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을 보면 사방을 두르고 있는 비단이나 종이 등을 볼 수 있다. 그림이나 서책의 보관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종이와 비단 등으로 보강해주는 ‘장황’이다. 현대에는 ‘표구(表具)’라는 용어로 더 익숙하다.
배첩 명인 변경환(전북문화재 제62호 전주 배첩장)씨가 화사한 빛을 작품 가득 불어넣는다.
전주는 예로부터 전라감영이 자리한 까닭에 한국 배첩의 산실이다. 배첩(褙貼)은 글씨나 그림에 종이나 비단 등을 붙여 아름다움과 수명을 더하는 전통적인 서화 처리 기법을 가리킨다. '표구(表具)'는 일본식 표현이고, 중국에서는 '장황(粧潢)'이다. 이는 글씨나 그림에 종이, 비단 등을 붙여 액자, 병풍, 족자, 장정, 고서화 등으로 처리하는 전통 공예기술을 말하며, 지금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장황으로 부른다. 장황이란 미술작품을 장식하고 보존하기 위해 종이나 비단을 발라 꾸미고 나무와 기타 장식을 써서 족자(簇子)·액자(額子)·병풍(屛風)을 만드는 일로 현재 흔히 ‘표구’로 불리고 있다. ‘표구’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효구(表具)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사용해 온 것으로 조선왕실에서는 ‘장황’이라고 불리었다.
조선시대에도 왕실 전속 표구장들이 있었다. 장황 또는 배접장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당시에도 재료 하나하나에 들인 공이 엄청났다. 풀을 담은 항아리를 숯과 소금 등과 함께 땅에 묻어 썼다고 한다. 보존이 잘된 오래된 작품들은 작가의 혼과 함께 표구한 사람의 정신도 느낄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도화서(圖畵署) 소속의 궁중서화 처리를 전담하던 배첩장(褙貼匠)이 등장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국에서 상소가 올라오면 그것을 두루마리로 만들어 용상에 올리는 일부터 고서를 복원하거나 그림을 정비하는 일들을 했다. 궁중의 첩지는 물론 완판본 소설의 본고장, 전주이씨들의 본향이므로 이같은 것들을 입증하는 자료가 일부 남아 있다. 조선시대 장황과 배첩의 기록은 세종실록 108권, 성종실록 243권 등에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2017년 국립무형유산원 발행 전주의 무형유산), 또, 국역 ‘경기전의(2008년 전주역사박물관 발행)’를 보면 배접에 쓰인 물품들이 소개된다.
‘영정 후면 배접시 교농에 들어가는 물종과 수량’으로 밀가루 1말, 백반 5냥, 대왕풀가루 2냥 5전, 황밀 5홉, 후추 7냥 5전, 꿀 5홉, 비상 2냥 5점, 부용향 4냥, 소뇌 1냥, 조피나무 열매 2되, 용뇌 4전, 사향 1전 5푼, 흰 모시베 6자, 흰 명주 6자, 삼베 6자, 후유지 2장, 솜 2근, 가는 노끈 30파‘로 나온다. 이외에 배접 널빤지로 쓰일 물종과 수량, 아교 널빤지로 쓰일 물종과 수량, 배접할 때 쓸 물종과 수량 등도 기록, 전주엔 배첩 장인들이 살아있었음을 나타내지만 구체적인 이름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경기전의’의 기록을 통해 15세기(전주 경기전은 1442년 건립)에 이미 전주에 배첩장이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를 탄생시킨 본향이므로 이태조의 영정(국내 유일 국보 영정)이 자리하고 있어 배첩과 장황의 역사 또한 장구하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국보 제180호)’는 70.4㎝, 세로 23.9㎝의 크기이지만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인 문사들의 감상평까지 치면 전체 길이가 15m에 달한다. “절개가 견고하다가 급한 순간에 변하는 이도 있다…군자가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개를 배우는 이유를 알 수 있다고 했다…세상을 떠나 있으니 걱정이 없다는 심정으로 추사옹의 마음을 엿보다.”(장악진)
1845년(헌종 11년) 청나라 명사 장악진(생몰년 미상)이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를 본 뒤 남긴 감상평이다. 장악진 뿐이 아니다. 청나라 문사 16명과 조선의 오세창(1864~1953)·이시영(1869~1953)·정인보(1893~1950) 선생 등 4명까지 모두 20명이 ‘세한도’에 줄줄이 시쳇말로 ‘긴 댓글’을 달았다. 물론 20개의 댓글이 모두 ‘선플’로 도배했으니 ‘세한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만 하다.
두루마리 앞쪽의 바깥 비단 장식 부분에 있는 청나라 문인 장목(1805~1849)이 쓴 제목(‘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 추사의 제자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에게 받은 감상평을 한 권의 횡축으로 합장하고 표지에 붙이는 제첨(서화의 제목을 써서 표지에 붙인 길고 가느다란 종이조각)을 장목에게 부탁한 뒤 표구를 완성해 돌아왔다.
