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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송태회의 '염재유고' 완역.....고창의 역사와 문화 한눈에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 1872-1941)'염재유고(念齋遺稿, 옮긴이 백원철, 이성우, 정경원, 발간 고창문화원)‘가 처음으로 한글로 완역됐다. 고창고보 교사로 서예가로 활동한 그의 염재유고는 한말과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화순 출신 한문학자이자 서화가인 염재 송태회의 미간행 필사본 문집이다.

송태회는 호가 염재(念齋), 염재거사(念齋居士), 염재(恬齋), 염와노부(恬窩老夫), 호산(壺山)이며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한문학자이자 서화가이다. 숙부인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 1847~1916)의 제자로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나 16세에 형 재회(在會)와 함께 최연소로 사마시에 급제, ‘동몽진사(童蒙進士)’로 불렸다. 1920년 고창 오산고등보통학교(현 고창중고등학교) 한문교사로 초빙된 이후 고창으로 이주해 조선 역사와 한문, 서화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서 입선한 후 글씨와 사군자에서 모두 9회에 걸쳐 입선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송태회는 고창과 전주를 기반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가지면서 활동했다. 고암 이응노(李應魯, 1904~1989)를 지도하기도 했다. 매천 황현, 의재 허백련, 위창 오세창 등과 교유했다.

염재유고1엔 소(), (), (), (), (), (), (), (), 상량문(上樑文), 제문(祭文), 애사(哀詞) 58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형립에게 보내는 편지(寄李炯立書)’는 이형립에게 시, , 화의 예술에 대한 담론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성산기(聖山記)’는 성산을 그린 작품을 남겼을 때 함께 지은 기문으로,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 본관 낙성식 때 고창의 역사와 산천의 아름다움을 글로 지었다. 1926년 병인(丙寅) 3월 중순, 고창고보 교사 준공을 기념해 고창의 역사와 주변 산천의 아름다움을 성산기(聖山記)’ 라는 이름으로 남겼다. 그는 새로 지은 교사를 으리으리하여 화엄누각과 같이 우뚝 솟아있다(傑然如華嚴樓閣湧出地上)”고 표현했다. 성산은 오늘도 고창고등학교를 북쪽에서 둘러 막아 아늑한데다가 울창한 소나무들이 연륜을 더해 지금의 왕소나무가 됐다.

 ‘동계기(東溪記)’엔 구례에서 은거했던 박승혁(朴勝奕)에 대한 글로 그에게 10폭 서예 작품을 쓰고 8폭 사군자 그림을 그려 주면서 썼던 기문이다. 이외에 제죽수이십영화병(題竹樹二十詠畵屛)’, ‘제일화쌍접도기김지산(題一花雙蝶圖寄金芝山)’ 등 그림과 함께 지은 글들이 실려 있어 매우 흥미롭다.

자천대 중건록서문이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옥주(沃州)의 자천대는 세상에 전해지기를 최지원선생이 글을 읽던 곳으로 바닷가의 풍경이 밝고 고우며 암석과 골짜기가 빼어나고 기절하다고 한다. 계유년에 선생의 후손 학수(學洙)씨가 마침 이 고을을 맡아 고을의 여러 선비들과 그 곳에 나아가 한 건물을 세우고 그 다음해인 갑술년 55일에 문예 모임을 베풀며 낙성을 했다. 시문 몇 편과 기념 시부(詩賦) 및 고풍(古風) 여러 편을 아우르니 아속(雅俗)이 함께 이르고 지금과 옛것이 볼만하다. 그 책머리에 쓰기를 자천대중건록(紫泉臺重建錄)이라 하고 대의 사진도 찍어 장차 인쇄하려 나에게 서문을 부탁했다이 글은 병자년 12월 상순에 썼으며, 이때는 1936년에 해당한다.

