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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세 가지 어려운 일 극복한 조삼난(趙三難), 만마관에서 술장사를 하다

차산필담(此山筆談)’은 저자 미상의 삼난금옥(三難金玉)’ 16편이 수록된 종합서, 한문단편집이다.

수록된 작품은 건()권에 영가김씨부부적음설(永嘉金氏夫婦積陰說)’, ‘홍녀가천치귀록(洪女嫁賤致貴錄), ‘시각습장(試榷慴將)’, ‘삼난금옥(三難金玉)’ 5, ()권에는 증염행매(拯艶行媒), ‘노로수뢰(老老受賂)’, ‘김대섭전(金大涉傳)’ 11편이 실려 있다.

삼난금옥은 충청도의 몰락양반의 둘째 아들인 조삼난(趙三難)이 가난을 이기고 성공한 이야기이다. 3(三難)이란 남의 아내와 몰래 전주에 내려가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 1난이고, 오랫만에 찾아온 형에게 술·밥값을 받는 것이 2난이며, 부자가 된 뒤에 다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것이 3난이다.

진주라는 보석이 있다. 조개 몸속으로 모래나 벌레알 등 이물질이 들어오면 조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개껍질과 동일한 성분의 분비물을 배출하여 이물질을 둥글게 감싸게 되는데, 이것이 점점 커져서 영롱한 진주가 된다. 그래서 진주를 조개의 눈물이라고 한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정상에 우뚝 선 사람과 같다. 바로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보석이 되고, 시련을 겪었기에 남들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된다. 전세계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인 전설의 향수샤넬 넘버5’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클래식 패션샤넬룩이 있다. 이 명품들은 어릴 적 코코샤넬의 가난과 병든 딸을 살리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뼈아픈 상처의 슬픈 기억이 있다. 코코샤넬은 자신의 영혼 속에 남겨진 상처에서 진주를 만들어냈다.

 

호남제일관만마관

 

전북에는 유독 '호남 제일'이라는 현판이 많다. 호남제일루는 남원 광한루(보물 제281), 호남제일정은 정읍 피향정(보물 제289)이요, 호남제일성은 풍남문(보물 제308)이요, 호남평야의 첫 관문인 전주에 세워진 호남제일문도 있으며, 호남제일번 만마관도 자리하고 있다.

좁은목은 전주 3대 바람통으로, 완주군 상관면(上關面)의 요새인 만마동(萬馬洞. 이철수의 '완산승경' 가운데 만마도관 나옴)과 더불어 남고산의 진영을 등지고 있다. 그래서 군사 요지로써 많은 사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한양에서 남원으로 이어지는 길은 자그만치 약 630여 리에 이른다. 숭례문에서 시작,칠패,팔패-이문동-도제골-쪽다리-청파배다리-돌모루-밥전거리-모래톱-동재기(동작진)-승방들-남태령-인덕원-갈미-사근내-군포내-미륵당-지지대-참나무정이-교구정-팔달문-상류천-하류천-대황교-진겨골-떡전거리(병점)-중밋오밋(중미현)-진위-칠원-소새비들-천안삼거리-김제역-덕정-원터-광정-활원-모로원-새술막-공주금강-경천-노성-은진닥다리-황화정-능기울-여산관-삼례역-고산-전주-남천교-반석(半石)-한벽당-좋은목-만마동-노구바위(또는 노고바위)-임실관-오수참(獒樹站)-남원까지다.

춘향전을 보면 이도령이 여산 쑥고개를 넘은 후 통샘, 죽엽정을 지나 전주팔경을 본 후 전주와 임실의 경계인 노구바위 마을을 넘어간다노구바위가 있는 마을은 현재 산정마을으로 불리우며, 작은 개울을 따라 산비탈에 형성되었다. 원래 노구라는 것은 늙은 개가 달을 보며 짓는(老狗吠月)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또 늙은 할매(할머니)가 고사리를 꺾는 노구채미의 형상이라 하여 붙여졌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노구바위는 나주, 남원 등 남쪽에서 전주로 들어서는 옛 교통로의 길목으로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전주의 남쪽 빗장이라 하여 남관이라 불렸으며, 조선시대 때는 남관진이란 군사 주둔지가 있었다. 만일 남관진의 위병 초소격인 만마관이 무너지면 전주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아낼 수 없는 처지였으리라.

