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주 산업으로 하던 시대에 가뭄은 천재(天災)였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늘, 용왕님께 치성을 올리는 일 밖에 없었다. 부안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곳은 성황산, 향교, 사직단, 객사, 웅연(熊淵: 곰소), 직소(直沼) 등이다
기우제(祈雨祭)를 가장 많이 지내는 장소가 성황사(城隍祠)이다. 성황사는 현재 부안읍내 서림공원인 상소산(上蘇山, 114.9m) 성황봉에 있었다. 상소산은 부안의 진산으로서 부안읍 동중리와 행안면 역리의 경계에 있었고, 예부터 고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산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주봉으로 성황사가 있는 성황봉(126m), 서남쪽으로 삼메봉(三山峰)이 연결되어 있다.
<상소산도(上蘇山圖)>에 보이는 서림정(西林亭)은 헌종 11년(1845)에 현감 조연명(趙然明, 1797~ ? )이 부안관아의 서쪽에 나무를 많이 심고 육각정을 세워 ‘서림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서림정은 고종 4년(1867)에 이만식, 고종 12년(1875)에 이헌영이 중수하고, 1893년 7월에 또 쓰러진 것을 조연명의 조카인 조용하가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그 자리에 재건하였다. 순종 3년(1909년)에 또 헐려 1930년에 다시 세웠다가 일제가 신사를 만들려 헐었으며, 1944년에 읍장 신기용의 주선으로 현재의 육각정을 세웠다.
한편 이 서림정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던 서림정계(西林亭禊)는 19세기 후반 이 지역 유림들이 조직한 것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시회를 열거나 상호 정보를 교류하였다.
기우제를 지냈던 장소로 향교(鄕校)가 거론되고 있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주가 보통 지방의 수령이나 유림이다. 향교에서는 석전대제(釋奠大祭)뿐만 아니라, 여제(厲祭), 기우제(祈雨祭) 등을 지낸다. 향교가 ‘관아의 서쪽 2리에 있다’라고 하고 있어서, 사직단(社稷壇)의 위치와 비슷해진다. 실제로 향교에서 기우제를 지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향교와 사직단이 가깝다면 아마도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지도서』 부안현조에는 사직단 또한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2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홍재일기』 1891년 5월 23일자 일기에는 “남문밖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가물어서 벌레가 크게 일어나(旱虫大發) 모[秧苗]와 잡초를 먹지 않은 곳이 없다.” 라고 하면서 사직
단의 위치를 남문 밖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던 장소로 거론되고 있는 곳이 계화도(界火島)이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계화도는 ‘관아의 북쪽 1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여지승람』 권34, 「부안현」, ‘산천’조에는 ‘계화도는 조수가 물러가면 육지와 연결된다’고 하였던 것처럼 조수의 때를 따라 걸어서 계화도를 오갈 수 있었다. 계화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면 아마도 계화도의 가장 높은 봉화봉에서 지냈을 것이다. 해발 246m의 봉화봉에는 계화도 봉수가 있었다. 고려~조선시대 전라우수영 소속의 봉수로서 여수 돌산봉수에서 출발한 봉수가 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이어져 남쪽 무장현 소응포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계화도 봉수에 신호를 보내고, 다시 북쪽으로 옥구의 화산봉수로 신호를 보낸다. 이것이 충청도를 거쳐 서울의 목멱산봉수에 전달된다. 한편 봉화봉은 한말 간재 전우 선생이 봉화봉 아래 양리마을에 이거(移居)한 후에는 망화봉(望華峰)이라고 명명함으로써 ‘유학의 학맥을 잇고자 하였던’ 자신의 뜻을 명칭에 투영하였다. 간재 선생은 한일늑약을 전후해서 왕등도에 나갔다가 고군산도 신시도를 거쳐 계화도에 정착하여 1922년 생을 마칠 때까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밖에 기우제를 지낸 장소는 직소폭포나 웅연(熊淵)이다. 직소폭포는 높이 30m이며, 변산반도국립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변산 8경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예부터 살아있는 용이 살고 있다고 전하던 곳이었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이다. 줄포에서 시작하여 곰소 앞바다로 이어지는 서해 바다용왕에게 기우제를 지내는데, 이곳이 곰소이다. 연(淵)이나 소(沼)에는 용신(龍神)이 깃들어 있는 곳이므로 비의 신, 농업의 신이라 믿는 용왕에게 직접 비를 축원한 것이다.
가뭄이 있을 때마다 기우제를 지내긴 하였겠으나, 유독 1892년에는 기우제를 많이 지냈다. 이미 1891년 11월 30일 감영과 본읍 수령이 방곡령을 발하였는가 하면, 1891년 12월 30일 감사 민정식(閔庭植)이 방곡령을 내릴 정도로 가뭄은 심해지고 있었다. 가뭄과 기근으로부터 지방행정관이 시행할 수 있는 최선의 지방민 보호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방곡령이다. 방곡령이란 행정의 강제력으로 곡물의 유통을 차단하는 일종의 경제정책으로 조선 고유의 용어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은 1889년 함경도와 황해도에서 있었던 방곡령 사건이지만 개항이후 방곡령은 1876년부터 1904년까지 적어도 100건 이상이 발생하고 있었다고 한다.
