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 유효하기를 바란다.
조성립의 '비분탄(悲憤歎)', 웅치에서 왜군을 맞서다. 당당하게 죽은 김제군수 정담을 기리며
조성립(趙成立)의 '비분탄(悲憤歎)'
'슬프구나! 비분강개한 긴 탄식이여!
깎아지른 저 곰치는 아득히 서로 바라보이네.
꿈틀대는 해적은 삼도로 나누어져
한 진은 곧장 전주로 향하네.
동래는 이미 꺾였고 부산도 함락되어,
지나친 마을은 다투어 도주하거나 숨는다지.
김제군수 정담(鄭湛)은 홀로 나라만 소유하고 몸은 소유하질 않아
한 척 검으로 곧장 군대의 선두에서 감당하려 했다네.
보병들 끌어모아도 만 명이 채 되지 않지만
전투 진영의 의기와 용기가 어찌나 당당한지.
적군은 많고 우리들은 적으니 기세 대적하기 어려워,
나무 베어 목책 설치하고서 먼저 방어 대비하네.
흰 말의 한 적진의 장수가 붉은 깃발 세우고,
진을 등지고 돌입하며 중앙으로 달려드니
정담은 활 쏴 반드시 대번에 적중시키니 적중한 이는 반드시 죽고,
기마병들 겁 먹은 채 놀라 분주하고 바들바들 떠네.
적은 감히 물러나지도 못하고 감히 나가지도 못하는데,
영남과 호남의 양쪽 경계는 삐죽하게 솟아 있지.
문득 나주로부터 진이 엉성한 곳
저들이 한쪽 끝을 공격하여 의기가 날 듯 떠올랐다지.
진안과 금산의 두 군데의 적들이 구름이 합하듯 모여
행렬 앞 부분이 이미 꺾여 세력이 허둥지둥대네
장수와 사졸이 한 때에 모두 어디 가서
종사관 이봉 등 몇 사람만이 곁에 있는 게 보이네.
가령 산을 뽑아버리고 바다를 건널만한 용기가 있더라도,
화살은 떨어졌고 병졸은 흩어져 부질없이 주먹만 큰 것을.
한 손으로 비장의 검을 모아 가져다가
왼쪽으로 치고 오른쪽으로 부딪치니 별무더기 칼 끝에 분주하네.
적의 두 장군과 병사 수백을 죽였지만
담과 용기는 소진되어 적은 더욱 강성하기만 해.
긴 창 모아 큰 우레의 포화
굳게 앉아 적을 혼내키는 데 하늘은 푸르디 푸르렀네.
옛날에 옛적 절의에 죽은 충신들
백번 단련한 강철이었으리리'
오늘 김제는 곧 상산이니
이 땅의 곰치는 실제론 수양성이라네.
이 일을 어떻게 처음과 끝을 전해졌는가?
살아 돌아와 장차 마치며
자세한 것을 말한 것이겠지.
슬프구나! 비분강개한 긴 탄식이여!
군수의 죽음, 이 죽음은 떳떳한 도리여라.
悲來乎憤長歎!
截彼熊峴遙相望
蠢玆海寇分三道
一陣直向豐沛鄕
東萊已摧釜山陷
所過列郡爭走藏
公獨有國不有身
尺劍直欲前鋒當
提携步卒不滿萬
戰陣義勇何堂堂
冠衆我寡勢難敵
斬木設栅先備防
白馬一將樹紅旗
排陣突入馳中央
射必輒中中必殺
賊騎喪膽驚奔惶
賊不敢退不敢進
嶺湖兩界崎嶇岡
忽自羅州陣疎處
彼營一邊飛騰揚
鎭錦兩賊如雲合
頭局已摧勢蒼黃
將士一時皆何處
李菶數人見在傍
縱有拔山超海勇
矢盡兵散空拳張
隻手集持裨將劍
左衝右突紛星鋩
殺賊兩將兵數百
膽勇消盡賊益强
長鎗叢集炮大雷
牢坐罵賊天蒼蒼
於古巡遠顏杲卿
百鍊金鐵同心腸
今日金堤即常山
此地熊峴實睢陽
是事何以傳始終
生還將卒言其詳
悲來乎憤長歎!
郡守之死死綱常<竹菴公實記)>'
이 시는 임진왜란 때 웅치전투에서 용명을 떨치고 장렬히 죽은 한 장수의 사적을 그린 내용이다.
임진년 7월 황간(黃澗)에서 전라도 땅으로 침공한 적군은 금산(錦山)에서 고경명(高敬命) 부대를 격파하고 한편 순천 방면에서 또 적군이 쳐들어올라와, 아군은 이 양로의 적병을 저지하기 위해 진안서 전주로 넘어오는 웅치에 방어선을 구축했던 것이다. 전라도의 심장부인 전주를 지키는 일이 달려 있었다. 바로 작중에 다루어진 사실은 이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은 당시 김제군수로 부임했던 정담(鄭湛)이라는 무장이다. 거기 싸움에서 생환한 사람이 전하기를, “김제군수는 적군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면 꼭 맞히고 맞혔다 하면 꼭 꿰뚫었다. 그 혼자 죽인 수가 백여급(級)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그가 죽인 자들 가운데 하나는 적군에서 최고로 손꼽혀 전라감사로 일컫던 놈이다. …… 적군이 끝내 전주를 침공하지 못했던 것은 정아무의 무훈이다”라고도 말하였다('죽암공실기ㆍ상검찰사상공합하서'), 이러한 사적이 시의 서사적 내용을 이루고 있다.
시의 작자 조성립은 알려진 인물이 아닌데 서사의 대상인 정담의 행적 역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이다. 조성립은 정담이 전쟁 중에 군수로 부임하여 의병을 모집할 때 손잡고 같이 추진했으며, 웅치전투에서는 후방 지원의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정담의 비장한 최후는 그에게 남달리 감회가 컸으며 그래서 '비분탄'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쓴 것이다.
'비분탄'은 외적의 침략에 맞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기의 향토를 지킨 그야말로 애국문학이다. 비록 시적 표현의 수단이 높지 못한 무명인사의 작이라도 오히려 절실한 느낌은 비할 데 없다고 생각된다.
(임형택, '이조시대 서사시' 2권, 창비, 2020년, 54~55쪽)'
전라좌수영은 1479년 승격한 군영으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후 임전태세를 완비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지난 1593년 이순신 장군은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군저 개고호남 약무호남 시무국가(國家軍儲 皆靠湖南 若無湖南 是無國家)'즉 나라의 군사·군량·군비는 모두 호남에 의존하고 있는 만큼,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가 없었다'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호남이 있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는 말이 유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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