만마관은 잦은 왜구 침략으로 전주부성 보호와 만경강 일대 호남평야 곡물 수탈을 막기 위해 축성된 성의 관문이다. 전주부성, 즉 전라감영의 남쪽을 지켰던 성으로 남원과 나주, 광주를 비롯해 멀리는 제주도까지 전주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문을 거쳐야 했기에 지금의 관촌館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통행하기 일쑤였다. 마한의 중심 도시였던 완산완주으로 진입하는 남 쪽 관문은 남관이라 하고 윗동네를 상관이라 한다. 상관면上關面은 빗장을 의미하며, 군사상 중요한 지역으로 진 을 두어 방어하거나 검문소 역할을 하 는 곳이다. 상관면의 명칭은 옛 전주부의 관문 역할을 하던 만마관萬馬關의 위북쪽에 있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이며 남관진은 상관의 남쪽에 있는 군진을 뜻한다. 남관상관모두 만마도관과 관련된 지명이다.
만마관 가는 길 왼쪽에는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 所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중 경제와 상업 활동에 관해 기술한 예규지倪圭志에는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에서 만든 것을 최고로 여겨 전 라도에서 생산되는 재화 가운데 으뜸이라고 이야기 한다

최근 전북과 완주를 지켰던 천연 요새 만마관의 복원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만마관은 국도 제 17호선 중심부에 있기에, 만약 재축성되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호남제일관만 마관을 복원해 전북의 주요 역사적 랜드마크로 삼고 나아가 상관 편백숲, 전주 한옥마을과 연계한 역사·문 화·힐링 공간으로 조성해 전라감영 관방이란 순기능 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전주 북쪽에 서 있는 호남제 일성문루처럼 이곳에 다시 만마관 문루가 세워진 모 습을 상상해 본다.

 

만마관은 1811년 견훤고성지(古城址)에 따라 남고산성을 증축하고, 임진왜란 당시 전주부의 남쪽 40리 지점인 용암리에 만마관(萬馬關)을 구축했다고 한다.

왜적의 침략을 위해 만든 산성으로, 말 일만여 두를 감추고 지낼 수 있다고 해서 만마도관(萬馬道關)이라고도 한다. 남관과 상관은 이와 관련된 이름으로 남쪽, 그리고 위를 상징한다.

만마관(萬馬關)과 도관(道關)이라는 지명은 모두 전북 완주군 상관면 용암리(龍岩里)에 있는 동네 이름이다.

 

만마동 닥나무, 호남 제일 자랑

 

과거에 이 마을에 있던 만마관은 유명한 요새지였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도관 마을 중턱 협곡을 끼고 성을 쌓았다. 이 성을 가리켜만마도관이라 불렀으며 완산승경 가운데 하나다. 높이가 70-80 미터에 이르는 산성과 관문을 갖춘난공불락의 요새지가 바로만마도관이다.

만마도관(萬馬道關)만마관(萬馬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만마도관 일진부도(萬馬道關 一塵不到)> 드높은 만마관 관문은 티끌도 새어넘지 못하는 요새지로 알려졌다.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는 언문으로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가정백과 사전으로 우리나라 8도에서 나는 것으로, 김제 능금, 남원 종이, 임실 시설, 무주 청옥채(靑玉菜), 자옥채(紫玉菜), 전주 연엽찜(蓮葉, 소의 볼기에 붙은 고기), 전주 만마도(만마관) 종이, 마곡 종이, 화각기(畵刻器), 소접(작은 접시), 죽력고, 순창 고추장, 책지(冊紙), 진안 담배, 모시 등이 유명하다고 했다.

전라도관찰사를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이 가운데 경제와 상업 활동에 관한 예규지(倪圭志)’가 있다.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에서 만든 것을 최고로 여겨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재화 가운데 으뜸이라고 했다.

