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지명의 유래
전주(全州)의 옛 지명은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시대에는 완산(完山)이라 하였는데 마한국명으로는 원지국(圓池國)에 이른다.
전주라는 지명 사용은 서기 757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경덕왕(景德王)16년부터이다.전주 완산의 비명 원의를 볼 때 "완(完)"과 "전(全)" 은 모두 "온전하다"는 "온"이란 우리말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완"은 그 음도 "온"의 근사음으로서 "완"이란 글자는 "온"이란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전주지명의 의미이에 보면 "전주", "완산"의 옛 지명은 "온·다라 "였음을 알 수 있다. "온" 이란 뜻은 첫째, 온전하고 흠이없다.
둘째, 뚜렷하고 갖추어져 있다.
셋째, 순수하고 티가 없다.
넷째, 모든 것이 어우르다.
등의 뜻이 담겨있다. 특히 온이란 말은 완, 전자 이외에도 원(圓), 온(溫), 백(百 - 옛말온)등의 한자 소리나 새김을 빌렸다. 삼국사기 백제기 온조왕(溫祚王) 조를 보면 백제가 마한 땅을 어우르자 줄기차게 항거했던 원산성(圓山城)도 바로 이곳이며 온조왕의 온 자도 실은 온임금이란 뜻이 담겨있다.뿐만 아니라 백제(百濟)의 백(百)자도 온을 빌어 쓴 글자로서 백제는 온 다라를 적은 것으로 실은 "완산"이나 "전주"와 같은 뜻이다.이말은 "온겨레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다.결국 "온 다라"는 온겨레가 온 뜻을 어울려 온 힘을 합하여 거친 바다의 풍파를 헤쳐 온전하고 흠이 없으며 그리고 뚜렷하게 모든 것이 갖추어진 나라를 세우자는 이상이 담겨져 있다.
옛지명유래
중앙동
관풍각, 관풍각터, 망성동, 부서면, 비장청터. 비창청, 선화당터, 선화동, 수비대청터, 안영신삼, 응청당, 응청당터, 이계리, 일계리, 종동, 진영터, 청사당, 팔달루, 팔달정
다가동
대동, 부서면, 사계리, 삼계리, 서문밖장, 서문성외장, 서인동, 성밖장, 소금전다리, 약전골. 청석동
고사동
고사정, 백규방, 백응만, 백진석, 백행량, 부북면, 부서면, 삼리, 오거리, 올거리, 일계리, 일리,전주어채시장
경원동
경동(경원동2가), 대정정4정목, 대정정5정목, 동문사거리, 매월당터. 매월루터, 문화동(경원동1가), 부동면, 부서면, 사계리, 삼계리, 육계리, 이계리, 일계리. 작정터, 중안간선, 진남루터, 진북정터, 청수정터, 청연당터, 풍패관, 현무지터, 화원동(경원동3가), 화원정(화원동)
풍남동
경기전, 경기전별전터, 관선동, 관선암, 동인동, 부동면, 부처당이, 부처댕이, 실록각터, 어용전, 오계리, 육계리, 은행나무, 은행목, 이계리, 전주사고터, 진전
전동
개골목, 공북문루(북문),구석리, 구석동,남계동, 남문밖장, 남밖거리, 남밭거리, 남창터,대화정,떡골목, 명견루(남문), 방천동,방천리,부남면,부동면, 부서면, 비석거리, 사계리, 상서문(서문), 성당앞사거리, 설대전다리,쇠장터, 싸전다리,완동문루(동문), 은방거리,이계리,일계리, 중차문(북문),판동문(동문), 패서문(서문)
교동
간낙대, 간납대, 감나뭇골, 구름다리, 구석리, 낙수정터, 남고사, 남천교, 남천석교, 노루목, 동고사, 동고산성터, 목조구거지, 목조유허비, 박진, 박진은, 발대산, 발리봉, 발리산, 발산, 부남면, 사계리, 사대모퉁이. 사마제, 삼계리, 생교골, 서고사, 성황사, 수박등, 승암사, 승암산, 승암산성터, 안경다리. 양사제터, 오목대, 옥류동, 옥류천, 육오정, 이목대. 임목대. 자만동, 자만동, 장군수, 중바우, 진북사, 참의정, 천석교, 청수정, 최담, 한계리, 한뎃골, 한벽굴, 한벽당, 함벽루, 향교골, 호운석
노송동
기봉리, 동노송동. 동정리, 부동면, 부북면, 삼리, 신동리, 오계리, 용전면, 육계리
태평동
공북루터, 공북정터, 물방아거리, 부북면, 비석가, 비석거리, 사리, 살리, 상생리, 상생정, 쌍물방아거리, 이동면, 전주역터, 탱자나무동네
중노송동
기린봉, 기자촌, 노송정, 동노송, 마당재, 무랑말, 물앙말, 물왕멀, 북노송, 서낭댕이. 솟다배기. 솟대배기, 수왕촌, 여단지, 인봉리, 인봉지터, 일륙정터, 종광대
남노송동
관선교, 관선암, 노송정, 마당재, 법우사, 부처당이, 참나무정, 참나무정리
완산동
검두봉, 곤지리, 곤질리, 남화산동, 매곡, 매곡교, 매골, 물터, 백운정, 부남면, 산제당, 산천, 소꼬랭이, 솔가지전거리, 쇠전다리, 쇠전터, 수돗골, 연죽교, 오계리, 완산정, 용머리고개, 우전터, 원각사, 은속리, 은송리, 장다리, 중완산동, 청학루, 초록바위, 칠성사, 칠성암, 투구봉, 호래벗골
서완산동
강감찬, 군자정, 기령당, 남천교, 남화산동, 반송산, 부처댕이, 빙고리, 서원너머, 서천교, 선너머고개, 선밧장, 소금전다리, 소반솔산, 염전교(완산교), 용두, 용두치, 용두현, 용머리, 용무덤, 이사철, 초립동
서학동
공수내, 관성묘, 관왕묘, 관제묘, 남고모종, 남고사, 남고산, 남문터, 남원가로, 남장대터, 남천교, 남천석교. 노루목, 두무소, 뒷냇갈, 만경대, 망경대, 미륵불골, 반석리, 병풍바우, 보광재, 부남면, 북장대, 불정사, 사정리, 산성동(산성리), 산성별장관, 새다리, 서정, 서학동 신흥부락, 억경대, 장항치, 좁은목, 천석교, 학봉리, 학봉사, 화장터, 흠때샘
서서학동
곤지산, 공기골, 공수내, 공수리, 남고교, 남문밖장, 남문성외장, 남밖거리, 노루목재, 미럭댕이, 미전교(전주교), 바우배기, 봉산이씨터, 불못골, 사정터, 싸전다리, 용꼬랭이, 용의초리, 읍양정, 장성배기, 장승백이, 초록바위, 흑석골
중화산동
가마귀골, 강당재, 강당치, 근영마을(뒷골), 남화산동, 다가교, 다가산. 대궁교, 뒷골(후골), 뒷골방죽, 따박골, 매넘어, 메너머(산월), 부남면, 부서면, 북화산동, 사마교, 사직단, 산너머고개, 산월, 삼마솥다리, 서완산동, 서원너머고개, 선너머, 신촌, 신한교, 신화산리, 쌍용리, 안행리. 오계리, 요한대, 우림면, 유연대, 육두구, 은송리, 이동면, 주동리, 중산(사거리), 중산공동묘지, 중산동, 지하촌, 천양정. 충혼탑, 한들, 화산, 화산공동묘지터, 화산서원, 회한리, 후곡
평화동
감나뭇골, 감내리, 고깔바우, 구석골, 구석동, 구석리, 구화리, 군자동, 군자리, 꽃밭정리, 꽃밭정이, 꽃샘, 난전면, 네거리, 대정리, 덕적골, 덕정리, 도장골, 돼지명당, 맏내골, 맛내골, 매두리, 묘동, 묘동, 묘동제, 문정, 문정공동묘지, 문정리, 문정제, 보광사, 보광사터, 보광재, 보광치, 부남면, 부평리,사가리, 산정, 산정리, 상구리, 상평리, 새동네, 석불, 석불리, 석불제, 섬배미, 수창리, 수택리, 신기리, 신성리, 신정리, 신촌, 양지뜸, 옥녀봉, 옥녀제, 욧골, 용아리, 용와리, 우전면, 원문정, 원장천, 은송리, 작지동, 작지리, 장교리, 장성배기, 장승백이, 장천, 장천리, 점촌, 정자나무, 중평리, 지곡리, 지서리
서신동
가래여울, 갈마골, 갈마음수형, 감나뭇골, 고사평, 고삿들, 구석뜸, 당산모랭이, 덕룡리, 덕신리, 바구멀, 사탄, 삼거리, 상산, 상산리, 새터, 서산, 서신, 서신리, 서신정, 시곡, 신기, 신덕, 신정리, 신포, 신포리, 쌍룡리, 장고개, 잿뜸, 전룡, 전룡리, 주막촌, 중산리, 추탄, 파구리, 하산
삼천동
가용리, 가장골, 거마들, 거마평, 거미줄, 계룡산, 계용리, 구석뜸, 난전면, 농개, 농포리, 능내, 능내리, 능안, 도리리, 떡전거리, 만세리, 만수동, 모개, 모과리, 모래개, 모퉁이방죽, 범안굴, 복흥리, 비아동, 산정리, 삼동리, 삼산, 삼산리, 삼천리, 상거리, 상거지, 상차리, 석산, 석산리, 석산치, 선인보으 세내, 성자리, 손씨열녀문, 송정, 숙호재, 숙호치, 숯재, 시내, 신성, 신성리, 쌍자동, 쌍자리, 쑥고개, 안산리, 안장봉, 오릿골, 용개, 용덕리, 용산리, 용포, 용흥리, 우묵리, 우전면, 이수보, 이흥발묘, 자고실, 장동, 장동리, 장자동, 장재울, 정동, 정동리, 중인리, 천잠봉, 천잠산, 탄치, 태평리, 하거리, 하거마, 하차리, 함대리, 호동, 호동리
