불이 걸리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지나자, 산골 가득한 수천수만의 나무에 모두 꽃등불이 걸려 붉은 불꽃이 온 공간을 가득 채워 대낮 같았다.

그러자 기이하고 괴상한 모습의 짐승들이 나타나는데, 더러는 곰이나 호랑이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자나 코끼리 같았다. 어떤 것은 표범인데 다리가 둘이었고, 어떤 것은 규룡(虯龍)의 모습이었는데, 날개가 있었고, 어떤 것은 용이면서 뿔이 없었다. 어떤 것은 용의 몸에 말의 머리가 달렸고, 어떤 것은 뿔이 세 개인데 사람처럼 서서 빨리 달렸으며, 어떤 것은 사람 얼굴처럼 생겼는데 눈동자가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이런 것들이 수백 마리나 되었다.

또 코끼리, 노루, 사슴, 돼지의 모습인데, 금빛 눈에 하얀 이빨, 붉은 털 하얀 발굽에 뛰고 할퀴고 하는 것들이 1천여 마리 정도나 되었다. 이들은 모두 열을 지어 장로를 좌우에 모시고 서 있었다.

또 금동(金童)과 옥녀(玉女)가 깃발을 들고 수백 명이 서 있었다. 깃발과 창검을 든 군대도 1천여 명으로 삥 둘러 서 있었다.

대(臺) 위에는 온갖 향기가 가득하고, 황패(璜佩) 부딪치는 소리가 쟁쟁거렸다. 바로 이어서 푸른 장삼(長衫)을 입고, 상아 홀(笏)을 들고, 수창(水蒼)을 차고, 고깔을 쓴 두 사람이 섬돌 아래서 국궁(鞠躬)하고는 소리 높여 아뢰기를,

“동방(東方)의 극호림(極好林), 광하(廣霞), 홍영산(紅暎山) 등 삼대신군(三大神君)이 뵙습니다.”

하였다. 이들 삼대신(三大神)은 모두 빨간 금관을 쓰고, 붉은 도포에 옥띠를 띠고, 홀을 단정히 잡고, 구름이 그려진 신을 신고, 칼과 노리개를 찼으며, 키가 헌칠했다. 얼굴은 희고 맑고 길었으며 눈썹과 눈이 밝고 수려하였다.

장로가 일어서서 공수(拱手)하니 삼대신은 함께 두 번 읍하고는 물러갔다.

또 아뢰기를,

“봉호(蓬壺), 방장(方丈), 도교(圖嶠), 조주(祖洲), 영해(瀛海) 등 오주(五洲)의 진관(眞官)이 뵙습니다.”

하였다. 다섯 신(神)은 각각 지방색을 보이는 도포를 입었고, 관(冠)이나 노리개는 삼대신과 같았는데, 모두 헌걸차고 수려했다.

장로가 일어서니 다섯 신이 모두 두 번 절하고 물러갔다.

또 아뢰기를,

“동해, 남해, 서해의 장리(長離), 광야(廣野), 옥초(沃焦), 현롱(玄隴), 지폐(地肺), 총진(摠眞), 여궤(女几), 동화(東華), 선원(仙源), 임소(琳宵) 등 십도(十島)의 여선관(女仙官)들이 뵙습니다.”

하자, 선녀 10인이 모두 꽃으로 수놓은 금말건(金襪巾)을 쓰고, 붉은 구슬로 된 보요(步搖)를 꽂았는데, 구슬과 비취옥이 영롱하게 얼굴에 반사하여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금봉(金鳳)의 무늬를 놓은 흰 저고리에 파란 비단으로 만든 긴 치마를 무릎 아래까지 드리웠다. 태을영부(太乙靈符)를 차서 번쩍번쩍 번갯불이 났고, 푸르고 붉은 모가 난 낮은 신을 신었다.

훤칠하고 허리가 길었는데, 남자들이 하던 절을 올리니, 장로는 일어나지 않고 앉아서 절을 받자 여관(女官)들이 물러갔다.