 

 

만마관을 소재로한 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이 길 여유롭고 편안해 말 가는대로 맡기네. 들판에 꽃들 여기저기 자유로이 피어있고 산 속의 새들 애달프게 우는구나. 잔뜩 늘어난 것은 천 갈래 흰 머리 뿐 한 가지 물건도 가진 것이 전햐 없다네. 저녘에 운수현(雲水縣)에 투숙했는데 가랑비가 앞에 있는 개울물을 넘치게 하고 있구나'

 

손명래(孫命來, 1664~1722)가 지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만마동을 지나 임실현감 정보 이만성의 임소에서 묵었다(解官歸路 由萬馬關 是夕宿任實李貞甫(李萬成, 1661~) 任所)‘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

 

만마관 관련 시를 발굴, 소개한다

 

만마관

 

'오원강가에서 먼지 묻은 갓끈을 씻고

만마관 어귀에서 가던 길을 멈추었네

들판 군영에서 들려오는 맑은 피리 소리에 봄버들 짙어가는데

단장한 산중 누대에 석양이 밝게 드리워지네.

견훤국은 천문에 오르는 것이 중간에 끊겨벼렸는데

자사의 병영이 지축을 흔들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네

험한 관문을 설치한 구관의 공적을 진정 알겠으니 백성들은 그저 태평했던 시절을 노래하네

 

이는 한장석(韓章錫,1832~1894)의 미산집(眉山集).미산선생문집(眉山先生文集) 1권에 실려 있다.

 

만마곡(萬馬谷)

 

'아침 일찍 만마곡을 지나가는데

눈 덮인 얼음 조각들이 이리저리 얽혀있네.

멀리 골짜기 위에서 매 한 마리 외롭게 맴돌고

허허로운 숲에선 까마귀 떼 우짖고 있네

산의 형상은 마치 험한 요새지인 효산(崤山), 민액(鄳阨)과 같고

땅의 형세 또한 중요한 교통로 포곡(褒谷), 야곡(斜谷)과 비슷하구나.

안팎으로 도회지라 연결되는 곳

가히 변방을 방어하는 요새라 자랑할 만하구나'

 

이는 장유(張維, 1587~1638)의 계곡집(谿谷集).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28권에 실려있다. 효산과 민액은 중국 하남성, 포곡과 야곡은 중국 섬서성 종남산의 골짜기다.

 

완산에 도착할 즈음에(將到完山)

 

'만마곡 깊은 계곡 길 좁기만 한데

보내오는 소식 끊어지니 낙성(洛城)과도 멀어지네.

먼 변방에서 고달픈 나그네 회포야 어찌 끝이 있으랴

여관에서 잔등(殘燈) 바라보며 또 한 밤이 지나가네'

 

이는 이하진(李夏鎭, 1628~1682)의 육우당유고(六寓堂遺稿) 2책에 나오며, 아래 작품도 같은 책에 소개됐다.

 

과만마곡(過萬馬谷)

 

'허허로운 골짜기 만마(萬馬)라는 이름이 전해오는 곳

황폐해진 터에 주인 없이 들꽃만이 만발하네

어리석은 종놈도 예부터 전해오는 만마곡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데

맑은 날 폭포 소리에 내 웃음소리 묻혀버리네'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집(梅泉集) 3권에도 만마관 이야기가 나온다.

 

아침에 평교를 출발해 점심에 만마관에서 쉬다(早發平橋 午憩萬馬關)

 

'평평했던 시냇물이 언덕을 몰아쳐 다리를 구분하지 못하겠고

주막 연기 실낱같이 가늘게 올라오는데 이 여정은 멀기만 하구나.

꾀꼬리는 깨어나라 말하는 것 같은데

나비는

무슨 마음으로 다정하게 손짓을 하는지.

산들바람 가녀리게 부니 꽃잎은 겨우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가고

비가 드물게 내려 겨울 지난 봄보리는 허리만큼도 자라지 못했네.

관문의 역참 나무를 보고 짓고 시 두루 생각가는 걸 보니

우습게도 이 미치광이는 늙어가며 더욱 풍요롭기만 하구나'

 

황현의 매천집 3'전주'라는 시 앞부분에도 만마관의 모습이 드러난다.

 

전주

 

'겹겹 관문 다 지나니 만마관이 웅장하고

칠봉산의 푸른 빛은 들판 서쪽으로 트여있네

황량한 성곽 돌 흰 건 무모한 전쟁 때문일 터

경기전 구름은 붉어 제왕의 고향을 기억하네.

