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스토리

경성고무와 만월표 고무신

경암동 철길마을로 향했다. 길이 2.5의 철길은 신문용지를 만드는 제지회사가 원료와 완제품을 실어나르기 위해 1944년 만든 것이다. 매일 오전 두 번씩 화물기차가 오갈 때마다 철로에서 1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집에선 사람들이 뛰쳐나와 널어놓은 고추, 빨래 등을 걷어 가는 진풍경이 펼쳐지던 곳이다. 2008년 기차 운행을 멈춘 뒤엔 쇠락한 옛 마을 풍경을 그대로 살려 관광지로 변모했다.

골목 곳곳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불량식품이 즐비하고, 옛날 교복을 입고 사진 찍는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10곳이 넘는 교복대여업체에서 교복에 모자, 가방, 신발, 이름표, 완장 등 각종 소품까지 빌리면 7000, 전문 사진가가 사진촬영까지 해주면 1만원이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3층의 근대생활관에는 일제 수탈의 역사와 민중의 생활상이 실감나게 재현돼 있었다. 인력거꾼들이 손님을 기다리던 차방(車房), 당시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던 경성고무의 만월표 고무신을 판매하던 군산의 형제고무신방 등 재밌는 공간이 많았다.

1922년 자본금 규모 50만 원(현재가치 약 50억 원)의 주식회사로 커진 대륙고무는 9월부터 광고공세를 편다.

 

이왕 전하(순종)께서 어용하심에 황공 감격함을 비롯해 각 궁가의 사용하심을 받들며, 여관 각위의 애용을 받으며

 

라면서 왕가에서 신는 고무신임을 내세웠다. 그러자 만월표 고무신은

 

이강 전하(의친왕)가 손수 고르셔서 신고 계시는

 

신발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고종의 둘째 왕자이자 순종의 아우로, 반일 의식이 강했던 의친왕을 모델 삼아 민족감정에 호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이만수 사장이 설립한 경성고무공업사는 한국인 기업가에 의해 설립된 유일한 중소기업이었다고 한다. 경성고무는 해방 이후 '만월표'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만월표'가 최고 인기 제품이었다. 이때 주 생산품은 '깜둥이 신발'로 알려진 검정 고무신이었다.

검정 고무신은 주로 짚새기를 신고 다니던 일반 한국 서민들에게 대단한 제품이었고, 그 인기는 시들 줄 몰랐다고 한다. 경성고무는 점차 기술 수준을 높여 제품을 다양화해 나갔는데, 나중에는 표백 기술을 적용해 흰 고무신을 생산했고, 검정 운동화에 이어 하얀 운동화도 생산했다고 한다.

고베에서 군산에 온 것 중의 하나가 신발산업이었다. 1920년대 무렵, 서울에서 친척 찾아 군산에 내려온 이만수는 고무신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 조선의 산물인 가죽신, 나막신, 짚신에 비해 고무신은 획기적인 제품이었다.

비올 때나 눈올 때도 상관없이 신을 수 있었고, 잘 헤어지지도 않았다. 장사가 잘되니, 이만수의 신발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해방되면서 미군정청은 일제 기업을 한국인들에게 불하했다. 이만수는 미군정의 적산불하(敵産拂下) 당시 군산의 신발공장을 확보하게 되는 데, 바로 경성고무다.

경성고무는 만월표 신발을 생산, 크게 성장해 갔다. 하지만 경성고무는 화재 등으로 흔들렸고, 경영주의 의지 부족으로 표류했다. 결국 SK에 넘겨진 경성고무는 1985년 해체되고 말았다. 현재 경성고무가 자리잡았던 옛 군산역 앞 부지에는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뒤돌아 보면 아쉬운 일이다. 일제시대부터 군산과 함께 신발산업 중심지였던 부산과 경남에서는 아직도 신발기업들이 살아 지역 경제의 한 축을 이루고 있고, 신발 산업은 무한히 번창할 수 있는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