효자동
구룡리, 구룡방죽, 기러기배미, 김삼룡농장, 남성이등, 농소리, 능소, 동거리, 뒷용수물, 마랏방죽, 마산, 마전, 마전리, 만산리, 만절리, 만절방죽, 만지고개, 묵고실, 묶어실, 바우배기, 반송정이, 범바우, 범암리, 봉강리, 봉곡, 봉국, 봉국방죽, 새내다리, 새터, 서곡, 서우리, 서중리, 석골, 석산, 석산말, 섯골, 성곡리, 소태정이, 소태정잇들, 송정, 송정리, 수박골, 수양산, 순실이방죽, 숫골, 쉬약산, 슷골, 슷골방죽, 신룡리, 신리, 신봉리, 신주, 신주리, 신중리, 신평리, 쌍룡동, 쌍룡리, 쌍용리, 안용수물, 안행리, 앞내, 여뫼, 여뫼봉, 여수묘, 오두리, 완풍리, 용산리, 용소, 용암리, 용호제, 용호지, 이동교, 이동면, 이십평등보, 잣골, 장개남효자문, 장성배기, 젯골시암, 진날, 척골, 척골방죽, 척동, 척동리, 척수배미, 천장봉, 초전리, 큰다리, 태평리, 한절리, 함대리, 호산리, 호암리, 홍산, 홍산리, 효자리, 후곡리, 흥산리
서노송동
경전북선, 광궤, 반다뫼, 반다미, 반되뫼, 새동네(화장터), 새마을, 신촌, 여단터, 협궤, 희망촌
진북동
검암교, 남포간, 도토리, 도토리골, 도토리골다리, 돛대골, 만성정터, 모래내다리, 범바우, 부엉바우, 부엉바우절(진북사), 북고사, 북문교, 사거리, 상생교, 상생정, 서중앞다리, 서진교, 소화정, 수구막, 수리, 수마을, 숲정리, 어은골, 어은교, 엉골, 응골, 이동면, 잉어바우, 장대평, 재건교, 주동, 죽수정터, 진밥들, 진밭들, 진밭더미, 진북교, 칠성암
인후동
가장동, 가장리, 가재미, 괴바우, 구수다리, 구숙사, 구총목, 구총항, 국대부인골, 굴총목, 내동, 노서하전, 달룬개재, 달른개, 도당산, 도덕골, 도덕리, 도독골, 도마다리, 도채비골, 독보, 동검암동, 득보, 마당재, 명지골, 명지동, 모래내다리, 무삼이방죽, 무삼지, 무삼혈, 무제등, 방죽거리, 방죽목, 밭명지골, 부북면, 비단리, 사천, 사천교, 사천리, 새동네, 새터, 새터모탱이, 서낭댕이, 석보, 선왕당, 선황당, 신기, 신숙사, 신지, 심방목, 심방죽, 심지, 심한국대부인, 아래비단리, 안골, 안골방죽, 안골새터, 안명지골, 와우형모퉁이, 외면지리, 외명지리, 용진면, 이동면, 이동면공동묘지, 인후, 장성배기, 장유, 적샛들. 진구렁, 진버들, 채빈골, 초분곡, 팥죽뱀이, 표석리, 하평, 한뱀이, 한범리, 함버리, 호래비날등
덕진동
가련산, 건지산, 고깔봉, 노구봉, 대지동, 대지동, 덕룡리, 덕암리, 덕중리, 덕진룽, 덕진지, 도천봉, 도치묘, 뒷방죽, 들사평, 떡전거리, 북검암동, 사평, 상가리, 서검암동, 서낭당이, 선바우, 심금동, 연화동, 용산평, 용수, 자래꼬태기, 장구봉, 재경골, 재경꼴방죽, 전주우시장, 조경단, 조촌면, 추천다리, 탱기동, 하가리, 학동리, 화수각
금암동
개다리보, 검암, 검양, 경덕정, 공알바우, 구암리, 구암산, 구암정, 내명지리, 덕진정, 두진리, 뒷검암리, 뒷금다리, 매봉산, 바위배기, 부북면, 사리, 사천리, 사평리, 상가리, 소화정, 송정리, 수리, 앞금다리, 어른리, 외명지리, 용산리, 용산평, 용쏘, 응봉산, 이동면, 장승배기, 조촌면, 주동리, 칼바위, 홍두께날. 휴암리
팔복동
가래내, 가리내, 감천리, 감투바우, 감현리, 구석배미, 구주리, 국골, 금액보, 김원묵, 너벙바우, 덕촌리, 동곡리, 동산리, 매화동, 매화리, 반룡교, 반룡리, 버드랑죽, 비석나리, 비석날, 상리, 신교리, 신복리, 신행리, 여쉬바우, 여의리, 예암리, 와룡보, 용골, 용산교, 용산평, 용쏘, 유상리, 유제리, 조촌면, 주택촌, 지앗골,지장골, 천만보, 추천, 추천교, 추천원, 팔과정, 학상리, 활세골
우아동
갓바우, 관암, 관암리, 광터골, 기린리, 막은담이, 막은담이재, 무개골, 무능, 무릉리, 문수굴, 반암리, 방아다리, 배동지, 백동리, 백동제, 벼락바우, 부채집골, 산전리, 새전리, 새터, 색장치, 서낭재, 석소, 석소리, 송원창, 송준호, 숯재, 시피랭잇골, 신기리, 신덕리, 신동리, 아래유황소, 아막실, 아중리, 아중저수지, 아하리, 안덕교, 안덕원, 안두원, 안둑원, 안무수굴, 여덟마지기들(보), 왜막실, 왼순암, 용계리, 용진면, 우방리, 원수나비, 유활수, 은행다리, 인교리, 일출암, 잣골, 장자동, 장재동, 재전, 재전리, 잿골, 초포면, 최씨열녀비, 친무골, 칡골, 큰골날맹이, 탄치, 한범리, 흑방산
송천동
고내, 고천, 고추터, 구와동, 글내, 눈소고개, 덕중리, 동덕골. 동역골, 두간다리, 미산, 발단, 발단리, 방애시암, 뱀굴, 버들다리, 붓내, 사곡, 사근, 사금리, 사당골, 산제시암, 수상동, 시동, 시천. 시천리, 신기리, 신동리, 신풍리, 신풍보, 신학암, 안팔학골, 앞내, 오송리, 오송정, 와룡리, 용소, 용소리, 용흥리, 원소물, 월평리, 유교, 유교리, 장군봉, 팔학골, 필천, 필천보, 필천제, 학암, 한내, 호박밭, 회포면
호성동
가동, 감정골, 고당리, 구성보, 농은리, 다경리, 대악보, 도촌, 동산리, 동살매, 만수동, 만수리, 방죽안, 배미실, 배암골, 범바우, 봉바우, 봉암, 불탄뫼, 사거리,
사두곡, 사리, 사주리, 삼말, 상남뜸, 상중리, 새보, 새터, 서당골, 서주리, 소양천, 송전리, 송천, 숨멀, 신동리, 신동산, 신봉리. 신성, 신정리, 신주리, 신중리, 신흥리, 아리랑고개. 오매, 오산리, 용주리, 용흥리, 우와리. 이리(배미실), 자래바우, 자보, 재내리, 정주리, 제내리, 중보, 중어리, 중오리, 초당, 초촉면, 초포공동묘지, 초포면, 텃골, 한사월, 행나무뜸, 행주리. 호암, 화암리, 화정리, 회포면
전미동
가매소, 갯드랑다리, 무근들, 묵은들, 미산리, 백석, 백석치, 산천, 서낭댕이, 소양천, 숨달, 숨멀, 신개보, 신기촌, 신미산, 신봉리, 신촌, 연방죽, 연봉내, 연봉리, 월곡, 월곡리, 월평리, 은평리, 이효자문, 장고개, 전달리, 전당리, 주정리, 중옥가래, 진기, 진기리, 진조리, 초포면, 화리, 회룡리, 회포면, 흰개보
조촌동
가르곳, 가장고래, 간리, 감상리, 갓골,, 강좌, 강흥, 걸다리, 검바들, 고라들, 고잔, 고잔구강, 고잔리, 고창배미, 곡천, 공덕면, 광천보, 괴뚜래배미, 구다리, 구렁목, 구례새터, 구복리, 구비내, 구사동, 구석논, 구석뜸, 구암리, 구중리, 굴신, 깃대배미, 낡은다리, 남방주골, 남일면, 남전리, 노새봉, 당산, 당산나무, 대성리, 대성리, 대추나무다리, 대풍정이, 대흥리, 도덕, 도도, 도사들, 독다리, 독정현, 돌개, 돌팍재, 동간리, 동개, 동계리, 동리, 동반월, 동자포리, 되깨거리, 됭개, 두렁배미, 둑령, 둥둥바우, 뒤멀앞, 뒷도, 득룡교, 들똥이, 들무시구부, 똘갓논, 마산, 만경군, 만경군, 망개, 망근대봉, 망대봉, 망우제, 매답이평, 맥상, 모촌면, 목연면, 목천리, 무송정, 무지개다리, 문덕산, 바구리배미, 반월, 반월시, 방아다리, 방지들, 백구, 백구정, 백아래평, 봉산, 봉상면, 부봉리, 부용, 부지당골, 북당터, 북이도면, 비석날, 삼덕리, 삼덕보, 삼덕산, 삼정, 삼효각, 상도, 상모, 상신, 상회리, 샛강다리, 새터, 새터골, 샛들, 서금매, 서반월, 석담, 선어보, 섬뚝배미, 성낭댕이, 성덕리, 소반터미, 소시랑골, 소안, 소안방죽, 송장배미, 송정, 시대보, 시재들, 신기촌, 신덕, 신덕리, 신모, 신복, 신복구강, 신복리, 신성, 신성리, 신오리, 신오산, 신유강, 신정, 신정리, 신지리, 신천, 신촌면, 신평리, 신풍리, 신화리, 신후리, 신흥리, 실리, 쌍강, 쌍강교, 쌍강리, 쏘안, 아동이다리, 아동이들, 아홉구배미, 알갱이, 양병둠벙, 양지뜸, 연등다리, 연등들, 연등못, 연등보, 영락정, 영상, 영천, 오산면, 오지제, 왈답, 외가전, 용논, 용머리구부, 용수매, 용지면, 용처골, 우담, 원님터, 월봉, 월연, 월포, 유강, 유기둠벙, 유천, 유편리, 율포, 음지뜸, 이북면, 이작리, 이현웅효자문, 자래미, 작은번지, 작은통배기, 장승배기들, 장신, 장애샘, 전리, 전뫼봉, 절강자리, 절터, 절터골, 정자나무, 제내, 제안배미, 조랑개다리, 중모, 중평리, 중평리, 증리, 지래배미, 진경수보, 진논평, 진보, 창산, 창산, 춘두똘, 춘두보, 춘두평, 춘포면, 칠정리, 큰통배미, 팔동산, 팔산, 팔산보, 팔산이새암, 팔산평, 펄샘, 평자들, 하신구강, 하신리, 하신지, 학동, 화전, 화죽, 활새배미, 회천, 회화리