군무(軍務) 다시 일으키되 병화는 뒤로했으나

나라의 근심은 수시로 나그네 시에 들어오네.

남천교 푸른 물에 봄빛은 예전 같고

버들개지 이리저리 바람 따라 날리는구나'

 

조삼난(趙三難)의 이야기

 

전주의 만마관은 종이 이야기 말고도 조삼난(趙三難)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조삼난(趙三難)은 충청도 명문대가의 아들이었으나, 대대로 가난하고 어려서 부모를 잃어 일찍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 형 모씨는 글은 잘하지만 포부가 졸렬하여 살아갈 수가 없어 겨로 굶주린 배를 채우기를 마치 부잣집 고기 먹듯 하는 형편이었다. 조삼난은 나이 30이 다 되어 그 형이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해 채단을 마련하고 서로 비등한 혼처를 구해 배필을 택하였다. 역시 궁한 사람이 궁한 사람과 만난 것이다. 시집온 날 항아리에 좁쌀 한 톨조차 남은 게 없었고, 부엌은 싸늘하여 연기조차 낼 수 없었다. 그러자 신부가 말하였다.

집안 살림이 이 모양이니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내게 한 가지 계책이 있긴 한데, 당신은 따르겠소?”

죽음도 피하지 않을 텐데 어찌 삶을 마다하겠습니까?”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처지에 저 채단은 어디다 쓰겠소? 저걸 팝시다. 기십 꿰미는 받을 테니, 당신과 멀리 도망가서 대로변에 집을 사가지고 살아봅시다. 우선 술장사를 하여 그 이문으로 변리를 놓아, 돈이 좀 벌리면 집을 늘려 안방을 깨끗이 꾸미고 술집을 표시하는 주기(酒旗)를 걸고, 허름한 여관방을 널리 열어놓고 마구를 연달아 지어 오가는 상인들을 받되, 나는 객주의 심부름꾼이 되고, 당신은 술청의 꽃이 되어 두 주먹 불끈 쥐고 10년을 기약해서 누만 냥의 재산을 모은 다음, 그때 가서 옛 가문을 회복하면 어떻겠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려운 일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쉬운 일을 도모하겠소?”

그럼 해보시죠.”

드디어 채단을 팔아, 남편은 지고 아내는 이고 한밤중에 도망하였다. 그 형은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아우가 견디지 못하여 가문의 누를 끼친 것이겠거니 생각하니 책을 볼 마음도 내키지 않고 남을 대할 면목도 없었다.

그로부터 5, 6년이 지나는 사이에 그 형은 생계가 더욱 궁핍해져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나고, 땟국이 온몸에 흘러 허름한 갓에 뒤축이 떨어진 신을 끄는 양이 영락없이 걸인의 형상이 되고 말았다.

그는 동생의 종적을 찾으려고 팔방으로 떠돌아다니느라 실컷 고생을 하고 전주(全州) 만마관(萬馬關 : 上關)에 당도했다. 관내에 큰 객점이 있는데, 한 미인이 술청에 앉아 있었다. 지팡이를 세우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바로 자기 제수였다. 혹 닮은 사람이 아닐까 싶어 행동거지를 유심히 살펴보니 틀림없이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 탄식을 하며 주기를 걷고 들어갔다.

 

제수씨, 이게 어찌 된 영문이오?”

아주버님, 우리에게 따지려 오셨습니까?”

내 길에 시달려 목이 마르니, 우선 목을 축이게 한 잔 주시오.”

 

그는 술을 받아 쭉 들이키고는 물었다.

아우는 어디 갔소?”

장사일로 마침 가까운 장터에 갔습니다.”

 

내 이번 길은 아우 때문이오. 여기서 기다리다가 오거든 만나보고 하룻밤 묵어가겠소.”

 

그럼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한참 기다리자 아우가 짧은 배자를 걸치고 행상들의 짐바리 수십여 필을 줄줄이 몰고 들어와서 짐을 풀고 말을 매어 꼴을 먹이는데,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양이 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친 사람 같기도 하였다. 그 형이 방에서 지켜보다가 일손이 끝나기를 기다려 아우를 불렀다.

얘야, 네가 이게 웬 꼴이냐?” 동생이 눈을 들어 쳐다보니 자기 형이었다. 뜰에서 잠깐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물었다.