우리나라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흔히 오경석·유대치·박규수 세 사람을 꼽는다. 역관 오경석(吳慶錫·1831∼1879)은 북경을 열세 차례나 드나들며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에 시달리는 청나라의 모습을 보고 자주적으로 개화해야 한다고 깨달았던 첫 번째 개화파이다. 그는 1831년 1월 21일(음력)에 중인들이 많이 살던 청계천가 장교동에서 한어(漢語) 역관 오응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22세 오응현(1810∼1877)이 16세 나이로 1825년 역과에 2등으로 합격할 때에 1등은 이상적인데, 오응현은 친구 이상적에게 맏아들 오경석의 교육을 맡겼다. 오경석은 16세에 역과에 합격했으며, 아우들까지 모두 합격해 5형제 역관 집안이 되었다. 오응현은 북경을 드나들며 재산을 많이 늘렸다. 맏아들 오경석에게 2,000석 분의 재산과 집 두 채를 상속해 주었다고 한다. 장교동의 천죽재(天竹齋)와 이화동의 낙산재가 바로 그 집이다.
‘역매인형대인각하(亦梅仁兄大人閣下) 며칠 전에 나에게 인삼 값을 묻는 친구도 있고, 지화(紙貨)를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귀국의 서적과 비판(碑版)을 서로 교환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혹 그런 일이 있게 되면 너무 번거로우시겠습니까? 전에 보내온 서목(書目)을 돌려드린 뒤에, 또 어떤 친구가 청구하고 싶어합니다. 아직 구입하지 않은 것도 있으니, 서목 한 벌을 다시 부쳐주시면 시기에 따라 모두 구입할 수 있고, 또 포장비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잠연당전서’는 종경이라는 친구가 가져 왔는데, 어제 또 찾아와 “서점에서 파는 값보다 헐하다.”고 하면서 이 서목을 읽어보아야 한다기에 하는 수 없이 빌려 주었습니다. 옛날 비판(碑版)은 장황(표구)되지 않은 것을 사야 값이 헐하리라고 생각됩니다‘
범유경(范維卿) 같은 골동품상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교류했는데, 오경석이 북경을 왕래하며 기록한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에 골동 서화 구입에 관련된 기록이 많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아들 오세창이 지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일부 인용되어 남았을 뿐이다. 그는 골동서화를 구입해 감상만 한 것이 아니라, 훌륭한 글씨나 그림을 보고 연습하여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아들 오세창이 ‘근역서화징’이라는 불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것도 오경석이 수집한 골동 서화 덕분이었다.
“호남표구사의 이봉호, 삼성표구사의 정성열사장은 전주 표구사의 전설적인 인물들입니다. 요즘은 연락이 되지 않아 이들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전주 고을표구액자 박재승사장은 1973년 직업보도소를 통해 수예 작품을 활용해 병풍을 만드는 표구사를 차리면 밀어준다고 해서 이 일을 시작했다.
파주출신인 그는 용머리고개, 중앙돌파출소, 서신동 등을 전전하다가 1975년 전주 동문사거리에서 1993년까지 18년 동안 대성표구사를 운영했다. 이어 1994년 전북예술회관 근처에 ‘갤러리고을’을 운영하다가 1998년 문을 닫고 전주경찰서 뒤에서 고을표구액자점을 운영하고 있다. 전성기 때에는 직원이 8명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한다.
중앙표구사는 조중태, 조성호, 이형석으로 이어졌다. 이형석은 1974년 보천당표구사를 열었다. 앞선 1960년대엔 전주표구사도 있었다.
백합사는 김남도, 서재영, 변경환으로 맥이 이어졌다. 다가산방은 임종석은 대표로, 오종길은 목공, 서재영은 표구를 한 가운데 백당 윤명호화백이 그 자리를 지켰다. 다가산방 편액은 현재 변경환 배첩장이 갖고 있다. 1963년 신석정시인이 지어준 이름에 효산 이광열 선생의 붓글씨가 더해진 셈이다.
고석산방은 김대현이 1976년 지금의 점포 인근 전동에 개업했다. 광주 대인동에서 살던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전주에서 동양자수와 병풍공장을 하던 큰누나(김금숙)집에 몸을 맡기면서 표구 인생이 시작됐다. 김씨는 성심서화문화사(구 수도표구사)에서 실제 표구를 했다. 성심서화문화사는 중앙동1가 55번지에 자리했다.
그는 1963년부터는 매형(박문규)의 일을 거들면서 기본적인 표구 기술을 배웠다. 그의 매형은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서 대림사를 운영, 동양자수를 수출하기도 했다.
그는 다시 완산표구사를 하던 넷째 누나 집에서 기술자로 취직, 원목을 켜고 목공예와 배첩 등 전반을 배웠다. 고석산방이란 편액은 하석 박원규가 직접 써준 특이한 글씨체를 자랑하고 있다. 현재의 자리는 1981년부터 표구 일을 하던 곳이다.
솔화랑은 1970년대 서상언(1923~2008)대표가 표구와 화랑을 겸업해 시작, 1980년대말부터는 그 아들 서정만이 뒤를 이었다. 솔표구사는 구 전북대 치대 앞 부근이었으며, 10여년 동안 운영했으며, 2021년 솔화랑이 미술관으로 정식 등록했다.
표구보다 앞선 시기의 장황은 우리 선조들의 미적 감각과 문화적 수준 그리고 당시의 유행까지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도 아직까지 많은 연구 결과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전통 장황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복원된 전라감영에서 천자문 제본체험을 해보면 어떨까. 천자문 제본체험은 전통 제본방식인 오침안정법(책의 등 쪽에 다섯개의 구멍을 뚫고 무명실로 꿰 메는 방식)을 이용해 인공 접착제 없이 자연친화적으로 전통책을 만들어 보며 전통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아니 표지 장정 체험, 능화판 만들기, 염색 실습, 족자 및 병풍, 필갑 만들어보기, 비반과 종이 고르는 노하우 전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는 없는 일일까./이종근 저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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