동산동
감수리, 감정, 감천, 고랑, 고랑리, 구상, 구정, 구주, 구중, 굴신, 남상, 내동, 냉정, 노강, 대천리, 대초, 대흥, 덕룡, 덕성, 덕중, 덕촌, 동곡, 동산, 동산역, 두현, 만성, 매화, 반룡, 반월, 방초, 부동, 사금, 삼덕, 상가, 상리, 상신, 상평, 서당, 성곡, 성덕,수곡, 시천, 신감, 신곡, 신교, 신기, 신동, 신룡, 신리, 신복, 신성, 신오, 신정, 신증, 신탄, 신평, 신풍, 신행, 신흥리, 실리, 안심, 양마, 여의, 여의리, 영동, 영암, 영흥, 예암, 오송, 와룡, 용동, 용소, 용암, 용정, 용흥, 운등, 월곡, 월평, 유교, 유상,유제, 이남면, 이동면, 이북면, 장동, 재방, 정암, 조촌면, 족항, 주업정, 중리, 진기, 창덕면, 청계, 춘평, 춘평리, 칠정, 평리, 하가, 하증, 학상, 호랑이, 화개, 화암, 화전, 회포면
유황수(우아동)전설 - 아중저수지 북쪽 가까이 에 있음
어느 노인이 유황수에 있었던 주막에 와서 물 한 그릇을 청하는데 술 한잔을 권했더니 맛있게 마시고 나서 하는 말이 "오늘 선밖장에서 별 사람 다 보았다 글쎄 쌀이랑 건어등을 단돈 몇푼 안되는 헐값으로 호가하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하며 무릉 동쪽에 있는 벼락바우 쪽을 가리키며 "저곳에 내(川)이 생기겠다" 하며 가기에 실없는 소리를 하는 노인으로 그냥 흘려 보냈으나 그후 경신년(1920년) 물난리가 있어 선밖장은 물에 잠겨 헐값도 못되는 거저나 다름없는 값으로 물건이 흥정되고 또한 이곳에 저수지가 생기게 됨에 이 노인은 신선이었다고 하는 전설임.
용머리고개 (용두현, 용두치) 전설
강감찬이 이곳에 있을 때 어느해 가물어서 몹시 걱정하다가 하루는 하인을 시켜 지금 막 내를 건너는 초립동이 있을 터이니 그를 곧 데려 오라고 일러 보낸즉, 과연 그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는데 그를 보자 강감찬이 호령하되 "이렇게 가물어도 못본체하고 지나가다니 괘씸하노라"하였더니 그 초립동은 실은 용이 둔갑한 것이었으니 죽음을 면하고자 승천하며 비를 내리게 하고 떨어져 죽은 곳이 이 고개라 하여 그후 강감찬은 그 용을 후히 장사지내 주고 묻어 주었다함.
박진효자문(朴晉孝子門)- 교동
죽정공 박진이 영암군수로 있었던 태조 3년 그의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때마침 8월 장마로 남천이 범람하여 건너지 못할 형편인데 급한 마음에 그는 말을 타고 물결속에 뛰어 들었더니 물 줄기 한복판이 딱 갈라져서 무사히 내를 건넜다고 하며 엄동설한이 되어 부친의 병환이 차도가 없어 부친의 소원을 물었더니 꽃순이 먹고 싶다 하므로 목욕재계하고 산에 올라가 하늘에 축원한 뒤 눈을 뜨니 눈속에 꽃이 만발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 꽃순을 따다가 달여 드렸으며, 다시 잉어를 원하는 부친을 위하여 방죽을 덮은 얼음장을 깨뜨렸더니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뛰어 올랐다고 하며 또 수박을 원하는 부친을 위하여 눈에 덮힌 산 골짜기를 헤매었더니 탐스럽게 익은 수박이 달린 수박덩굴을 발견하였다고 함 이리하여 그가 꽃을 구하려 해매었던 산을 朴菓山 얼음 속에서 잉어가 뛰어 나온 방죽을 잉어쏘, 수박을 얻은 골짜기를 수박동이라 함
권삼득의 전설 원동 문덕산 (院洞 文德山)전설
원동 동쪽에 있는 산으로써 어느 선비가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곳에서 쉬다가 낮잠을 자게 되어 꿈을 꾸니 귀가후 천금 횡재 하리라 하였는데 그 후 옥동자를 낳아 대성하게 되었다고 함
성황당과 이규보 전설 (동국여지승람)
이규보는 1199년(고려 신종 2년)에 전주목에 사록겸장서기로 내려와 성황사의 제사를 빙자하여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뜯어 착복하는 못된 아전들의 부조리를 은근히 꼬집는 제신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이 무렵 어느날 밤에 꿈을 꾸게 되었는데 평소에 별반 가보지도 않았던 성황사에 이르러 당하에서 절을 하였더니 성황대왕의 사자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기길(이규보의 장서기 벼슬을 가리키는말)께서 가까이 올라 오시랍시는 대왕님의 분부이십니다“고 전한다
나는 층계를 올라가 대왕앞에 엎드려 재배를 올렸다, 대왕은 베로 만든 두건을 쓰고 검정색 윗도리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어디선지 술을 차려든 사람이 나타나 잔을 권하므로 총총한 기분으로 받아 마셨는데 얼마 후 대왕은 말을 걸어 왔다
“내가 듣건대 근자에 목관이 새로이 십이국사라는 책을 간행하였다 하는데 사실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내게도 좀 구해줄 수 없겠는가, 나는 자식이 여럿이 여서 그들에게 이를 읽게 하려니 몇 벌 있었으면 하네, 한 번 주선해서 구해 줄수 없겠는가, 부탁 좀 하세.”
나는 꿈속에서지만 하도 신기해서
“그럼 저의 운수는 앞으로 어떻겠는지 한번 듣고 싶습니다.”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왕은 길위에 급히 달리다가 바퀴 심대가 부러져 주저 않은 수레를 가리키며 말했다
“귀관의 운수도 마치 저와 같은 걸세.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 고을을 물러나게 될 걸세....”
이렇게 대답하고 나더니 대왕은 손수 가죽띠 두 벌을 꺼내어 나에게 건네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귀관은 반드시 귀인이 되어 높은 벼슬을 얻을 것이니 이 가죽띠를 선물로 주겠네..”
어느덧 꿈에서 깨고 났더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때마침 안렴사의 낭장으로 있는 노 아무개가 목관으로 하여금 십이묵사를 간행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
흑석골(동서학동)
속칭 한지(韓紙) 골짜기라고도 불리는 이 계곡은 전주교에서 완주군 구이면을 향해 가다보면 공수내 다리가 나오는데 이 공수내 다리에서 동쪽으로 뻗은 계곡을 올라가면 흑석골이 나온다.
흑석골은 바위가 반절 흙이 반절이라고 해서 반석리(半石里)라고도 했는데 이 바위조차 모두 검은빛을 띄고 있어 속칭 흑석골(黑石谷)이라고도 했다.
검은색을 띈 바윗덩이인 흑석(黑石)은 일명 흑연(黑鉛)의 성질을 띈 돌덩이로 한 때는 이 곳의 돌을 캐어다가 감마제(減磨劑)나 차량의 도말용(塗抹用)의 원료인 흑연, 흑석이라고 하여 인기가 높기도 했다.
이 흑석골의 계곡물은 일년내내 마르지 않아 전주 특산물인 한지 생산공장이 들어서 한지골이라고도 했다.
한뎃벌(교동)
오목대(梧木臺)와 한벽당(寒碧堂) 사이에 일세의 영웅 견훤(甄萱)이 쌓았다는 토성은 오늘날 그 자취도 찾아 볼 수 없으나 그 토성 아래로 하늘이 내려앉은 듯한 푸른 물이 넘실대는 전주천 물이 흘렀고 그 갯벌같은 진흙탕 골짜기를 「한뎃벌」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옆의 오목대와 이목대란 이름은 오동(梧桐)나무와 배나무 숲이 우거졌대서가 아니라 원 이름은 어목대(於穆臺), 미목대(眉目臺)라고 한다.