또 아뢰기를,

“천인(天印), 자개(紫蓋), 금마(金馬), 단릉(丹陵), 천량(天梁), 남루(南壘), 목주(穆洲) 등 칠도(七道)의 사명신장(司命神將)이 뵙습니다.”

하니, 붉은 말액(抹額)에 깃을 꽂고, 무인(武人)들이 입는 고의(袴衣)와 꽃으로 수놓은 앞가림 옷을 입고, 팔에는 활집과 화살통을 비스듬히 걸었고, 손에는 붉은 창을 붙잡고 있었다. 모두 사자의 형태에 범의 모습으로 붉은 머리털을 세우고 금빛 눈동자에 용의 수염이 달렸었다.

읍만 하고 절은 하지 않고 물러갔다.

또 아뢰기를,

“단산(丹山), 현림(玄林), 창구(蒼丘), 소천(素泉), 자야(赭野) 등 다섯 신의 거느림을 받는 산림(山林), 수택(藪澤), 영독(嶺瀆), 성황(城隍) 등의 모든 귀백(鬼伯), 귀모(鬼母)는 함께 뵙습니다.”

하였다. 5대 신장(神將)들의 모습은 앞의 7도 신장들의 모습과 같았고, 각각 한 무리가 백여 명이나 되는 영관(靈官)을 거느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키가 작고 누추했으며, 어떤 이는 키가 컸으며, 어떤 이는 말쑥했고, 어떤 이는 여섯 개의 팔과 네 개의 눈이 있었다. 여자 중에는 더러 늙고 추했고, 더러는 곱고 젊었는데, 모두 지방색을 맞는 옷을 입었다.

열을 지어 서서 네 번 절하고, 물러 나와 다섯 대열이 되었다.

장로가 동자에게 명하여, 붉은 깃발을 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간 뒤에 남쪽으로 돌아 서쪽에 이르러, 가운데 대열 앞에 서게 하니,

“여러 신령들이 모두 모였으나 오직 위주(魏州)의 조부인(趙夫人)만 오지 않았습니다.”

고 아뢰었다. 소천신(素泉神)이 나와서 꿇어앉으며,

“부인은 귀양살이 가서 이제는 사람으로 강등되었고, 그를 대신할 사람이 오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장로는 광하(廣霞) 등 세 진인(眞人)을 불러서 앞에 세워 놓고 이르기를,

“경들은 세 방면을 나누어 다스리면서, 상제님의 어진 덕을 실천하였기에, 백성들이 경들의 은택(恩澤)을 입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요즈음 액운이 다가오고 있어 만백성이 재앙에 맞고 있는데, 이들을 구출할 방책을 마련하였는가?”

하고 물었다.

세 사람은 모두 탄식을 거듭하며,

“정말로 타이르신 바와 같습니다. 어제 봉래산(蓬萊山)의 치수대감(治水大監)이 자하원군(紫霞元君)이 있으신 곳에서 와서 홍영산(紅映山)에 들러 말하기를,

‘여러 진인들이 구광전(九光殿) 위에 있으면서 상제님을 모시는데, 삼도(三島)의 제군(帝君)들이 말하기를, 「염부제(閻浮提)에 살고 있는 삼한(三韓)의 백성들이 지나치게 교사스럽고 간사하여 속임수를 잘 쓰고, 복(福)을 아끼지 않으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효(不孝), 불충(不忠)하고, 귀신을 모독하였다. 그래서 구림동(句林洞)에 사는 이면(狸面)의 대마(大魔)를 빌려다가, 적토(赤土)의 군대를 모두 모아 가서 소탕하려 한다. 그렇게 전쟁을 7년간 하게 되면, 다행히 나라는 망하지 않을지라도, 삼한의 백성들은 열에 대여섯이 살육될 것이니, 이로써 경계하려 한다.」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희 신하들도 역시 모두 두려워서 마음이 떨리더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큰 운수의 소관인데 어찌 감히 힘으로 해결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로도 역시 탄식하기를 그만두지 못했다.

잠깐 사이에 가운데 대열에서 대포를 쏘는 큰 소리가 나자, 네 대열이 모두 호응하여 북과 쇠를 울려서 도왔다. 그러자 나무 위의 등불이 하나하나 땅에 떨어졌고, 아득히 깊은 골짜기에 많은 구름이 내리깔렸다.

