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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전주 간납대

 


이기발이 사간원 헌납 지내 불리워진 전주 간납대

 

전주 한옥마을 인근 간납대(諫納臺) 마을 자투리땅이 초화류와 수목이 어우러진 멋진 정원과 쌈지 텃밭으로 탈바꿈된다. 전주시농업기술센터는 간납대 마을 주민과 함께 오는 10월까지 마을 내 방치된 자투리땅에 거점 정원과 소정원 10곳, 쌈지 텃밭 2곳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옥마을 자만동은 기린봉과 중바위를 양 어깨로 하고 북두칠성(완산칠봉)을 향해 긴 목(발산, 조선조 이왕가가 일어난 산이라고 해서 발이산으로 부름)을 빼어 머리 숙여 거북이에게 북두칠성(만유의 근본, 풍수는 옥황상제라고 함)에게 얼마나 주고 싶은 게 많았겠냐는 이야기가 전한다. 거북이는 양 어깨, 목덜미 부분을 의미하는 만큼 후백제 견훤왕성이 자리한 곳이며, 목 왼편이 자만동으로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이안사)의 태생지이며, 조선의 개국 공신 최담이 말년에 후학을 가르친 곳이며, 명필 이삼만이 공부한 곳이다. 그리고 목 오른편(자만동의 발산 너머 반대편)이 간납대(현 천주교 전주교구청에서 군경묘지까지)로 전주8현(賢)으로 알려진 운암(雲岩)형제를 낳았던 곳이라서 더욱 흥미롭다.

전주 한산이씨(韓山李氏) 가문은 인조 때 인재로 이기발(李起渤;1602∼1662), 이흥발(李興渤), 이생발(李生渤) 3형제를 들게 된다. 이들은 석계 최명룡(崔命龍)의 문인으로 3형제가 사마시에 동방(同榜)으로 급제했다. 모두 문과에도 급제를 한 바, 기발과 생발은 동방으로 급제를 한 사람으로, 당시 전주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기발은 형인 흥발과 함께 청주에 진주,남하하는 호병(胡兵) 아홉 급(級)을 목 베고, 남한산성을 사십리 거리에서 바라보며 달려가던 중 강화한 소식을 듣고 비분방개 한 끝에 의병을 해산했다. 이듬해 벼슬을 그만둔 그는 고향에 돌아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아니하 높은 돈대로 올라 북쪽을 요배(搖拜)했다. 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때로는 적취정(績翠亭) 골짜기(구 영생학교에서 국군묘지 사이로 속칭 낙수정골)에서 방황하고 애국충정으로 제자를 길러내면서 우울한 일생을 보냈다. 이기발이 사간원 헌납이라는 벼슬에 올랐는데 병자호란 이후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고 해서 사간(司諫)의 ‘간(諫)’자와 헌납(獻納)의 ‘납(納)’자를 따서 간납대(諫納臺)라 했다고 한다.

간납대는 전주시장을 지냈던 이주상 씨의 부친인 이석한 씨의 소유였다고 한다. 남문교회 강홍모 장로는 전라선 철도로 인해 시내와 단절되어 쓸모없는 산으로 보이는 이곳에 이석한 씨의 협조로 영생학원 인가를 얻었다.신동아학원은 공업전문대학을 전주대 옆으로 이전하고 간납대를 처분했으며 현재 천주교 전주교구청이 들어왔다.

향토학자 고 이철수선생의‘완산승경’이란 책자를 보면 32경 가운데 간납자규(諫納子規)가 있다. 이는 ‘간납대에서 들려오는 두견이 울음소리’를 말한다. 나를 애무하는 바람에 대잎마다 달이 뜬다. 이승에서 못다 푼 맺힌 한, 두견새 되어 대숲 끼고 간납대 동천(洞天)을 따라 울부짖는다../이종근(삽화 정윤성 새전북신문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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