이 한뎃벌에는 조선조 초기부터 동래(東萊) 정씨(鄭氏) 가문의 한 선비가 살고 있었는데 대대로 가세가 빈곤하여 10여대 후손에 내려온 정희회(鄭希會)때에 와서야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고 밥 먹고살게 되었다.
벼슬길은 승승장구 뻗어 검정(僉正)에 올랐고 슬하에 여복(汝腹), 여립(汝立)을 두었는데 이가 바로 난세의 호걸 정여립(鄭汝立)이었고 정여립의 출생지란 점에서 한뎃벌은 더욱 이름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양쪽으로 산등성이에 가면 아늑한 마을은 비록 부자마을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무엇인가 의기가 투합되고 있다고 해서 선거 때마다 입후보자들이 고개를 제대로 들고 다니지 않는다는 풍문이 떠돌 정도로 입김 센 동네라고 하는데 아마 정여립의 출생지와 관련지은 말인 듯 하다.
팔죽뱀이(인후동)
천성이 게으른 홀아비 촌로는 이 곳 저 곳에 청혼을 해도 선뜻 나서는 혼처가 없어 그럭저럭 살아온 것이 50을 넘겼다.
그런데 옛날 총각 때 어머니가 쑤어 주던 팥죽맛은 잊지 않고 연연했다.
날이면 날마다 팥죽 생각을 하게 되니 자연 팥죽이 먹고 싶어 미칠지경이 되어 생각다 못해 이웃 아낙네에게 간청하여 1년만 팥죽을 단골로 쑤어 달라고 하고 그 대가로 논 한 마지기를 주기로 했다.
1년이 넘고 보니 이빨은 빠지고 김치거리 조차 씹을 수 없는 잇몸이 되어 팥죽 쑤어 주기 계약은 또 1년을 연장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 숨을 거두기까지 팥죽을 쑤어 주던 옆집 아낙네는 자연히 그 촌로의 논마지기를 다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팥죽뱀이라고 아예 이름이 붙여진 고라실 논 옆에 집을 짓고 이사를 해버린 여인네 집 근처를 지금도 팥죽뱀이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팔학골(송천동)
마을의 지형이 꼭 학 한 마리가 나래를 펴 장방산의 장군봉을 향해 나르는 듯 하다.
덕진소(德津沼)에서 살던 천 년 묵은 어미학이 장방산 밑에 있는 작은 둠벙을 발견하고 나래를 접었다.
몇날 며칠 기진맥진하여 알 8개를 나놓고 정든 덕진 연못을 잠깐 다녀와서 보니 둠벙에서 먹고 자란 용새끼가 제법 의젓하게 알을 품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깜짝 놀란 어미학은 죽을힘을 다 모아 용새끼에 달려들자 그 바람에 잔솔이 우거졌던 계곡은 흙이 날고 나무가 뽑히는 천지개벽의 순간처럼 요란스러웠다.
이통에 학의 알은 제날이 되지 않았는데도 부화되어 학이 되어 주둥이를 하늘로 치솟아 울부짖고 어미학은 기진하여 계곡에 떨어져 버린 그 자리가 오늘날 마을의 지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장방산 기슭의 작은 둠벙은 가뭄이 심해도 물이 마를 줄 모르고 항상 깨끗하고 시원한 생수가 치솟아 여름이면 아동들이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 꼭 새끼학들이 헤엄치는 풍경과 같다고 한다.
투구봉(동완산동)
산세가 마치 군인들의 투구처럼 보인다고 해서 투구봉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완산칠봉의 봉우리 가운데 유달리 벼락을 많이 맞아 나무 하나 살아 남지 못한 산등성이로 남아 있다. 설에 의하면 산꼭대기에 철이 많이 숨겨 있어 벼락과 뜻이 맞아 자주 벼락을 맞았다고 한다.
추천교(덕진동)
4백여년 전 가르내(현재의 下可마을)일대는 전주 이씨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비록 생활은 어렵다 하더라도 화목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추탄(楸灘)의 부친 달성공(達誠公)이 중병으로 몇 달 째 누워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갑자기 위독한 사경을 당하게 되었다.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거주하는 명의 소식을 듣고 선걸음에 달려가 동의보감에 의한 처방에 따라 명약첩을 받아들고 급히 귀가하는데 때 마침 뇌성벽력을 치며 폭우가 쏟아져 내려 삽시간에 전주천은 범람했다. 추탄은 암담한 가운데 촌각을 다투는 부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앞뒤를 가릴 것 없이 홍수가 넘쳐대는 전주천에 뛰어들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냐! 제방을 넘실대던 물살이 양쪽으로 좌악 갈라지면서 추탄이 걸어 갈 길이 트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 저것 가릴 겨를이 없는 추탄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와 숯불에 약을 정성스럽게 달여 시각을 다투는 부친의 입술을 적셔드리자 잠시 후 전신을 흥건히 적시는 땀을 흘린 부친은 숨을 급히 몰아쉬고 난 뒤 마침내 기사회춘하여 완쾌되었다.
대홍수로 넘실대던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에 합쳐져 흐르게 되므로 그의 지극한 효성은 하늘도 도왔다는 인근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했을 뿐만 아니라 효행의 귀감이 되어 마을 주민들은 힘을 모아 나무다리를 놓기로 했다. 오늘날 추천교의 자리가 된 나무다리를 놓았을 때도 추탄(楸灘)의 「추」자를 따서 추천교(楸川橋)라고 했다. 냇물이 갈라진 웃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1925년 콘크리트 암거 교량을 건설하고, 옛 이름대로 추천교(楸川橋)라고 했는데 팔복동 황방산 밑 추천대를 중건(重建), 그 효행을 기리고 있는데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추탄선생, 조대비」(嘉善大夫, 兵曹參判兼 知義禁府事, 司憲府, 大司憲, 楸灘先生, 釣臺碑)라고 새겨진 비는 추천교를 흐르는 물을 지켜보며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여 보는 이들의 감회를 솟구치게 해주고 있다.
진밥들, 진밭들
성지평(城址坪)과 장대평(長大坪)에서 뻗어내린 모래내(沙川)벌안 진밥다리 쪽을 진밥들, 연반평(燕飯坪)이라 불렀는데 가활만민(可活萬人), 식솔대(食率垈)에서 연유되어 「진밥들」. 『진밭들』이라고 불렸다.
진영터(중앙동)
현재의 중앙극장 주변이 수비대청 바로 진위영(鎭衛營)이 있었다.
최근세에 들어와 전라감영이 위치한 전주에 우리의 군대가 배치된 것은 1871년이었다.
전라감영 휘하에 3백여명의 신식군대가 자리잡았다고 하나 통장이니 별장이니 하는 전근대적인 편제였고 신식총이 아닌 활의 일종인 주살이라는 무기로 무장했었다.
이 곳 전주의 난후청은 그 후 4년만인 고종(高宗) 12년에 해체되고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고종 19년인 1882년 같은 자리에 진남영이라는 병영을 설치했다가 다시 7년 후인 고종 26년 이번에는 다소 정예화된 군사 3백여명으로 교체하면서 병영의 이름을 무남영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병사와 병영의 명칭이 몇 차례 바뀌더니 고종 32년인 1895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 전주와 평양 두 곳에 진위영을 설치하여 1개대대의 군대를 다시 배치했으니 이 때 비로소 신식총을 가진 신식군대가 전주에 주둔하게 된 것이다. 6-25 후에까지 중앙극장 남쪽으로 정구장이 있었는데 이 자리는 군마장이었다.
우리 고장의 신식군대가 주둔했던 자리를 진영터라고 해서 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좁은목(동서학동)
전주천의 상류는 동남방 약 20Km 지점의 노령산맥 분수령인 슬치(瑟峙 약 230m)에서 발원하여 행정구역으로는 완주군 상관면과 임실군 관촌면의 군 경계를 넘어 남쪽으로는 섬진강 경사면과 북쪽의 만경강 경사면의 분수령을 넘어 전주~남원간 국도를 따라 남하하고 있다.
이러한 전주천이 전주에 진입하는 곳을 좁은목이라고 하는데 전주천이 이 좁은목을 통과할 때를 생각하면 흥미가 진진하다. 그것은 좁은목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규암맥(硅岩脈)이 줄기차게 뻗어 있어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암벽이 물이 흐르는 방향을 정면으로 가로막아 뚫고 흐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규암맥의 높이가 현재의 남고사(南固寺) 산기슭 정도의 높이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라 상류의 하상 높이도 그 이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상황을 예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홍수 때가 되면 많은 수량이 좁은목에서 폭포수로 바뀌어 장관을 이루다가 차츰 암맥이 낮아져 여울로 흘렀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이 규암맥을 가리켜 병풍바위라 하는데 병풍바위 부근을 좁은목이라고도 한다. 이 좁은목에는 삭탈 관직당하여 귀양길을 나서는 탐관오리의 도포자락에 찬 바람이 스며든다는 유찬로 등의 열두곡(十二曲) 설화 등이 매우 흥미롭게 전해져 오고 있다.
장승백이(평화동)
사방목신으로 이정표지(里程標識)를 하기 위해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의 표지목을 꽂았던 곳이다.
이 이정표는 부성 주변의 5리(2km), 10리(4Km) 마다 세워 길손들의 발걸음을 한층 가볍게 해 주었다.
