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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강암서예관을 지나 남안재 가는 길에['당신에게 전주'] <28>선비의 길

강암은 역사다. 1995년, 서예가 강암 송성용 회고전을 마련한 동아일보는 전시 타이틀을 그렇게 내걸었다. 강암은 서예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존재라는 찬사에 다름 아니다. 강암에 대해 얘기하려면 간재 전우(田愚)라는, 전주 한옥마을 출신의 조선 마지막 유학자까지 거슬러 올라야 한다. 간재는 고종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지만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일합방이 되자 옛 성현의 말과 함께 홀연히 서해로 떠나갔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로나 가야겠다.(논어의 '공야장'중)' 간재는 서해 여러 섬을 떠돌다가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했다. 그리고 그 섬 이름을 성인의 도학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바꾸고(繼華島), 평생 학문에 힘쓰는 한편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 제자들이 무려 3천, 그들 중 대표적인 세 선비가 향교 근처에 모여들어 오늘날의 한옥마을을 일구었다. 금재 최병심, 고재 이병은, 유재 송기면으로 이들을 일러 삼재(三齋)라고 한다. 일본 상인들이 중앙동에서 득세하자 그들 삼재와 제자들은 경기전과 향교가 있는 교동과 자만동 일대, 오늘날의 한옥마을에 한옥 집을 짓고 저항하듯 모여 살았던 것이다.

유재 송기면은 한옥마을에 와서 살지는 않았다. 고향인 김제 백산의 여뀌다리 마을로 돌아가 요교정사(蓼橋精舍)를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의 아들만큼은 한옥마을 고재 이병은의 남안재로 보내 학문을 익히도록 주선했다. 그가 강암 송성용이다.

강암은 스승의 셋째 따님과 결혼해서 한옥마을 남천 천변에 집을 짓고 살았다. 1999년 작고할 때까지 흰 한복만을 입었으며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채 꼿꼿한 자세로 글을 읽고 사군자를 치고 글씨를 쓴 유학자, 서도가였다. 그가 평생 보발과 한복을 고집한 건 부친인 유재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단발령에 대한 항거였다. 강암이 역사가 될 수 있었던 첫째 이유는 그의 이러한 선비정신 때문이리라. 강암의 글씨는 단아하고 예쁘다.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 덕진연지(德津蓮池) 같은 현판들에서 그 정제된 서예의 맛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하지만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강암서예관을 찾을 일이다. 그곳에 강암 서예의 진면목이 전시되고 있다.

거기서 양사재, 향교, 그리고 남안재로 가는 길, 그 길목은 전주 선비와 유생의 길이었다. 향교를 오가던 어린 유생들이 공자왈맹자왈 웅얼거리고, 스승께 회초리를 맞았다고 찍찍 울고, 일본인들이 파는 사이다를 사 마실까 말까 엽전만 만지작거리고, 일본 처자들은 기모노 안에 속속곳을 입네 마네 쑥덕거리며 논쟁하고, 만년필이라는 쇠붓이 나왔던데 참말 만년은 쓰겠더라고 신기해하면서 걸었을 길…. 그게 강암에게는 처가댁 가는 길이기도 했으리라. 강암 가문은 전주에서 활짝 꽃을 피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남 송하철은 전주시장을 역임했고, 4남 송하진은 전주시장을 거쳐 지금은 전라북도 지사다. 강암이 한옥마을을 처음 일구었다면, 그 한옥마을을 전주시장 시절에 기름지게 가꿔 만화방창하게 한 이가 송하진 지사기도 하다. 그리고 2남 송하경은 성균관대 유학대학장을 지냈으며, 고려대 문과대학장을 역임한 3남 송하춘은 소설가로 필명을 떨치고 있다. 그가 바로 내 소설의 은사시다. 마치 은사시나무 같던…. 그래서 나 또한, 저 간재로부터 이어져온 거창한 사단(師團)의 말석 한 자리나마 은근슬쩍 꿰찼다. 물론, 내가 거기에 끼어 있는지 어쩌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찍이 맹자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라도 향교 근처로 옮겨 살아야 하나?/이병천.소설가(삽화 김충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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