형님, 여길 무슨 일로 오셨수?” 그러더니 다시는 집의 소식이나 노정(路程)이나 오래 떨어졌던 회포 등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고 밥상을 가지고 손님을 접대하러 오가느라 가만히 있을 겨를이 없었다.

형님도 다른 길손들과 똑같이 자시려우?”

그게 무슨 말이니? 되는 대로 먹지.”

길가 계산은 10전인데 형님에겐 5전어치로 드립죠.”

그 형은 냉대가 극심한 줄 알면서도 꾹 참고 그날 밤을 넘겼다. 아우는 밤에도 다른 방에서 자며 들여다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 길손들은 전부 떠났으나, 그 형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아우가 말했다.

형님, 왜 안 가고 머뭇거리시우? 얼른 밥값이나 셈하고 일어서우.”

내 너를 오래 보지 못하여 못내 마음이 울적하다가, 이제 너를 만나니 자연 발걸음이 무거워지는구나. 너는 무슨 마음으로 나를 이다지도 미워하며 내쫓으려는 거냐? 게다가 또 밥값까지 받으려 하는 거냐?”

내 동기간을 생각한다면 이 지경이 되었겠소?”

대체 값이 얼마냐?”

내 미리 형님 주머니가 넉넉지 못한 줄 알고 저녁과 아침을 반상으로 두 차례 드렸으니 10전이오.”

넌 내가 넉넉지 못한 줄만 알았지 텅텅 빈 줄을 몰랐구나.”

그럼 허다한 부잣집에 어디 묵을 곳이 없어 하필 여관엘 들었소? 돈이 없거든 수중에 든 물건이라도 대신 잡히시오.”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쉬운 일을 도모하겠소?”

그 형은 할 수 없이 떨어진 부채와 닳아빠진 수건으로 셈을 했다. 제수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어제 술 한 잔 값이 있습니다. 그것도 갚으셔야죠.”

그 형은 다시 주머니 속에서 헌 빗을 꺼내 땅에 던지고 눈물을 씻고 돌아섰다.

그 후로 심회가 편치 못하여 혼자 탄식하곤 하였다.

마시면 탐학해진다는 광동(廣東)의 탐천(貪泉)과 진() 후주(後主)가 그 비()들과 숨었다가 수군(隋軍)에 붙잡힌 말릉(秣陵)의 욕정(辱井)이란 곧 이를 두고 말함이겠지. 우리 집안에 저런 패악한 동생이 나올 줄 생각이나 했으랴!”

그리고는 아이들을 훈계하여 부지런히 치가(治家)해서 이 부끄러움을 씻자고 다짐했다.

4, 5년 지내는 동안 추우나 더우나 아우를 원망하며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 어떤 손님이 준마를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고 찾아왔다. 그 손님이 문전으로 들어오는데 어디서 온 귀한 손인지 모르겠으나 방안으로 들어와 공손히 절을 하고 주저주저하는 양을 보니 자기 아우였다. 형은 발끈하여 성을 내어 꾸짖었다.

너도 사람노릇 할 날이 있느냐?”

죄송합니다. 우선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제가 집을 떠날 때 가난을 이기지 못해 집사람과 약속하여 몇 년 계획을 세웠지요. 남쪽 수백 리 관시(關市)로 가서 대로변 요지에 자리를 잡고 이득을 독점하는 일이나, 거간노릇 등 직접 닥치는 대로 손을 대어 전을 벌여 장사를 하고, 물건을 팔아 이문을 남기기에 골몰하였습니다. 이런 판국에 어찌 동기간의 정을 염두에 두겠습니까? 전에 형님이 들르셨을 때 원수처럼 대한 것은 사람답지 못하게 돈벌이를 하기 때문에 인정을 끊으려고 그렇게 했던 겁니다. 무슨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이제 저는 수만금의 재산을 모아 아무 고을 아무 마을에다 집터를 정하고 2천 석 필지의 땅을 마련했지요. 1천 석은 큰집 장토요, 나머지 천석은 작은집 장토로 몫을 정했고, 산기슭을 끼고 동서로 각기 50간씩 기와집을 지었는데, 몸채·사랑채·대청·마루·부엌·창고 등이 똑같고, 가장 기물과 의복, 서책도 서로 비등한데, 다만 큰댁에 사당 3칸이 더 있지요. 지금은 노비들로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 땅문서 두 궤짝과 저녁과 아침거리로 먹을 정백미(精白米 : 깨끗하게 쓿은 쌀)와 찬품으로 쓸 어물을 약간 마련해 가지고 왔습니다. 원컨대 형님은 우선 문서궤를 보시고 이 아우노릇 못한 아우가 일으켜 세운 사업을 용서해 주십시오. 내일 날이 밝거든 이 보잘것 없는 집과 쓸모없는 물건들을 전부 버리고 식구들만 데리고 저리로 가서 부가옹(富家翁)이 되시면 기쁘겠습니다.”