본래 장승으로 불리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푯말은 잡귀를 쫓는 액땜의 푯말로 먼길을 떠나는 길손이 도적을 만나지 않고, 우환이 없이 잘 다녀오도록 무사를 비는 사방목신(四方木神)으로 공대했다.
어느 고을마다 중요 지점에는 나찰귀(羅刹鬼), 탈의 화상을 새긴 목신(木神)을 세웠는데 키는 9척 이상이요 두 눈을 부라리고 잡귀를 쫓아냈다고 한다.
이 장승들은 오가는 길손들의 눈에 차차 가까워 올 때나 이 장승을 지나 멀리 갈 때마다 길손에게 애환을 안겨 주고 또한 길손의 애환을 묵묵히 지켜보는 낯익은 풍정이었다.
이제 찾아 볼 수 없는 사방목신(四方木神)이 세워졌던 곳은 동쪽으로는 현재의 우아동인 소리개재, 서쪽으로는 중화산동(中華山洞)인 가마귀골, 남쪽으로는 서서학동(西棲鶴洞)인 난전 미륵댕이, 북쪽으로는 덕진동(德津洞)의 추천교 자리 가련내에서 길손의 애환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자만동(교동)
승암산(僧岩山)과 기린봉이 새끼친 높고 낮은 산봉우리를 가리켜 오목대(梧木臺), 이목대(梨木臺), 발산(鉢山)이라고 하며 이들이 둘러싼 골짜기를 자만동(滋滿洞)이라고 했다. 그 이름은 녹엽성음(綠葉成陰), 자만지운운(子滿枝云云)의 고가(古歌)에서 따라 붙인 마을터 이름이라 했다.
또한 이 골짜기는 전주 이씨 발상지라 해서 발이산(鉢李山)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발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승암산과 발이산을 넘어서는 형세가 노승출동(老僧出洞)같다고 하여 발산이라 전한다.
이 곳 자만동은 이태조(李太祖)의 5대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를 두고 얽힌 사연이 있는데 그가 유년기 때 동산인 바릿대산에서 청운을 꿈꿀 때 마을 아이들과 날마다 어울려 진법(陳法)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하는데 그 진법놀이를 한 마루턱에 수 백년 자란 아름드리 괴목이 있었고 후대에 와서 괴목을 장군수(將軍樹)라고 불렀다.
인봉리방죽(중노송동)
오늘날 문화촌(文化村)이라고 불리는 중노송동 옛날 공설운동장 자리가 방죽이었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기린봉 기슭을 타고 흘러내린 계곡물과 빗물이 흥건하게 고였으며 주변에는 오래된 정자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모여드는 도시 중심변의 유일한 유원지였다.
6.25사변 이후까지도 그 아름다운 정취가 시민들의 눈길을 자주 끌어 들였었는데 그 자리를 메우고 공설운동장을 만들었다. 상단은 경마장, 하단은 공설운동장이 되었는데 주로 하단을 인봉리 방죽이라고 했다.
은행나무골목(풍남동)
전주시내에는 도(道)나무 한 그루를 비롯해서 시(市)나무 6그루, 동(洞)나무 20그루가 있는데 그 가운데 단연 은행나무가 수적으로 우세한 데도 유달리 풍남동 은행(銀杏)나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이 또한 은행나무 골목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리베라호텔 앞길에 있는 세종당 한약방에서 오래 전 동사무소가 있던 사거리까지를 은행나무 골목이라고 한다.
조선조 태종(太宗) 2년에 최덕지(崔德之)가 심었다는 이 은행나무는 원래 최덕지의 인품이 특출 나고 오복을 다 갖춘 사람으로 알려져 이를 흠모하는 후학(後學)은 물론이고, 여인네들까지도 상사병을 앓을 만큼 남자다운 기상이 넘쳐흘렀다. 최덕지가 세상을 떠나자 과거를 보러 떠나는 과객들이 알성 급제를 위해 은행나무 앞에서 최덕지의 학문을 숭상하는 묵념을 올렸으며 매년 정월 초하루가 도면 후학들이 제사를 지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설화를 들자면 최덕지를 상사하던 여인네들은 핑계삼을 만한 일이 없자 이 은행나무에 제사를 지내면 애를 못 낳아 쫓겨나려던 부인네도 떡두꺼비같은 사내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매년 정월 초하루 남정네들이 제사지내고 나면 바로 여인네들도 구름처럼 몰려와 아들 하나만 점지해 달라고 눈물 흘려가며 빌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에서 완산부성내에 하고 많은 은행나무가 많았는 데도 풍남동의 은행나무 골목으로 그 명성을 떨치었다.
오늘날에도 정월 초하루 밤이 깊을 때 간혹 부인네들이 와서 묵념을 하고 서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유연대(중화산동)
완산칠봉 동남 기슭의 우람한 산악이 포물선을 그으며 전주천의 물살을 끼고 진북사(鎭北寺)에 이른 잔등을 유연대(油然臺)라고 했다.동 터오르는 새벽의 산등성이가 마치 기린이 여의주를 토해내듯 주황빛으로 찬란하다 하여 유연대라고도 했다.
약전골(다가동 ~ 전동)
현재 다가교에서 다가우체국과 영신당한약방 사이를 약전골이라고 했다.
약전골은 약전동(藥廛洞)이라고 하여 약재를 파는 전포(廛鋪)가 들어선 곳을 말했다.
조선조 17대 왕인 효종(孝宗) 2년 때 시작하여 1943년까지 약3백년간 약령시(藥令市)를 이뤘었는데 일종의 약재매매 시장으로 대구와 청주, 공주, 진주, 전주 등에 있었다.
전주에서는 1923년 11월 처음 개장되었는데 한약방과 건재상을 하던 박계조(朴啓祚)를 중심으로 한의약계 인사들이 모여 전주 약령시 영성회를 결성하므로 근대적인 약재시장이 개설된 곳이다.
약령시는 봄, 가을 두 차례에 약 60일간 개장되었는데 전주에서는 가을에 개설되었다.
1943년 생약통제령(生藥統制令)에 의해 전주 약령시는 막을 내렸다
용머리고개(서완산동)
마한(馬韓)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이신(一首二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 때 전주천 물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沼)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일수이신(一首二身)의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일본관헌의 농락이었고, 이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昇天)하려고 안간힘을 쓰느라고 전주천 물을 모조리 삼키고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한번 쓰다가 힘이 빠져 떨어지고 말았는데 사실은 힘이 빠진 것이 아니라 천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몸부림치다가 승천하지 못한 한(恨)을 품고 용(龍)의 머리가 지금의 용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이 후로는 우거진 송림이 정리작업을 한 듯 깨끗하게 오솔길을 만들어 줌으로써 오늘날은 경목선(京木線)이 되었고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라고 했다.
왜막실(우아동)
왜막실(倭幕實)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주둔한 곳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다소의 왜군들이 군복을 벗고 이 곳에다 취락의 터전을 마련했었는데 통칭 왜막실로 불렸다.
이 곳에 정착한 왜군 잔류민들은 한인으로 귀화하고 성씨를 붙였는데 왜막실 김씨(金氏) 또는 전주 김씨(金氏)등이 이들 시조가 되었다.
완산부성 밖 동쪽 귀퉁이 골짜기에 자리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작정한 이들을 받아들인 우리 조상들도 인정이 많아 왜막실 김씨라고 자처하는 이들을 모른체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
어은골(진북동)
유연대(油然臺)의 등을 활 휘듯 지긋이 휜 듯 병풍친 고랑을 말하는 데 그 안은 넓적하게 깔려 나간 터널같다.
갈건야복(葛巾野服)의 은사골로도 알려진 이 곳은 숨은 잉어의 혈같은 골짜기 형상과 같다고 하여 어은골(魚隱洞)이라고 했다.
안경다리(교동)
홍교(虹橋) 또는 남천교(南川橋)는 슬치재를 따라 내려 흐르는 한벽당 아래를 가로질러 놓였던 석교(石橋)를 말한다.
돌을 다섯 동가리로 나누어 무지개형으로 짜서 다섯 개의 창문처럼 뚫어 쌓았대서 안경다리라고 했다.
이 다리는 물 가운데에 기둥을 박고 우뚝 솟아오른 그 웅장한 위용이 정교하다 못해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옥류동(玉流洞) 산신이 중바위 산의 바윗돌을 뽑아다 쌓은 듯 하다고 하여 감탄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더욱이 다리 위로 남쪽 하늘을 삼킬 듯이 눈을 부릅뜨고 앉은 다섯 개의 용(龍)머리를 새겨 놓았었다고 하는데 승암산이 화기(火氣)를 품었다고 해서 부성의 재난을 사전에 막자는데 연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승암산의 화기를 막기에는 용의 힘이 모자랐던지 그 후 홍수가 잦아 무너져 버리고 용머리는 물에 떠내려 가버려 이제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아중리(우아동)
현 전주상고의 교정인 마당재를 넘어서면 아중제(牙中堤)의 맑은 물이 진주처럼 넘실대고 있다.
이 호수는 서서히 초포 들녘을 비옥하게 만들어 10월 상달이면 벼를 누렇게 만드는 근원이 되고 있다.
호반을 끼고 돌아가는 길은 산책로로 이름나 있어 아중리 유래의 풍치를 더해 준다
소금전다리(다가동)
현재의 완산교 머리를 소금전다리, 염전교라고도 하는데 다리 건너 용머리고개를 넘어서면 경목선(京木線)을 잇닿게 된다.
조선조시대에는 소금이 귀했고 또 소금장수들이 한데 모여 소위 할인판매를 못하도록 서로 견제했는데 소금장수들이 모여 장사판을 벌였대서 소금전다리라고 했다.
