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토리] 두 왜장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
이규상(李奎象)의 '여사행(女史行)'
'왜구가 진주성 함락할 때에
논개란 이름의 관기가 기이하도다.
아름다운 사람이라 꽃 같기도 다시 달 같기도 해
비취빛 쪽진 머리에 붉은 화장으로 어찌나 생글생글하던지
우뚝하게 서있는 남가의 촉석루에서
생긋 한 번 웃으며 누군가 부르는 듯하네.
남강 앞엔 왜구의 진은 달무리 휘돌아
흰 칼날과 포화에 피가 비처럼 드리워졌네.
왜구 중 방탕한 놈이 갑자기 날 듯 걸어와
두 왜구가 다투며 한 미인을 납치하려네.
미인은 두 손으로 두 왜구를 끌더니
100길이의 남강 물결에 몸을 함께 빠뜨렸다네.
이에 한 번 죽기를 평소에 결단했다는 걸 알겠으니
한번 죽음에 오히려 두 왜구 두루 죽였구나.
남자도 계책 실행하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관기로 한 명의 연약한 자태라면 오죽할거나?
맑은 강물은 논개의 미모인 듯 옥 같고 바위는 논개의 절개인 듯 바뀌지 않으니
이 여인은 협객이지 보통 여자 아니라오.(韓山世稿 卷21)'
이 여사행(女史行)에 등장한 형상은 비록 낡은 도덕 개념과 논리 틀로 수식되어 있으나 전환기의 시대에 여성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면으로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1846년에 장수 현감을 지낸 정주석(鄭冑錫)은 논개가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서 태어나 자랐다며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다. 이를 근거로 장수군에서는 논개가 장수군 출신이라며 기념행사를 갖습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많은 장수들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했습니다. 당시 진주목의 관기였던 논개는 강변 바위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습니다. 거문고를 타면서 왜장을 유인했고,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논개 이야기를 맨 처음 글로 써서 전한 사람은 광해군이 세자였을 때 스승이었던 유몽인이다. 임진왜란과 계사년 전투 후 광해군과 함께 전주와 진주를 방문하여 희생된 유가족과 주민들을 위로하고, 참혹한 실태를 조사했던 모양입니다.
유몽인은 자료집인 <어우야담>(1621) 맨 앞에 논개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이후 여러 사람이 논개 이야기를 써서 기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3985
[인문학 스토리] 두 왜장과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
이규상(李奎象)의 '여사행(女史行)'
'왜구가 진주성 함락할 때에
논개란 이름의 관기가 기이하도다.
아름다운 사람이라 꽃 같기도 다시 달 같기도 해
비취빛 쪽진 머리에 붉은 화장으로 어찌나 생글생글하던지
우뚝하게 서있는 남가의 촉석루에서
생긋 한 번 웃으며 누군가 부르는 듯하네.
남강 앞엔 왜구의 진은 달무리 휘돌아
흰 칼날과 포화에 피가 비처럼 드리워졌네.
왜구 중 방탕한 놈이 갑자기 날 듯 걸어와
두 왜구가 다투며 한 미인을 납치하려네.
미인은 두 손으로 두 왜구를 끌더니
100길이의 남강 물결에 몸을 함께 빠뜨렸다네.
이에 한 번 죽기를 평소에 결단했다는 걸 알겠으니
한번 죽음에 오히려 두 왜구 두루 죽였구나.
남자도 계책 실행하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관기로 한 명의 연약한 자태라면 오죽할거나?
맑은 강물은 논개의 미모인 듯 옥 같고 바위는 논개의 절개인 듯 바뀌지 않으니
이 여인은 협객이지 보통 여자 아니라오.(韓山世稿 卷21)'
이 여사행(女史行)에 등장한 형상은 비록 낡은 도덕 개념과 논리 틀로 수식되어 있으나 전환기의 시대에 여성 존재를 부각시켰다는 면으로 보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1846년에 장수 현감을 지낸 정주석(鄭冑錫)은 논개가 장수군 장수면 장수리에서 태어나 자랐다며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다. 이를 근거로 장수군에서는 논개가 장수군 출신이라며 기념행사를 갖습니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많은 장수들이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했습니다. 당시 진주목의 관기였던 논개는 강변 바위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순국했습니다. 거문고를 타면서 왜장을 유인했고,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한 뒤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논개 이야기를 맨 처음 글로 써서 전한 사람은 광해군이 세자였을 때 스승이었던 유몽인이다. 임진왜란과 계사년 전투 후 광해군과 함께 전주와 진주를 방문하여 희생된 유가족과 주민들을 위로하고, 참혹한 실태를 조사했던 모양입니다.
유몽인은 자료집인 <어우야담>(1621) 맨 앞에 논개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이후 여러 사람이 논개 이야기를 써서 기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http://www.sjb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3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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