장로는 방으로 들어와 관(冠)과 옷을 벗고 등불을 밝히고 방 가운데 앉았다. 남궁두는 깜짝 놀라서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

다음날 남궁두를 불러들여 이르기를,

“그대는 이미 인연이 엷어서 여기에 오래 남아 있기에는 합당치 못하니, 하산(下山)하여 머리를 기르고 황정(黃精)을 먹으며 북두칠성에 절하도록 하게나.

음탕한 사람이나 도둑도 죽이지 말고, 매운 채소, 소, 개고기 등을 먹지 말며, 다른 이들을 해치지 않는다면, 이는 곧 땅 위의 신선이네. 행하고 수양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면 또한 신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네.

과 는 도가(道家)의 높은 교리이니, 외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게. 은 노자(老子)의 도(道)를 전하는 글이고, 은 바로 뇌부(雷府)의 여러 신들을 존경하고 숭배하는 글이니, 항상 지니고 다니면 귀신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할 것이네.

이밖에 마음을 닦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은,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가장 높이 두는 것이네. 평범한 사람들이 선과 악을 한 번만 생각하여도, 귀신들은 좌우에 벌려 있어 모두를 먼저 알아내는 법이네.

상제님께서 강림(降臨)하심이 무척 가까우니, 하나의 일을 하면 곧바로 그걸 두 궁(斗宮)에 적어 두게. 억제하고 응답해 주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를 것이네.

이치에 어두운 사람들은 이를 업신여기고, 꽉 막힌 하늘이니 두려울 게 없다고 하지.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창창한 하늘 위에서 참다운 주재자(主宰者)가 자루를 조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는가.

그대는 참아내는 마음이 강하긴 하지만, 아직 욕망이 제거되지 않았네. 혹시라도 삼가지 않아 한 차례라도 그릇된 곳에 떨어지게 된다면, 끝없이 오랜 괴로움을 당할 걸세. 어찌 삼감이 없어서야 하겠나.”

하였다.

남궁두는 가르침에 따라 눈물을 흘리며 하직하여 하산(下山)하였다. 돌아보니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는 온데간데없어져 버렸다.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임피에 이르고 보니, 옛날의 집이라고는 터도 남지 않았고 전장(田莊)은 모두 두세 차례씩 주인이 바뀌었다. 또 서울로 가 보아도 옛날의 집은 터만 남아 주춧돌만이 묵은 풀 속에 종횡으로 놓여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돌아오고 말았다.
늘 생각하던 착실한 늙은 종이 있었는데, 그 종은 해남(海南)에 살며 충분한 밭과 집이 있다기에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처음에는 알아보지도 못하더니 얼마 후에 자기 주인임을 알아차리고는 서로 붙잡고 통곡하였다.

종은 자기가 살던 곳을 비워 주며 남궁두가 거처하도록 하였다. 남궁두는 상민(常民)의 딸을 아내로 맞아서 아들딸 하나씩을 낳았다.

선생은 비록 다시 가업을 세웠으나, 스승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끝까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해남에서 떠나 용담(龍潭) 근처에서 은거하며, 깊은 산골짜기를 골라서 살았으니, 치상산(雉裳山)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다시 선사(仙師) 만나기를 바라던 계획이었으리라.

수십 년 동안 황정(黃精)과 솔잎을 채취하여 식사로 했는데, 몸이 날이 갈수록 더욱 건강해져 수염도 희지 않고, 걸음걸이도 나는 듯하였다.

만력(萬曆) 무신년(戊申年) 가을, 허균(許筠)이 공주(公州)에서 파직을 당하고 부안(扶安)에서 살았다. 선생이 고부(古阜)로부터 도보로 나의 여관방을 찾아 주셨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전의 오묘한 뜻을 나에게 전해 주시고, 또 그분이 선사를 만났던 전말을 상세하게 위와 같이 말해 주었다.