숲정이(진북동)
숲정이는 숲머리의 어원으로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이러한 주위의 숲정이는 완산동 초록바위와 더불어 구한말, 어쩌면 훨씬 그 이전부터 이 고장의 극형자(極刑者)들을 처형하는 이른바 형장(刑場)이었으며 역대 교난(敎難)을 겪어 나오는 동안 대부분의 가톨릭 교도들이 바로 숲정이에서 처형되었으며, 가톨릭계인 해성중?고등학교가 그 자리를 잡은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사실 한국 가톨릭사를 보면 종교 박해는 5차례의 교난사를 갖고 있는데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1827년의 정해박해(丁亥迫害), 1839년의 기해대교난(己亥大敎難) 그리고 이 고장 전주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1866년 병인교난(丙寅敎難)을 들 수가 있다.
전주사람으로 병인교난(丙寅敎難)때 처형당한 신자로서는 조화서(영세명 :베드루), 이명서, 정문호, 손선지(孫善智), 한원서, 정원지, 조윤호, 김사집, 김영삼, 한베드루, 임관서 이외에도 성명을 알 수 없는 2명의 순교자까지 합쳐 13명의 신앙이 두터운 신자가 처형을 당했으며 거기에 여신도 역시 상당한 숫자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상의 신도는 전주의 숲정이에서 희생당한 숫자이고 보면 도내 고을마다 희생자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병인년(丙寅年)의 대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으로 봐서 사상 유례없는 처참한 교난이었다.
이 중 확실하게 밝혀진 일가족의 희생을 보면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이누갈다와 그 일가족이 순교 당하면서 숲정이에는 피가 미처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하며, 1968년 10월 6일 7명의 순교자가 복자 위에 시복되었다.
쇠장터(전동)
조선조시대부터 완산칠봉 계곡에서 흐르는 생수는 삼복(三伏)더위에서도 얼음물 처럼 차다하여 얼음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일제시에 좁은목의 전주천 물을 끌어 올려 상수도 수원지를 만든 뒤 얼음골에서 수돗골로 바뀌어 부르고 있다.
쇠장터(전동)
현재의 매곡교(梅谷橋)다리 밑 위아래가 모두 쇠장터였다. 남문 밖 장날과 같이 2, 7일장으로 쇠장이 섰다.
쇠장이 서는 날 새벽부터 각 지방에서 몰고온 소몰이꾼들과 황소, 송아지가 법석을 떨었으며 송아지가 우는 「음매」소리는 구슬펐다.
간이식당처럼 차린 술판에서는 주모들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소값을 털어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으며, 한 쪽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지는 등 쇠장터의 애환은 서민들의 생활단면을 그대로 나타내 주었다.
오랜 동안의 쇠장터는 일제시대 전주천 정화라는 미명아래 현 교대부속국교 남쪽 자리로 쇠장이 옮겨진 뒤로 매곡교 다리 밑의 쇠장터는 사라졌다.
솔가지전거리(동완산동)
현재의 매곡교를 건너 완산칠봉을 가는 길에서 서서학동(西棲鶴洞)가는 초록바위까지 자유당 시절까지만 해도 연탄이 없는 시절이라서 솔가지며 장작 장수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을 이뤘다. 또 6.25 이후에도 솔가지가 흔하게 팔려 전주 솔가지라고 하면 유명했다.
송천동
조선조 영조(英祖)가 시조묘(始祖廟)를 조경단(肇慶壇)에 봉안할 때 영의정인 김치인(金致仁)이 중대한 일을 도신(道臣)에게 전임시켜서는 아니된다고 하고 전주에 봉심차(奉審次) 내려왔을 때 건지산(乾止山) 일대를 둘러 보았다. 송천동 골짜기를 가리켜 건말미초(乾末微初), 가활만인지지(可活萬人之地)라고 하면서 감탄했다는 설이 있다. 만여명의 사람들이 활발하게 살 수 있는 자리라고 풍수지리설을 들어 예견을 한 것을 보면 현재 향토사단이 들어서게 되었음은 우연의 일치라고 하겠다. 당시 송천동(松川洞) 일대는 적송(赤松)이 울창했고 산계곡 끝이 되는 서쪽으로 전주천 물이 넘치게 흘렀을 뿐만 아니라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아 솔밭과 내를 연유하여 송천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세내(삼천동)
세 개의 냇물이 합쳐진 곳이라 하여 삼천으로 불리고 있는데 완주군(完州郡) 구이면을 돌아 완주군 일대와 김제군(金堤郡) 일부, 전주시의 농경지에 관개용수 하는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다. 모래사장 또한 금모래 은모래 같기만 하여 새우번식이 좋아 세천새우는 입맛을 돋구어 주고 있다.
설대전다리(전동)
오늘날 남부시장(南部市場) 머리의 매곡교(梅谷橋) 자리다. 옛날 이 다리 아래를 우시장 속칭 쇠전갱변이라고도 했으며, 다리 아래쪽에서 서천교(西川橋) 사이로 담뱃대 장사들이 좌전을 벌렸다고 해서 연죽교(煙竹橋) 또는 설대전 다리라고도 불렸다.
선너머(중화산동)
전주의 향교와 문묘(文廟)는 고려 우왕(禑王) 6년에 본시 부성내 남부인 지금의 경기전(慶基殿) 부근에 있었는데 조선조 태종(太宗) 10년에 경기전이 조영(造營)되자 인접하고 있는 향교에서 독강하는 소리가 시끄러워 성령(聖靈)을 안위케 하는데 어긋난다고 하여 전주부의 서쪽인 화산(華山) 기슭인 삼계리에 이전했다.
이 자리에서 약 2백여년간 있었는데 당시 전주천은 현 다가산(多佳山) 밑인 신흥학교 교정을 도는 소(沼)를 이루었으며, 장마철만 되면 선비들이 전주천을 건널 수 없었고 부성과 너무 떨어져 불편하였으며 좌묘우사(左廟右杞), 즉 객사에서 남면, 좌면에 문묘(文廟)를 세우고 우면에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는 제도에 어긋난다고 하여 선조(宣祖) 36년 관찰사인 장만(張晩)이 품신하여 현 교동 자리에 이전했다.
또한 화산서원(華山書院)은 선조 때 향교 자리에 세웠으며 서원 옆에 희현당(希賢堂)을 두었는데 희현당은 오늘에 말하면 대학 정도의 수학을 했다.
그러나 한말 때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완용(李完用)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명당인 이 곳에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자 철거하고 또한 서원비(書院碑)를 현재의 중화산동(中華山洞) 2가 산13번지에 다시 세웠다.
희미하게 남은 서원비(書院碑)에는 당시의 화산서원과 희현당 그리고 황학대(黃鶴臺)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뜻있는 이의 눈길을 멈추어 주고 있다.
이러한 연유로 화산을 넘어 서원이 있었다고 해서 화산서원 너머를 선너머로 부르고 있으며, 서원너머에서 나오는 미나리는 전주팔미로 이름나 있다.
서낭댕이(인후동)
우리나라는 삼한시대부터 토속신을 섬긴 기록이 있다. 백제 때도 역대 임금들이 천지신에게 제사하며 시조 묘당을 세웠고, 고구려에서는 음사(淫杞)가 많았고, 신라시대 역시 묘를 비롯하여 왕묘(王廟)를 세우고 명산 대천(大川)을 섬겼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선황신제사가 추가되더니 조선조시대부터는 민간신앙의 서낭댕이라고 하여 마을의 터를 지키는 소박한 신앙이 내려왔다.
사직단은 토(土), 곡(穀)의 신(神)을 섬기는 곳이며 국토의 안태와 오곡의 풍요를 빌었고 기우(祈雨), 방역을 위한 고사가 행해졌다.
이로 보면 성황당(城隍堂)은 시민생활 깊숙이 파고든 유일한 민간신앙이다.
전주의 성황사(城隍杞)는 고려 신종(神宗 2년)때 전주목의 사록겸(司錄兼) 장서기(掌書記)인 이규보(李奎報)가 기린봉 북록에 세우고 성지의 수호를 치제 한데서 비롯되어 조선조시대에 이르러는 민간신앙으로 무병장수(無病長壽) 입신영달(立身榮達) 먼 길 떠나는 길손의 무사를 비는 등 생활 속에 파고 들었다.
전주에서는 이 곳에 처음 성황사가 세워졌고, 성황당으로서는 가장 번창한 곳이라고 해서 서민들의 말로 서낭댕이라고 불렸다.
싸전다리(전동)
전주교를 99.1월 전주시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싸전다리로 명명함. 전주의 큰 길목인 팔달로 끝머리에서 남원, 순창으로 이어지는 다리였는데 옛날에는 이 다리목을 끼고 좌우로 싸전들이 늘어져 앉았었다는 데서 나온 명칭이다.
분내(송천동)
분내란 어원은 필천(筆川)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분내골의 형상은 붓으로 일점 획을 그어 내린 것과 같다 하여 붓내라고 하였는데 건지산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을 마을 끝에서 보를 쌓아 물레방아를 돌려 나락방아도 찧었다고 해서 붓내보다 분내로 불리었다.
보광재(동서학동)
공수내 못미처 장승백이 길을 버리고 좌측으로 꺾으면 옛날 도수장으로 가는 길이 나선다. 보광재는 전주천과 세내의 양 쪽 물줄기를 보내는 분수령의 하나로 백제 무왕(武王)때 보광사(普光寺)란 절이 있었다고 하여 보광재라고 한다.
지사(地士)들의 설에 의하면 호랑이 목의 헐이라 하여 복호항지맥(伏虎項之脈)이라고 하여 보광재라고도 하는데 완산부성 변두리 치고는 깊은 계곡으로 유명하였다.
