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군 고창읍 율계리에 자리하고 있는 석탄정은 고창읍에서 도산리 보정 김정회생가나 고인돌박물관을 갈 때 중간에 위치한 정자이다.
석탄정 바로 앞에는 고창천이 흐르며 주변은 온통 논으로 둘러 쌓여있는데, 이곳만 동산처럼 우뚝한 곳에 터를 잡았다.
석탄정은 선조 14년(1581)에 석탄(石灘) 유운(柳澐)이 낙향하여 학문을 강의하기 위해 33세에 세웠다. 유운은 석탄정을 세우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상풍란(爽風欄)과 영월헌(迎月軒)현판을 걸었고, 뜰에는 반송을 심고 정자에서 좀 떨어진 앞 냇가에는 낚시터를 닦아서 향사우(鄕士友)와 더불어 풍월을 읊고 학문을 강론하니 그 풍모와 운치가 크고 넓어 당시의 선비들이 부러워하였다.
특히 정자 주변의 아름다운 노송과 느티나무들을 주변과 어우러져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엿볼 수 있고 사면이 탁 트여 시원한 경관은 여름과 가을에 꼭 가볼만한 곳이다.
정자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도리 밑에는 장혀를 받쳤으며, 홑처마로 마무리를 하였다. 마루 중앙에는 환도실이란 방을 만들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도록 했고, 방 뒷칸의 마루는 높은 누마루로 설계하여 밑에 아궁이를 만들어 겨울에도 불을 지펴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석탄정은 당시 문장가들이 일생에 한 번 와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유명한 정자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찾은 유명한 문장가들이 많은 흔적을 남겼는데, 당시의 판서(判書) 서헌순(徐憲淳)과 제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의 기문,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과 간재(艮齋) 전우(田愚) 등이 쓴 시액이 많이 걸려 있다.
석탄정 편액은 행서로 썼다. 힘찬 필치와 간결한 결구가 인상적이며, 낙관이 있어 읽어보니 소운거사(紹雲居士)라는 찍혀 있지만 누구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 글씨는 선비풍의 글씨로 강직하면서 자유로운 구성은 서자의 성정을 유감없이 표현한 편액이라 할 수 있다.
정자 들어가는 입구에는 유운유허비와 마당에는 석탄정상풍루건립사적비가 있고, 안에는 석탄정의 운치를 기록한 송병선의 석탄정중수기, 육세손 번이 퇴락한 정자를 다시 중수한 사실을 기록한 석탄정중수기실 등이 있다.
송헌순이 쓴 석탄정중수기에는 유운이 서울에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석탄(石灘) 위에 누워 있으면서 이곳 자연풍광에 흥취되어 자호를 석탄이라 하였고, 또 정자 이름도 석탄정이라고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유운이 고기잡고 나무하며 글과 술로 낙을 삼고 세상살이를 가벼이 하며 뜻을 숭상(崇尙)하는 풍류와 어울렸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이 가을에 고창읍성과 문수사 단풍나무를 둘러보고 고창의 고인돌유적비를 갈 때 꼭 들려봐야 할 곳이 바로 석탄정이다. 이곳에 갈 때는 명심보감 한권을 가지고 가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골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몇 구절 읊고 온다면 더 이상 마음의 보약이 따로 없다.
석탄정에서 가까운 거리에 유운의 후손인 현곡 유영선이 강학했던 현곡정사가 있다. 현곡정사는 현곡의 우국정신과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으로 그의 저술과 보관했던 문집 등은 전북의 절의정신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어, 이를 전북도 유형문화재 제 5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특히 석탄정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산에 있는 보정 김정회생가를 찾아가면, 선비들이 여가로 그렸던 사군자의 진수와 학문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또 지금까지 후손들이 이곳에 살며 불편한 가운데도 선조의 음덕을 숭상하면서 고집스럽게 종가를 지키는 미덕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가을, 고가의 기왓장에 떨어진 낙엽을 한 번 음미해 보기 바란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전북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