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오정사는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에 위치하고 있다. 고창군에서 무장면으로 지방도 989를 따라 15km 정도 가서, 다시 덕림으로 4km 정도 더 들어가면 마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얇은 산을 배경삼아 조성된 곳으로, 앞에는 연못주변과 버드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이 정사는 조선 고종 33년(1896)에 세운 것으로 용오 정관원의 우국정신과 덕행을 기리고자 영정을 봉안키 위하여 후학들이 세운 사당이다.
정관원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자 장성의 기삼연(奇三衍)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투쟁에 공을 세운 사람이다.
용오정사 내에는 사당인 덕림사와 강당인 경의당 및 상운루 홍의재 등의 건물이 있고 담장은 지형을 이용하여 원형으로 둘렀다.
중앙의 강당에는 많은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다. 경의당기는 을해년 가을에 가선대부 경연참찬관춘추관 원임규장각부제학 연안 이병관이 글을 썼으며, 불가무차소(不可無此所 : 옹방강 서)와 구수산방(求壽山房 : 추사 서), 금성옥진(金聲玉振 :이강 글씨), 고산 행서, 율곡 선생 모부인 신사임당 신씨, 석담(石潭) 등의 편액이 붙어 있다.
사당인 덕림사는 다포계 건물로서 내부구조가 화려하며 단청이 정교하게 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앞쪽 기둥 4개는 주춧돌이 상당히 높게 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호박주춧돌이다.
사당 들어가는 상운루 삼문은 팔작기와지붕에 정면 3칸 측면 단칸으로 중앙을 고주로 받쳐 솟을집 형태의 건물이다.
솟을문에는 삼태극 형태의 그림이 3개 그려져 있으며 기둥은 사각형 나무를 사용하였다. 상운루기는 을해년에 청도 김수겸(金秀謙)이 근서했다.
상운루기를 보면 덕림사는 용오 정관원의 사당으로 바로 앞에 있는 문루로서 항상 서일상운(瑞日祥雲)의 뜻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밝혔다.
용오는 효우충의를 실천했으며 사림들의 정신을 숭상했다. 용오정사는 무장면 덕림리 지역에 있어 덕림사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후손인 덕헌 정익환은 서예와 문인화가로 활동하면서 고창 지역의 유림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덕헌 정익환은 고창 무장생으로 용암 송종철, 훈운 최순문, 해강 김규진에게 서도 및 사군자, 산수화를 사사했으며, 특히 묵죽 분야에서 장죽의 웅건한 필획을 구사하며 큰 선비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좋은 가문에 태어나 한학에 진력했고 명륜학원을 졸업하여 일찍 시문으로 알려졌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번 입상했다. 유도회 전라북도 본부장, 고창향토문화연구소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고창지회장 등을 맡아 유교 진흥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였다.
용호정사는 추사의 편액이 2점 있으며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의 글씨도 전한다.
추사와 옹방강의 편액을 제작한 것은 아마도 정익환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석학에 밝은 추사와 청의 옹방강을 글씨를 수집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고 견문이 필요한 부분이다. 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의 글씨가 걸려 있다.
그가 쓴 금성옥진(金聲玉振)이란 글자는 단아한 행서로 썼으며, 비록 작은 편액이지만 글자의 짜임과 구성이 심히 잘 맞는 글씨이다.
편액의 뜻은 풀이하면 금성(金聲)은 종소리를 의미하고 옥진(玉振)은 경(磬)소리를 나타내 즉 팔음(八音)을 연주할 때 먼저 종을 치고 마지막에 경을 친다는 뜻으로, 시종일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지덕을 겸비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 글씨는 일제강점기 때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 암울했던 시대에 시대의 변화를 꿈꾸기 위해서는 이곳 정사에서 새로운 일꾼이 나오기를 희망하면서 작품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전북문화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