뱀골 (송천동)
마을의 지형을 보면 꼭 뱀이 놀라 고개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웃 마을 팔학골에서 학이 나래를 펴자 깜짝 놀란 용새끼 한 마리가 펄쩍 뛰다 보니 이웃 마을에 떨어져 내린 것으로 봐서 뱀이 놀라 건지산을 향해 고개를 쳐든데서 뱀골이라고 한다.
미륵불공(=이두리골, 동서학동)
옛날 난전 땅에 이두리라고 하는 노총각이 살고 있었다. 늙은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살림인데도 끼니를 끓일 보리쌀 한 톨이 없어 동냥질을 나섰다.
건장한 몸으로 어찌 막일이라도 하지 않고 하루 이틀도 아닌데 날마다 비렁뱅이 신세를 면치 못하느냐는 부성 사람들의 질책이 무서워 달산 기슭을 그저 맴돌 듯 서성거리고만 있는데 대여섯 발이 넘는 장죽을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어찌 너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서성거리는고, 인생이 불쌍하여 소원 한 가지만 들어주겠노라. 자자손손 영화를 누리고 싶느냐 아니면 당대 영화냐 둘 중에 하나만 말하라”하자 이두리는 서슴없이 ”자자손손 뭡니까 우선 당장 배때기부터 원없이 채워 보고 싶소이다”라고 하니 이두리를 가엾게 쳐다보던 백발노인은 이두리 손을 꼬옥 잡고 한 곳에 이르더니 죽장으로 땅방아를 찧으며 하는 말인 즉 “이 곳에 조상의 뼈를 묻으라”한 마디를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두리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으나 하여튼 부친의 백골을 당일로 파다가 이장을 했더니 몇 해 안되어 당대에 부럽지 않은 갑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고달산 서쪽 기슭 비바람 속에 묻혀 있는 미륵불을 옮겨 세우되 상체는 일월성신(日月星神)을 받게 하고 하체는 땅에 묻어 달라고 부탁을 하여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노인의 현몽대로 했다.
일설에 의하면 괴목이 서 있는 옆구리를 뚫고 솟아났다고도 하는데 하여튼 이두리는 당대의 소원을 성취했고 미륵불은 노인의 현몽대로 옮겨졌다.
오늘날 석불리(서서학동) 괴목나무 옆 미륵불이 바로 이두리 사연에 얽힌 미륵불이고, 이두리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다고 하여 미륵불골 또는 이두리골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물왕멀
누구나 택시를 타고 전고 뒤 물왕멀에 가자고 하면 어느 운전사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서슴없이 데려다 준다.
물왕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명한 곳이다. 20여년 전만 해도 좁은 고삿길이었는데 현재는 전주의 남북로가 관통 되었다.
견훤(甄萱)의 출생이 「지렁이」정기를 타고 낳다는 데서 전해오는 설화에 연유되고 있으나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본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씨로 고쳤다고 한다.
견훤이 진훤으로 발음되는데서 지렁이의 정기가 떠돌고 있으며 견훤은 이 물왕멀의 구릉지대를 중심으로 궁궐을 지어 도읍으로서의 방위를 튼튼히 했으며 성곽을 쌓았다고 하는 데서도 물왕멀의 유래는 전해오고 있다.
묵샘골(교동)
묵샘골은 자만동 즉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의 작은 골짜기로 녹두묵을 많이 만들어내어 유명하였고 이 곳의 샘물은 어느 곳보다 물맛이 좋아 녹두를 갈거나 갈아 놓은 녹두묵을 만들 때 치는 샘물로 적격이라 간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녹두묵 외에도 도토리묵으로도 유명하다.
모래내다리(진북동)
기린봉 뒷 기슭이 원천인 사천(砂川)은 전주의 외곽지대를 돌아 흐르다가 진북동 북방에서 본류와 합류하고 그 상류에서 삼천과 합류된다.
그런데 기린봉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도중에 모래가 많이 쌓여 모래내라고 했으며, 1935년 교량을 만들고 모래내다리라고 했다.
명지골(명주골, 인후동)
명주베의 집산이라고 해서 명지골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당초 이 곳은 소나무가 우거지고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도적무리가 날뛰던 소위 우범지대로 할 일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드나들지 않던 곳이다.
조선조 말엽인 1894년 갑오경장 때 난을 피해온 선비들이 인적이 드문 이 곳에 하나 둘 정착하고 생활하다 보니 화전만으로는 연명을 할 수 없게 되자 뽕나무를 심고 누에고치를 시작했다.
북문 밖에 사는 한 노인이 명주 베짜기를 잘한다는 소문을 염탐한 선비들은 그 노인을 모셔다 놓고 요즘말로 특별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원래 성정이 고운 선비들이었고 하루가 급한 것도 아닌 터라 한올 한올 명주베 짜기에 정성을 다한 결과 어느 다른 지방에서 생산된 명주베보다 올이 가늘고 옷감이 좋아 나무랄데 없는 일품이 되었다.
차츰 선비들이 짠 명주베의 이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한적했던 골짜기에는 명주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이 들끓게 되었고 이름없던 마을은 차차 명지골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선비들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매사가 눈에 가시처럼 보인 이 곳 명지골을 말살시키기 위해 인가 부근에 공동묘지를 만들어 하나 둘 마을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1978년 전주시의 제 6토지구획 정리사업으로 이제는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변모를 가져왔다
마당재(중노송동)
현재 전주상업고등학교 교정 주변을 가리켜 야단법석(野壇法席)자리라고 한다.
흔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왁자지껄 수선을 피울 때 이런 경우를 야단법석을 떤다고 하는데 야단법석의 어원은 불가에서 나온 말로서 부처님께 올리는 불공예법 가운데 파격적인 집전의식중의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항간에서 걸핏하면 야단법석을 벌인다고 쉽게 빗대어 말을 하고 있는데 불가의 의식범절을 차분하게 따져 들어가면 지극히 엄숙하고 경건함 속에서 거행되는 집전 과정이 마당재인 것이다.
완산부성 밖의 사고사(四固寺)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사찰에는 4월 초파일이 아니더라도 연중 계절따라 불전 의식이 계속되었는데 불교문화가 꽃피울 때라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불도들을 한꺼번에 다 법전에 수용할 수 없었다.
각 사찰의 스님들이 한 자리에 모여 어찌하면 좋을 거냐고 몇날 며칠 숙의한 끝에 소위 합동 집전을 하는데 중지를 모아 넓은 터를 구하게 되었다.
상업고등학교 부근의 나지막한 구릉지대가 적격지로 선정되어 야단(野壇)에 법석(法席)을 마련했다고 하여 야단법석(野壇法席)이요, 넓은 마당에서 재를 지냈다고 하여 마당재(齋)라고 한 것이 오늘날까지 마당재라고 알려졌다.
완산부성내의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지금 마당재에 간다」고 말한 것은 목적을 말한 것이 행선지까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무소(동서학동)
남고천(南固川)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이 미륵산을 바라보며 관음사 부근 산허리를 굽어도는 부근을 두무소(杜舞沼)라고 부른다.
명나라 이여송(李如松)의 막료 중에 당대 명유(名儒)이며 천문지리에 해박한 두사청(杜思廳)이 있었는데 임란 때 이 곳 완산부성(完山府城)에 당도하여 산세를 보다가 명나라 중원의 서주(徐州)와 흡사하다고 감탄하면서 서북쪽의 터진 곳이 있어 수적지지(授敵之地)의 형세이며 남으로 뻗은 천혜의 요새지라고 했다.
이러한 산세에서는 비록 천만의 대적이 침노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침을 흘리며 감탄하는 나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곳까지 답사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남고산의 기암괴석이 자유분방하게 흩어져 내린 풍치는 무질서하면서도 그 가운데 어쩌면 바위덩이라도 사람이 가져다 쌓아 놓은 듯한 정교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물은 옥과 같이 맑아 청간수 같고, 심화가 끓는 듯 급히 흐르다가 잔잔히 흐르는 물에 비친 하늘은 청자빛을 머금어 꼭 신선대에 오른 듯 하여 두사청은 한동안 넋을 잃었다.
“과연 명소로다, 자고로 산자수명한 곳이 많다 한들 어찌 이 곳에 비길거냐 바로 이 자리가 명지(明地)로다”하며 경탄한 나머지 스스로 취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청간수를 마시고 있던 장군의 말도 덩달아 춤을 추니 하늘도 땅도 사람도 짐승도 한 몸이 되어 신선춤을 추었다.
그런 후로 사람들은 두사청이 진중을 떠나 자연에 취해 진중무(陣中舞)를 추었다고 해서 이 곳을 두무소(杜舞沼)라고 불렀다고 전해오고 있다.
도마다리(인후동)
고려 중엽인 8백여년 전, 조셋(현 草浦) 마을에 사는 경주 김씨 문중은 수대를 이은 부자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으나 인심이 가마귀 욕심이라 가난한 이웃을 돕기는 커녕 표독스럽기만 했다.
한 예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들르면 시주는 고사하고 콩주머니 전대를 머리에 묶고 물을 부으면 콩이 불어 머리가 쪼개어질 듯 아픈 대퇴고문을 하여 스님을 내여 쫓는 일들을 김씨 문중 청년들은 업으로 알았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옥동자 스님 한 분이 마을을 찾아가 확인하려고 시주를 청했더니 청년들이 달려들어 옥동자 스님에게까지 대퇴고문을 하여 말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자비를 내려 주려는 스님들을 박해하는 고약한 청년들의 버릇을 고쳐 주기로 마음을 작정한 옥동자 스님은 김씨 문중 선산을 두루 살펴본 즉 기린봉에 연결된 와우항(臥牛亢) 허리에 6기의 김씨 선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역시 명당 자리에 묘를 쓴 덕으로 부자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을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본 즉 구수(구시)다리라고 불리는 다리가 있어 이의 명칭을 바꾸면 액을 당하리라고 판단하고 도마다리라고 하기로 하였다.