선생의 나이는 그해에 83세였으나, 얼굴은 마치 46~47세 된 사람과 같았다. 시력이나 청력이 조금도 쇠약하지 않았고, 난새와 같은 눈동자나 검은 머리털이 의젓하여 여윈 학과 같았다. 어떤 때는 며칠을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으며 나 을 쉬지 않고 외곤 하였다.

문득 이르기를,

“몰래 해로운 일을 하지 말며, 귀신이 없다고 말하지 말게. 착한 일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욕심을 끊고 마음을 단련한다면 상선(上仙)의 극치를 세울 수 있으며, 난새와 학이 며칠 사이에 내려와 맞아줄 것이네.”

하였다.

나는 선생의 음식, 거처가 보통 사람과 같음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겼다.

선생이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는 하늘에 오르리라 여겼는데, 빨리 이루고 싶어하다가 오히려 이루지를 못하고 말았네. 우리 스승님께서 이미 지상의 신선은 되었으니, 부지런히 수련하면 8백 세의 나이는 기약할 수 있다고 허락하셨네.

요즘 산중(山中)이 너무 한가하고 적막하여 속세로 내려왔으나, 아는 사람은 한 사람 없네. 또 가는 곳마다 젊은이들이 나의 늙고 누추함을 멸시하여, 인간의 재미라고는 전혀 없네.

사람이 오래도록 보고 싶어하는 것이란 본래 즐거운 일인데, 쓸쓸하고 즐거움이 없으니 내가 왜 오래 살려고 하겠는가?

이 때문에 속세의 음식을 금하지 않고, 아들을 안고 손자를 재롱부리게 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하늘의 운명에 나를 맡겼다가 깨끗이 돌아가, 하늘이 주신 바에 순종하려네. 그대는 신선의 재주와 도가(道家)의 풍채가 있으니, 힘써 행하고 쉬지 않는다면, 진선(眞仙)이 되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네.

우리 스승께서 일찍이 나에게 인내력이 있다고 하셨는데, 나는 참아내지를 못하여 이 지경이 되었네. 인(忍)이라는 글자 하나는 선가(仙家)의 오묘한 비결이니 그대 또한 삼가 지니고 놓치지 말게나.”

하였다. 얼마 동안 머무시다가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떠나갔으니, 사람들은 그가 용담(龍潭)으로 다시 갔다고들 하였다.

허균(許筠)은 논한다.

전해오는 말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는 숭상했어도 도교는 숭상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있다. 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몇천 년이 지났으나, 득도(得道)하여 신선이 되어 간 사람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전해오는 말들이 과연 증거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보았던 남궁 선생(南宮先生)으로 말한다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선생이 스승으로 여겼던 분은 과연 어떤 사람이고, 상(相) 보는 사람에게 알아냈다는 것도 결코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은 못 된다. 말했던 것들도 역시 모두 그렇지만은 않으리라. 요컨대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실체 없는 소리이리라.

다만 선생의 나이와 용모로 본다면 참으로 득도(得道)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 것인지. 어찌하여 80의 나이에도 그처럼 건강했으랴. 이건 또 도교 숭상하는 일이 실제로 없었다고 결정을 내릴 수도 없으리라.

아아, 그것이야말로 기이하도다.

우리나라가 궁벽한 바다 밖 멀리에 있어 뛰어난 은사(隱士)로 선문자(羨門子)나 안기생(安期生)과 같은 분들은 드물었다. 그렇지만 암석(巖石)의 사이에 그러한 이인(異人)이 있어, 여러 천백 년 만에 남궁 선생으로 하여금 만날 수 있게 하였다.

그 누가 ‘좁은 지역이니 그러한 인물이 없다.’라고 말하랴.

도(道)에 통달하면 신선이고, 도에 몽매하면 범인이다. 전해진다는 말이 이식(耳食)과 무엇이 다르리오. 선생으로 하여금 빨리 이루려던 욕망이 없게 하여, 끝내 단련하던 효과를 거둘 수 있게만 했다면, 저들 선문자, 안기생과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맞서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었으랴.

다만 그분이 찾아내지 못하여 다 이루어진 공(功)을 실패하고 말았구나.

오호, 애석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