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차천로의 상량문과 한석봉이 쓴 편액이 지금 전한다면 한풍루를 설명하는데 아주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한풍루의 절경에 빠진 조선 명종 때의 인물인 임백호는 자주 이곳에 올라 호남제일이라 칭하고 무주 한풍루라는 시를 남겼다. 사실 임백호는 평안도 도사로 부임 받아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보고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노라”라는 시조를 지었다가 바로 파직 당했다는 일화가 있는 분이다.
오래된 누정에는 편액과 시판이 많이 걸려 있는데 이곳에는 한풍루 복구중건비와 한풍루 복구비(황인성)가 안에 걸려있다. 또 《동국여지승람》무주 누정조에는 성종 때의 성임(成任)과 중종 때의 유순(柳洵)의 시가 실려 있고, ‘한풍루재객관전(寒風樓在客館前)’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풍루는 객관(客館), 즉 관아(官衙)에 딸렸던 건물로 추정된다. 유순이 한풍루의 전경을 읊은 시를 옮겨 본다.
“시냇물은 맑고 얕아 장교를 비치는데, 다리 위에 누각은 높기가 몇 척은 되는 구나. 산 그림자는 구름 그림자를 따라 구르고, 물결 빛은 햇빛과 함께 흔들리네. 뜰 가득히 빛이 깔렸는데, 양쪽 언덕에 버들개지 솜털이 아직 날지는 않누나. 저녁이 되도록 난간에 의지하니 누구와 짝을 할꼬, 세 잔 술의 힘을 빌어서 억지로 붓을 휘둘렀네”라고 하였다.
즉 이 시를 보면 지금의 우체국 앞쪽으로 기다란 장교가 있었을 것이고, 양쪽 언덕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풍루는 무주의 자랑이요 전라도의 문화재였는데, 일제시대 민족말살정책에 의하여 무주공립보통학교 공작교실로 잠시 사용하다가 안국사 포교당으로 넘어갔다. 이후 일본인에게 매도하여 우체국사택을 지면서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양산팔경 강변으로 이건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을 맞이하여 무주 역대 기관장과 지방 유지들이 한풍루 복구를 추진하는 모임을 결성해, 1971년 원래 자리로는 옮겨 갈 수 없어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게 되었다.
한풍루는 한국의 슈바이쳐로 불렸던 지남 신현돈 전라북도 초대 도지사의 호를 따 지은 지남공원에 있다. 주변은 오래된 공적비와 넓은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고, 바로 옆에는 최북미술관과 김환태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전북문화재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