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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허균(許筠)의 '사우재기(四友齋記)'

[인문학 스토리 ]우정이란 아직도 우리에게 소중한 것일까요.

허균(許筠)의 '사우재기(四友齋記)'

‘풍속은 화순(和順)이요, 인심은 함열(咸悅)이라’ 호남가에 나오는 ‘인심은 함열(咸悅)이다’라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다 함께 기쁘다’는 함열이란 명칭에 어떤 의미와 역사가 있는 건 당연하다고 여겨서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許筠)은 이곳 함라에서 조선시대 음식 품평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썼습니다.

29세에 장원급제해 황해도 도지사가 되지만 한양 기생을 가까이 했다는 이유로 파직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곳으로 유배를 왔습니다. 그 때가 광해군 3년(1611년 1월)이었고 그의 나이 43세였습이다. 그는 1613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시(詩)·사(辭)·부(賦)·문(文) 등 자신의 옛 글을 정리해 ‘성소부부고’ 64권을 저술했습니다.

요즘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으므로, 그는 옛사람 가운데서 친구를 찾았습니다. 그가 세든 집에 이정(李楨:1578~1607)이 그려준 도연명, 이태백, 소동파 세 친구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자기까지 포함, 네 친구가 함께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우재(四友齋)라는 편액을 걸었습니다.

‘아아! 나는 참으로 문장이 서툴러 이 세 군자가 여력으로 하는 문장에도 미치지 못한다. 성품이 또한 예절을 꺼리지 않고 망령되어, 그들의 사람됨을 감히 바라볼 수도 없다. 도령(陶令, 도연명)은 평택에서 80여 일(현령으로)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나는 세 차례나 2천 석 녹봉을 받게 되었지만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번번이 쫓겨났다. 적선(謫仙, 이백)이 심양이나 야랑으로 쫓겨다닌 것이나 파공(坡公, 소동파)이 대옥(臺獄) 황강으로 쫓겨다닌 것은 모두 어진 이의 불행이다. 나는 죄를 지어 형틀에 묶이고 볼기 맞는 고문을 받은 뒤 남쪽으로 유배되어 왔으니, 모두 조물주의 장난이다. 괴로움을 (그들과) 같이 겪었건만,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성은 어찌 나에게 옮겨질 수 없었던가’

의금부에 갇혔던 허균은 1611년 1월 15일 전라도 함열로 유배됩니다. 지금 전북 익산입니다. 어느덧 마흔세 살의 중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파직과 탄핵을 당했으나 유배는 처음입니다.

허균은 살면서 외로움을 탔습니다. 그가 귀향쓴 ‘사우재기’(四友齋記)란 글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다(‘성소부부고’, 제6권). 허균은 자신의 거처를 사우재라고 했는데, 그 자신과 세 명의 벗이 함께하는 공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된 중국의 명사들이었습다. 진나라 시절의 도사 도원량, 당나라 시인 이태백 그리고 송나라의 문장가 소자첨(소식, ,소동파)이었습니다.

“나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나를 꾸짖고 무리를 지어 배척하니, 집에 찾아오는 벗이 없고 밖에 나가도 뜻에 맞는 곳이 없다.”

허균이 벗으로 선택한 고인들은 비범했다. 한가하고 고요한 자연을 사랑하며 우주를 집으로 삼아 인간 세상을 가볍게 여긴 현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두가 탁월한 문장가였습니다.

허균은 당대의 이름난 화가 이정에게 부탁해 세 벗의 초상을 그리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림마다 직접 추모의 글을 지어, 명필 한석봉에게 글씨를 부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입니다. 물론 허균의 생전에는 달랐습니다. 그는 여행 중에도 그림을 휴대해 머무는 곳 어디서든 방 한쪽에 걸어두었습니다. 그가 머무는 곳은 항상 네 사람의 선비가 웃으며 담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허균은 이 그림만 있으면 “내 처지가 외롭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로서는 세속의 친구는 사귈 필요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허균에게는 정말 친구가 없었을까요. 세 군자의 초상을 그려준 화가 이정이야말로 그가 아끼는 벗이 아니었던가. 화가가 별세했을 때 그는 몹시도 슬퍼했습이다. 애사(哀辭)를 지어 이정의 풍모를 이렇게 묘사하지 않았던가.
“그는 술을 즐겼고 마음이 활달하였다. 글씨도 잘 쓰고 시도 잘 알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속기(俗氣)가 없고 비범하였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생활이 곤궁하여 남에게 의지했으나, 의(義)가 아니면 한 번도 취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아무리 권력이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도 더럽게 여겨 사이를 끊었다.” 허균은 나이고 벼슬이고 그 무엇도 따지지 않고 이정을 깊이 사랑했노라고 고백했다. 알고 보면 그들은 두터운 우정을 키우며 산 것이었다.