형은 이 말을 듣고 성냄이 웃음으로 바뀌고 예전처럼 화락하여 등불을 켜고 마주 앉아 정회를 나누었다.

집이 가난한데 재물을 모았으니 물론 가상한 일이나, 우리 같은 양반 가문에 흠이 아닐 수 없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그러면서 한편으로 위로하고 한편으로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 교자를 세내고 말을 빌려서 낡고 지저분한 것들은 버리고 온전한 것과 세전하는 문부(文簿)만 수습해 아우가 앞서고 형이 뒤따라 일가가 이사를 했다. 집을 지키던 비복들은 날을 잡아 기다려서 성대히 음식을 마련하고 맞이했다.

그 형은 두 집의 꾸밈을 두루 둘러보고 그 규모의 웅대함을 극찬했다. 드디어 설비한 대로 각기 처소를 정하고 다시는 세상 근심이 없이 화식(火食)하는 신선이 됐다.

아우가 이에 형과 상의해서 빈객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며칠 즐기고 잔치를 파할 즈음에 아우가 크게 탄식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약 여기서 그친다면 한갓 한 모리꾼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가사를 돌보지 않고 사서 삼경(四書三經)을 읽어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허물을 씻으려는데 어떻겠습니까?

 

빈객과 여러 벗들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부하고 또 귀()하기까지 하고자 하니 자네의 계획은 실로 어려울 듯 싶네.”

어려운 일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쉬운 일을 도모하겠는가?”

 

그는 드디어 일을 잘 보는 영리한 자를 택하여 큰집과 작은집의 마름을 삼아 제반 출납과 빈객을 영송하는 등의 모든 일들을 처리하도록 하고는, 경서를 싸들고 절로 들어가 제일 좋은 한적한 상방(上房)을 잡아 주야로 글읽기에 몰두했다.

5년 사이에 칠서(七書)를 통하여 외우고 뜻을 파악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4년마다 보이는 식년시(式年試)를 보아 33인에 방안(榜眼)으로 참여하여 이름이 홍패(紅牌)에 쓰이고 성은(聖恩)이 황봉(黃封 : 임금이 하사한 술)에 넘치고 어사화를 꽂게 되니 가문이 영화롭고 상서로운 빛이 났다.

그리고는 곧 6품으로 벼슬을 하여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을 거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그를 조삼난이라 칭한다. 대개 사대부의 심지로서 부인과 함께 술장사를 한 것이 첫째 어려운 일이요, 오래 헤어졌던 형이 하룻밤 묵어가는데 밥값을 받아 낸 것이 둘째 어려운 일이요, 치부한 뒤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고 독서를 하여 공명을 이룬 것이 세째 어려운 일이다.

그는 영조(英祖) 때 사람이었다. 자손이 지금도 부자로 살고 벼슬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차산필담(此山筆談) 1권에 삼남금옥(三難金玉)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여기서는 삼난(三難)이라고 줄었다.

충청도의 몰락양반의 둘째 아들인 조삼난(趙三難)이 가난을 이기고 성공한 이야기이다. 3(三難)이란 신혼한 처와 함께 남모르게 전주 만마관(萬馬關, 전주서 남원 가는 길목에 있는 지명으로 上關의 이칭)에 내려 가서 술장사를 시작한 것이 1()이오, 오랫만에 찾아온 형에게 밥값을 받는 것이 2난이요, 부자가 된 뒤에 다시 공부를 해서 급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