2중향시초(衆香詩草)’, ‘동유시초서(東遊詩草序)’, ‘동유시초1~3과 발 등 154편이 수록되어 있다. ‘중향시초(衆香詩草)’단발령(斷髮令)’, ‘금강수(金剛水)’ 등 약 28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동유시초(東遊詩草)’지장암(地藏菴)’, 제금강시권후(題金剛詩卷後)101편의 시가, 3권엔 235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4행무유흔(杏廡遺痕)’과 논() 36편이 실려 있으며, 5박추당 화백에게 주다(贈朴秋堂畵伯)’, ‘모란 그림에 화제를 써서 임학영 교장에게 주다(題牧丹贈林鶴榮校長)’, ‘백양산 송만암 주지가 박영호가 지은 팔승 시를 나에게 보이며 화답을 요구하다(白羊山宋曼庵住持以朴映湖所作八勝詩示余要和)’ 등 시 202편이 실려 있다.

박추당 화백은 추당 박호병(朴好秉, 1878~1942)이다. 그는 부안 출생의 화가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사군자로 연속 4회 입선하면서 서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이하응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안중식·조석진 등의 중앙 화단의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6에는 서(), 중건기(重建記), 권두언(卷頭言), 비명(碑銘), 축사(祝辭) 등이 30편 실려 있고, 7에는 행장록이 288편 수록됐다.

크고 작은 봉우리 앞에 두 마리 학 날고 젓대 소리 골짜기 사립문에 들려오네. 붉은 연기 석양 아래에 처음 흩어지 그림 보는 그윽한 사람 돌아갈 줄 모르네(2)’

그는 금강산 유람때 본 향로봉을 보고 이처럼 읊었다. 그는 고창고보로 오게 한 양태승과 작별하면서 그대를 보내면서 이별가를 용이하게 부르노라. 맨 손으로 용을 잡는 사람 세상에 많지 않다네. 알겠노니 금호강 위에 뜨는 달빛 응당 성산의 언덕에도 나누어 비추리라(1)’고 썼다.

 

조기환 고창문화원장은 염재 선생은 인생을 중앙보단 지방에서 주로 살면서 교육은 물론 문화예술계에 지대한 공적과 영향을 남겼다면서 이번 문집의 번역 편찬 사업의 계기가 되어 문화 콘텐츠 개발에도 많이 활용되어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송태회의 걸작, 고창고보 그림과 호암실경도

 

한편 그가 1928년 그린 고창고보와 인근의 풍경을 소개한 작품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는 당시 몸담고 있던 고창고보의 모습과 주변 풍경을 그렸다. 1미터가 넘는 긴 비단에 수묵으로 주변 풍경을 그리고 성산(聖山) 아래 신축한 붉은 벽돌의 교사(校舍)를 붉은 색 진채를 써 선명하게 그렸다. 이 그림은 1928년 고창고보를 설립한 양태승 교장이 대구 계성학교 부교장으로 떠나게 되자 긴 감사의 글과 함께 그려준 것이다. 양태승교장은 이 학교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자 새로 학교를 세우려는 대구 계성학교에 부교장으로 초빙되어 가게 됐고, 그곳에서 1933년까지 재직했다. 1미터가 넘는 긴 비단에 수묵으로 주변 풍경을 그리고 성산(聖山) 아래 신축한 붉은 벽돌의 교사(校舍)를 붉은 색 진채를 써 선명하게 그렸다. 전체 풍경에 비해 교사의 규모는 작지만 그 붉은 교사는 화면을 압도한다.

고창고보를 설립하느라 갖은 고생을 했고, 특히 벽돌 한 장 굽는 것도 철저히 감독하며 정성들여 건물을 지은 양태승 교장의 노고를 치하하는 뜻을 그림에 담은 때문이다. 건물이 있는 오른편 배경 숲 속에 향교를 그리고 왼편으로는 송림(松林)을 사생했다. 화폭의 맨 우측에는 높은 산을 그리고, 그 옆에 고창고등보통학교부근풍경이라 쓴 후, 양태승을 위해 모양성 아래 우사에서 1928년 가을에 그렸다.(高敞高等普通學校附近風景, 戊辰秋日爲梁泰承君寫牟陽城下寓舍 念齋宋泰會)고 적었다.