1892년 6월 5일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6월 8일에는 성황단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6월 12일에는 곰소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6월 21일에는 계화도에서 기우제를 지냈으며, 6월 22일 밤에는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6월 25일에는 갑자기 개암사 불상이 객사에 걸려있다는 기사가 눈에 띄는데, 윤6월 1일 무녀가 객사에서 화룡(畵龍)에 기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도 화룡은 용기(龍旗)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같은 날 계화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1892년 6월 가뭄은 1888년 무자년보다 심하였다고 한다.
기우제의 형태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상고할 만한 곳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김형주선생이 전하는 어릴 때의 기우제 풍경에 의하면, ‘마을마다 풍물 굿을 치면서 동내 사람들이 장작이나 보릿대 등을 짊어지고 석동산(席洞山)의 정상으로 모여 비 내리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풍물굿을 치면서 하느님 밑구멍을 달군다며 밤이 깊도록 모닥불을 피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렇게 가뭄으로 인한 피해가 극심해지는데도 오히려 세수는 포량미(砲粮米),20) 동포(洞布), 호렴(戶斂) 등으로 점차 늘어났다. 포량미는 1876년 이후 서양인들이 침입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강화도에 진무영을 설치하고, 경내에서 포수 3,000명을 뽑아 강화유수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였다. 그 비용을 대기 위해 삼남지방에 전세(田稅)를 부과하고 이것을 포량미라고 하였다. 『매천야록』 에는 이것이 수만 석에 이르고 ‘관리들이 이것을 핑계 삼아 농간까지 부렸으니 남도 백성들이 더욱 곤경에 빠졌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1890년 당시 포량미를 (결당) 2냥 2전 4복을 추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것 또한 매번 그 수량이 늘어갔다.
동포(洞布)는 기존에 군포를 대신한 것인데, 1864년 초에 대원군이 사대부를 포함하여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장정 한 사람당 2민(緡)씩 내게 했던 것으로 동포전이라고도 불렀다. 『홍재일기』 1886년 1월 10일자 일기에는 동포 징수에 대한 전령이 도착하고, 여기에 ‘매호 2냥 3전 3복씩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호렴(戶斂)은 집집마다 물리던 세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호역(戶役)이 있기 때문에 호렴을 거두는 것을 막았던 것이었는데, 『홍재일기』 1885년 8월 26일 일기에는 호렴이 ‘매호당 1냥 5전 1푼’씩 부과되었고, 9월 14일에는 여기에 다시 2전이 추가되는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같은 날 9월 14일 기사에서 기행현은 태인의 향회(鄕會)에 대한 일을 듣게 되는데, ‘대원군이 나오는데 청나라 사람의 치송전(治送錢) 1,000냥’이 태인으로부터 나왔고, 이를 위해서 각 호당 2전씩이 부과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관찰사의 공덕비를 마련하기 위한 비역전의 명목으로 하인이 다녀가기에 이르렀다.
[『홍재일기』 4책, 1886년 1월 24일]
1886년 1월 24일 구 완백 김성근(金聲根)의 비역전(碑役錢) 관련 일로 하인이 왔다 갔다.
김성근은 1883년 1월부터 1885년 2월까지 전라감사를 지냈던 사람이었다.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는 않아서 거론할 수 없지만, 1892년 어느날 향교에서 다시 ‘비역전(碑役錢) 회문(回文)’을 가지고 왔다. 이 내용을 보면 공덕비 마련비용과 이에 대한 분정의 정도를 알 수 있다.
[『홍재일기』 5책, 1892년 7월 18일]
(중략) 향교에서 하인이 비역전(碑役錢) 회문(回文)을 가지고 왔다. 순상(巡相) 민정식(閔庭植)은 덕치를 고루 폈으며[德洽化宣], 고을 수령 윤성구(尹成求)는 이설(異說)을 배척하고 유학을 숭상한 공덕[斥異崇文]이 있으며, 또 전 순상 이헌직(李憲식)의 공덕비, 3공비(三公碑) 가격으로 435냥이다. 그 사이 향회(鄕會)에서 65냥 7전, 회헌(晦軒) 선생의 시명(詩銘) 게판(揭板) 값으로 15냥이고, 합이 5백 15냥 7전이다. 그 중에서 본 고을에 18냥 2전 4복이 할당되었다.
민정식은 1891년 2월부터 1892년 8월까지, 이헌직은 1887년 4월부터 1889년 6월까지 전라감사를 지냈다. 그리고 윤성구는 1891년 5월부터 1892년 10월까지 부안현감을 지냈다.
윤성구는 현직에 있으면서 전 감사 2명과 함께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공덕비 마련을 명목으로 비역전이 거둬지고 있었고, 이것이 관찰사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각 면별로 할당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23) 조선시대 어쩌면 감사의 치적을 공덕비로 제작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엿볼 수가 있는 대목이다.
이상과 같이 두 번에 걸쳐 1866년부터 1911년까지 기행현이 쓴 『홍재일기』를 소개하였다. 『홍재일기』는 모두 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책은 『도해재일기』, 2책부터 7책까지는 『홍재일기』 라고 명명되었다. 『홍재일기』에는 기행현과 그의 집안의 일상뿐 아니라 부안과 인근 지역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에 대한 견문과 소문 등 19세기 후반기 지역상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홍재일기』에 기록된 이러한 구체적 내용들을 통해 격변하는 19세기 후반기 지역상과 한국사회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글쓴이 김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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