재(齋)를 사우(四友)라고 이름지은 것은 왜인가요? 허자(許子 저자 자신을 가리킴)의 벗하는 자가 셋인데, 허자가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아울러 넷이 된 셈입니다. 셋은 진나라 시절의 도사 도원량, 당나라 시인 이태백 그리고 송나라의 문장가 소자첨(소식, ,소동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우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소중한 것일까요.

'사우재기'는 허균이 신해년(1611, 광해군 3) 2월 사일(社日)에 썼씁니다. 다음은 '사우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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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齋)를 사우(四友)라고 이름지은 것은 왜냐? 허자(許子 저자 자신을 가리킴)의 벗하는 자가 셋인데, 허자가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아울러 넷이 된 셈이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날의 선비는 아니고 옛사람이다. 허자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지어 배척하므로, 문에 찾아오는 이가 없고 나가도 더불어 뜻에 맞는 곳이 없다. 그래서 탄식하며,

“벗이란 오륜(五倫)의 하나인데 나만 홀로 갖지 못했으니 어찌 심히 수치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했다. 물러나와 생각건대, 온 세상이 나를 비천하게 여기고 사귀지 않으니 내가 어디로 가서 벗을 구할 것인가. 마지 못해 옛사람 중에서 사귈 만한 이를 가려 벗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晉) 나라의 처사(處士) 도원량(陶元亮)이다. 그는 한가하고 고요하며 평탄하고 소광(疏曠)하여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고 가난을 편히 여기며 천명을 즐기다가 승화 귀진(乘化歸盡)하니,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하여 잡을 길이 없다. 나는 몹시 그를 사모하나, 그의 경지에는 미칠 수가 없다.

그 다음은 당(唐) 나라 한림(翰林) 이태백(李太白)이다. 그는 비범하고 호탕하여 팔극(八極)을 좁다 하고 귀인들을 개미 보듯하며 스스로 산수간에 방랑하였으니, 내가 부러워하여 따라 가려고 애쓰는 처지이다.

또 그 다음은 송(宋) 나라 학사(學士) 소자첨(蘇子瞻)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 귀한 이나 천한 이 할 것 없이 모두 그와 더불어 즐기니, 유하혜(柳下惠)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본받고자 하나 못하는 처지이다.

이 세 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千古)에 떨쳐 빛나지만, 내 보기에는 모두 그들에게는 여사(餘事)였다. 그러므로 내가 취하는 바는 전자에 있지 후자에 있지 않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삼는다 할 것 같으면, 어찌 속인들과 함께 어깨를 포개고 옷소매를 맞대며, 사분사분 귓속말하며 스스로 우도(友道)를 삼을 것인가.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상을 꼭 같이 그리게 하고, 이 초상에 찬(贊)을 짓고 석봉(石峯)으로 하여금 해서(楷書)로 쓰게 하였다. 매번 머무는 곳마다 반드시 좌석 한쪽에 걸어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대하여 권형(權衡)을 평정(評定)하며 마치 함께 웃고 얘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를 듣는 듯하여 쓸쓸히 지내는 생활이 괴로운 것을 자못 알지 못하였다. 이러고 보니 나는 비로소 오륜을 갖추게 되었으며, 더욱 남과 더불어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확실히 글을 못하는 자라 세 분 군자의 여사에도 능하지 못하지만 성격마저 탄솔(坦率)하고 망용(妄庸)하여 감히 그러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는 못한다. 단지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신명(神明)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벼슬에 그 출처와 거취는 암암리에 그분들과 합치되었다.

도연명이 팽택(彭澤)의 영(令)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벗었는데, 나는 세 번이나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못 채우고 문득 배척받아 쫓겨났다. 이태백은 심양(潯陽)과 야랑(夜郞)으로 가고 소동파는 대옥(臺獄)과 황강(黃岡)으로 갔었다.

이는 모두 어진이가 겪은 불행이지만, 나는 죄를 지어 형틀에 묶이고 볼기맞는 고문을 받은 뒤 남쪽으로 옮겨지니, 아마도 조물주가 희롱하여 그 곤액은 같이 맛보게 하였으나, 부여된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옮겨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복을 입어, 혹시라도 전야로 돌아가도록 허락된다면, 관동(關東) 지방은 나의 옛 터전이라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柴桑山)ㆍ채석산(采石山)과 견줄 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常熟縣)과 양선현(陽羨縣)보다 못지 않으니, 마땅히 세 군자를 받들고 감호(鑑湖) 가에서 초복(初服) 입던 신세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한가지 즐거운 일로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가 아신다면 역시 장차 즐겁고 유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총총히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을 즐기면서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놓고 분향하면서 읍을 한다.

그래서 마침내 편액을 사우재(四友齋)라 하고 인하여 그 연유를 위와 같이 기록해둔다. 신해년(1611, 광해군 3) 2월 사일(社日)에 쓰다.

사일(社日)은 춘분(春分) 및 추분(秋分)에서 가장 가까운 앞뒤의 무일(戊日)을 말한다. 여기서는 춘분에서 가까운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