도마다리라고만 하면 허리가 잘리듯 명당과 마을이 떨어지는 것으로 예견한 스님은 구수다리 옆에 쪼그리고 앉아 다리를 건너는 행인에게 동전 한냥씩을 주면서 「도마다리 잘 건넜구나」라고 한 마디씩 하라고 일러주었다.
또한 인근 마을에 시주를 나서는 스님들에게도 시주를 해주는 사람마다 구수다리를 도마다리라고 하면 복을 많이 받게 되니 누구나 이 말을 하도록 하라고 일렀으니 며칠 지나자 구수다리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그저 할 일 없이 앉아서도 도마다리라고 씨부렁대니 도마다리는 금방 유명하게 되었다.
차츰 인심을 잃은 조셋 마을에는 아무도 드나드는 사람이 없어 일꾼을 구할 수가 없으니 농사를 지을 수 없어 조셋 마을의 논밭은 잡초만 무성하고 점차 가세는 기울어져 생계가 막연하게 되었다.
문중 회의를 연 김씨촌 노인들은 집집마다 돈을 거둬 구수다리에서 큰 잔치를 벌여 주지육림에 인근 주민들을 초청했다.
완산부성내의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너도나도 많이 몰려 배불리 먹고 돌아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역시 도마다리라고 하면 먹을 것도 생기니 앞으로도 도마다리라고 해야겠구나」하였다니 조셋마을 김씨 문중은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이후로 도마다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따박골(중화산동)
따박골, 다비골이라고도 한다. 따박골은 완산칠봉의 한 봉우리인 용두봉(龍頭峰)을 서편으로 내려가면 용의 목줄기라 하는 가파른 바윗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쌍용골 구릉지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이 일대를 따박골이라고 한다.
따비란 농기구의 한 종류인데 이산의 돋아난 형국이 마치 따비를 닮은 구릉처럼 보인다고 해서 따비골이라고 불러왔다.
노루목(교동)
남고산 꼭대기가 승암산을 바라보며 쏜살같이 곤두박질치며 내려오다가 좁은목 못미쳐 까무라친 형국이라 하는데 이 때 놀란 것은 바로 노루라고 한다.
또 승암산 꼭대기가 서북쪽 발산(鉢山)을 돋아놓고 한 가닥을 슬쩍 비껴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형세인 한벽류 부근을 옥류동이라고도 한다.
이 곳 옥류동 터를 멀리서 바라보면 대숲을 끼고 호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는 형국인데 노루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놀다가 목이 말라서 물있는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라 기절 초풍하여 숨을 곳을 찾아 날뛴데서 노루목이라고 불리어 오고 있다.
기령당(동완산동)
현종(顯宗)때 세운 군자정(君子亭)을 오늘날에는 기령당이라고 한다.
본래 군자정은 용두봉을 지나 반선봉을 건너 옥적봉인 빙고동 아래 부지에 있었다.
영조(英祖)때 서문 밖 민가에 큰 불이 일어났었는데 뜻밖에 광풍이 몰아쳐 삽시간에 부성안은 화염에 휩싸였다.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은 단숨에 서천을 넘어 군자정까지 태워 버렸다.
그 때 홀연히 군자정의 현판은 불길에도 타지 않은 채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가 이 곳 잔등에 떨어지자 지신(地神)의 조짐이라 하여 선비들이 목욕재계하고 다시 군자정을 세웠는데 현재는 기령당(耆寧堂)이라고 한다
공수내(서서학동)
백제 무왕 때 고달산 기슭에 보광사(普光寺)를 지을 당시의 설에 의하면 보광사를 올라가는 고개 형국이 호랑이 목(伏虎項)같다고 해서 복항사(伏項寺)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복항재에서 남으로 평촌 쪽은 험한 바위들이 솟구친 가파른 고갯길이라 하여 부성의 화객도(華客道)로 소문나 있는 고개이며 이 고개 마루에 서있는 당산나무(堂山木神)의 주변에 돌을 던지며 소원 성취를 빈 성황당이 있다.
이 성황당을 돌아 북쪽 흑석골로 내려서면 면경소, 두무소, 벼락소, 용천소 등이 있는데 이 물이 넘쳐서 서천에 합류되는 곳을 남고천이라 하며 이 개울을 두고 이두리에 얽힌 설화를 심어 공수천(空手川) 다시 말해서 공수내라고 불리고 있다.
공기골(동서학동)
아흔아홉 고개의 골짜기를 지녔다고 해서 공기골이라고 유래되었다.
공기동(孔基洞, 孔器洞), 죽림리(竹林里)라고도 한다.
높은 골짜기라서 산새의 울음소리며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가 신선들이 풍월하는 시정을 되살려 주는 듯 하여 유원지로서도 이름난 곳이다.
곤지산(동완산동)
남천교 쪽에서 바라본 곤지산은 꼭 말처럼 보인다고 해서 갈마음수봉(渴馬飮水峰)이라고도 하는데 곤지산의 산형(山形)이 목마른 말이 초원을 찾아 강변에 목을 축이는 형상이라고 한다. 조선 말엽에는 참형자들을 효수하던 곳이라 하여 눈총을 받았던 곳이며, 숲정이 좁은목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삼동(三冬) 내내 바람이 차고 거세여 삼복 무더위 때는 피서객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또한 해가 설핏하거나 비오는 날은 한낮이라도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아녀자들은 아예 발길을 돌리지 않았으며, 장정들까지도 간담이 서늘하다고 하여 곤지산 골목은 피해 다녔다고 한다.
고내(송천동)
고내란 고랑, 골안의 옛말로 냇물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전주천의 간선과 지선이 뚜렷하여 농업용수에 불편이 없는 상태이나 조선조시대에는 건지산 일대의 게곡물은 너무 차가워 농업용수로는 적합치 못해 둠벙처럼 고인 고내의 물이 유일하여 마을 이름이 연유되었다
강당재(중화산동)
경기전에 인접해 있던 향교를 서원너머로 옮기고 화산서원(華山書院)을 설립, 요즘 말로 학교군(學校群)을 형성한 현재의 예수병원 주위는 선비들로 항상 들끓었다.
이렇듯 많은 선비들의 통행로가 된 예수병원 길은 당시 노송이 우거진 오솔길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오르내리는 선비들이 글을 읊는 소리는 바위와 나무에 부딪쳐 골짜기는 온통 글읽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이런 연유로 학문을 닦는 교실을 강당이라고 했으며, 강당을 향해 오르내리는 고개라고 하여 강당재라고 했다.
서원너머의 화산서원비(華山書院碑)만이 홀로 당시의 애환을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간납대(교동)
간납대란 전주팔현(全州八賢)으로 알려진 운암형제(雲岩 兄弟)의 충절을 낳았대서 간납대라고 한다.
전주 한산(韓山) 이씨 가문에 무인세족(武人世族)이 있었는데 이들은 속칭 병사터라고 한 경기전 동쪽길 건너 전 전주경찰서 자리에 모여 살았다.
병자란 때 운암(雲岩) 형제는 의병을 모아 남한산성까지 진군하여 혈전을 벌이고 대승을 거둔 뒤 고향에 돌아와 기거한 곳이 바로 기린봉 아래에 있는 적취정(積翠亭) 골짜기로 전 영생고등학교에서 국군묘지에 이르는 곳이다.
산중턱에 올라 당시의 어지러운 시사(時事)를 개탄하고 때로는 한운야학(閑雲野鶴)과 같이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간납대란 그가 한 때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지낸 까닭에 간(諫)과 납(納)의 두 자를 따서 간납대(諫納臺)라고 했다고 한다.
가재미골(인후동)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들어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가재미 모습 같다고 한 구전은 그릇된 설이며 가잠동(可潛洞), 가장곡(可葬谷)을 가재미골이라고 했는데 감여가(堪與家)의 설에 의한 것 같다.
가마귀골(중화산동)
현재의 예수병원을 찾아가는 포장 잘된 고개를 촌노(村老)들의 구술(口述)에 의하면 옛날에는 다당부리가 돋아난 듯 울퉁불퉁하다고 하였는데 이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얌전한 여인네의 가리마처럼 반듯하게 뚫린 모래밭과 마주치게 되고, 이 세내(三川)를 끼고 한동안 걸어가면 훤히 트인 들녘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 들녘은 완산부의 3대들녘의 하나인 금사평(錦絲坪)머리밭이다.
이 구릉지대 안에는 조상의 만년(萬年) 유택지(幽宅地)인 소위 명당(明堂)이 많다고 하는 외칠봉(外七峰)의 한 봉우리인 매화봉(梅花峰)이 있으며 매화봉 아래 꽃밭정에는 돌곡지(桃花地)로 넘나드는 따비골이 유명하다.
그 건너편으로 먹음직스런 복숭아 과수원이 만경창파처럼 쫘악 깔려 있는데 이 곳을 가마귀골이라고 하는데 이 곳에 오두지맥(烏頭之脈)이 있다고 해서 가마귀골이라고 한다. 설(設)에 의하면 조선 명종(明宗)때 어느 다섯 선비들이 이 가마귀골 머리에 정자를 짓고 모악산 그 아래 들녘으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벗삼아 세정에서 묻은 티끌을 털면서 시조를 읊었다니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풍정을 자아낸다.(전주시청 홈페이지와 전주문화원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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