이제 막 신축한 현대식 건물을 이렇듯 선명하게 그린 것은 그 당시 그림으로서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더구나 지금은 건물이 남아있지도 않기 때문에 고창고보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배경이 되는 뒷산은 미점법(米點法)을 썼다. 미점은 그가 다른 산수화 작품에서나 다음에 살펴보게 될 에서도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으며, 후지산을 그릴 때도 썼다고 할 만큼 즐겨 사용하던 준법이다. 대체로 바위가 적은 흙산을 그릴 때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건물 앞이나 주변 풍광 중에 유난히 키가 크고 가는 나무가 여럿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같은 나무 모습은 서양화 풍경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실제 심어진 나무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 고창고보 교사시절 고창군 아산면 호암(壺巖)의 실경을 그린 호암실경도가 전하고 있다. 필법은 전통적인 기법을 썼지만 색감이나 분위기는 매우 현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그림 상단에 적어 놓은 화제에서 밝힌 것처럼 호암은 호암 변성온(壺巖 卞成溫 1530~1614)이라는 인물이 노년을 보내던 두암초당(斗巖草堂)이 있던 곳으로, 바위 모양이 호리병을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호암은 고창 서북쪽 아산면에 있으니 큰 것은 반암이요 작은 것은 호암이 되니 옛날에 호암 변성온이 살았던 지역이다. 돌이 섞여 형성된 모양, 구름뿌리 같아 형태 엄하니 가을빛 헤아릴 수 없이 소나무를 둘렀도다. 이야기하다 비 오는 하늘에 이르러 능히 걸음 느리게 하니 높은 사람 누가 호암 같을고. 무진유월상순에 모양산 아래 우거에서 염재거사가 그렸다(壺巖 在高敞治西北雅山面大者盤巖小爲壺巖昔卞壺巖成溫寓居之地也. 磅礴雲根勢更嚴秋光無數帶松杉 話到雨天能緩步高人誰似卞壺巖 戊辰流月上旬寫 牟陽山下寓舍 念齋居士).”

중앙의 반석처럼 넓은 바위는 반암(盤巖)이다. 반암의 중간부분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축조된 초당이 있다. 송태회는 그곳을 자주 찾아 풍광을 즐겼다고 하는데, ‘두암초당편액을 쓰기도 했다. 그림의 바위모양은 실경을 닮아 위가 뭉툭하고 평평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바위산 기슭에 소나무가 둘러 서있는 모습 또한 실경과 매우 유사하다.

바위산이 있는 반암리 주위로는 주진천이 흐르고 있는데 그림에서는 실경에 비해 강폭을 넓게 표현하여 운치를 더하였다. 그런데 호암실경도금강산도십곡병에 비해 먹에 물기가 많고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해서도 먹색이 맑고 투명하여 마치 현대적인 수채화 같은 느낌을 준다. 일견 김수철의 송계한담도를 연상하게 하는데, 물기 많은 먹으로 바위의 윤곽선을 그리고 담채로 바림을 한 후 호초점(胡椒點)을 찍었다.

두암초당(斗巖草堂)’은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아산초등학교 뒷편, 영모정 뒷산에 있는 일제 강점기 초당으로 호암 변성온(15301614)과 인천 변성진(15491623) 형제가 만년에 머물렀던 곳이다. 하서 김인후에게 가르침을 받고 퇴계 이황과 교류한 호암의 인품이 마치 곡식을 되는 말()같이, 저울추같이 평평하여 치우치지 않았다고 두암이란 이름을 붙였다 한다. ‘두암초당상량문에는 용공부자 2486년 을해 324일 임자 임신 진시 상량 자좌 구(龍孔夫子 2486乙亥 324日 壬子 壬申 辰時 上樑 子坐 龜)”이라 쓰여 있으며, 퇴계 이황, 노사 기정진, 하서 김인후의 편액등 온갖 시들이 담긴 편액이 즐비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6.62남짓한 공간에 지어진 조그마한 정자이다. 고창 출신으로 판소리의 대가였던 만정 김소희 명창이 15세 때 득음한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바위를 둘러 있는 호암의 모습을 그에 맞는 선과 먹으로 표현한 것이다. 주변의 승경을 선택한 점이나 산뜻한 색감 등은 그의 실경에 대한 이해와 표현법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송태회는 이 호암실경도19286월 상순에 그렸다고 했는데, 그때는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어, 역사 뿐 아니라 미술도 가르치고 있을 때이다. 자신이 늘 해오던 전통 동양화뿐만 아니라 미술교사로서 접했던 현대적인 그림의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