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토리]보리 피리를 잘라 전북 고창에서 하룻밤만 묵어도 천년의 세월입니다.
고창의 ‘高’자는 높을 고, 창 자는 높을‘敞’입니다. 옛 이름 모양현(牟陽縣)엔‘보리 모(牟)’자가 들어 있고, 고창고등학교 교가에도 한겨울의 추위를 잘 이겨낸 보리를 통해 고창정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방장산은 그림으로 치면 고창의 배경이 됩니다. 한없이 높고 드넓은 방장산을 굽어보는 바, 고창 동쪽으로 꼬막등 같은 집들과 명매기샘의 물줄기가 주진천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go)’창으로 불러도 좋을 이름입니다.
주진천은 고수면 은사리 칠성마을 수량동의 명매기골에서 발원하고, 증산제를 통과한 뒤, 고창군 심원면 용기리 곰소만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입니다. 고창천과 합류한 이후 구간은 인천강(仁川江) 또는 태천(苔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명매기샘골(명막골)은 고창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인천강의 시원지입니다. 천년고찰 문수사의 원시림으로 꽉 메운 취령산 북쪽 건너 등성이 장무재(長文峠)의 동쪽 잔등자락 남녘 골에 자리잡은 이 샘은 아무리 눈이 많이 내린 혹독한 겨울에도 결코 얼지 않아 고창 사람들과 꼭 맞닿아 있습니다.
저 멀리로 불어난 문수사의 계곡물은 가람을 에두르고 물이끼는 돌의 이마에서 한층 짙푸릅니다. 시나브로 계곡의 청량한 바람은 맑고 청아해서 꿈길을 걷는 듯 행복한 새벽길을 펼쳐놓습니다.
그대여! 행여 시린 마음 달래려거든 ‘하늘닮은’ 사람들의 희망, ‘하늘담은’ 고창에 눈길 한 번만 주시기를. 엄동의 서해 바다로 물줄기가 향할지라도 윤슬은 더 찬란하고 이내 삶은 뜨거워집니다.
보리 피리를 잘라 고창에서 하룻밤만 묵어도 천년의 세월입니다.
이기화 시인의 시집 '고창(출판사 기역)'
은 고창의 전래 지명을 모두 주워 담은 까닭에 보릿골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한숨과 눈물까지도 모두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지난 시대의 삶을 오늘에 투영시켜 우리의 삶을 밝고 따뜻하게 되살리고 있으며, 어제를 통해 오늘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비릿한 바닷 내음과 술취한 어부들의 한탄 소리, 동학군들의 창의를 통한 다짐의 소리, 소금기 어린 선비들의 글소리, 선술집의 소란스러운 소음까지도 한 폭의 정지된 그림으로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또, 오준과 김질 등 고창이 낳은 효자들이 지금이라도 눈앞에 드러나 집힐 듯 고창이라는 특정 공간과 그곳 역사와 생활문화사가 시작품의 배경으로 설정됐지만, 한국인 모두의 고향, 그 의미의 전형성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잘 묻어납니다. 고창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그렸지만, 이는 곧 우리 모두의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처럼 ‘까칠하지 않고’ ‘까실까실 정이 메마르지 않았던’ 선조들이 생각나는 오늘입니다.
고흐의 ‘종달새가 있는 보리밭’이 현실로 다가오는 징표인가요. 종달새 몇 마리가 하늘 높이 떠 ‘파르르’, ‘뽀르르’ 목놓아 울부짖고 있습니다. 고개를 내밀고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릴 만큼 아찔하기만 합니다. 아니, 푸르다 못해 눈이 다 시릴 지경입니다. 이곳 마을의 형체가 부채 모양과 같다고 하여 ‘부채울’이라고 한 바, 그 바람이 지금 웰빙으로 불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요?
비바람에 찢겨져 흩어지느니 차라리 목을 꺾는 고창 사람들의 비장함에 이내 맘도 푸르게 푸르게 언제나 떨리며 흘러가는 오늘입니다.
보리 물결이 출렁이면서 상념에 찌든 마음도 어느새 맑아집니다. 파란 꿈으로 수를 놓고 있는 희망도 종달새 지저귐과 더불어 여물어만 가는, 여기는 고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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