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은 사회 계급상으론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글에 능하고 가야금이나 거문고 등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의녀로도 활약한 까닭에 약방 기생이라 했다. 상방 기생으로 바느질을 담당하기도 했다. 주로 이들은 연회나 행사 때 노래와 춤을 추거나 거문고와 가야금 등의 악기를 다루기도 했다. 조선 왕조는 전 시기에 걸쳐 지방에 관기를 두어 목민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를 접대하도록 했다.
고결한 인품의 선비 율곡 이이와 유지의 사랑은 애틋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거문고 잘 타기로 유명한 상림춘과 신종호, 문장가 목계 강혼과 성주 명기 은대선 등 대부분 기생들은 얼굴이 예쁘고 춤을 잘추고 노래 잘했다. 산호주는 얼굴이 박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에 반한 박생과의 러브 스토리가 나온다.
일편단심 한 사람만을 사랑하여 절계를 지키기도 했다. 청주의 홍림을 사랑한 김해월과 목숨으로 절계를 지킨 전계심, 첫사랑을 따라 죽은 연심, 부사 따라 순절한 매화, 망나니 심희수를 입신출세 시키고 심씨 선산에 묻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스스로 저승길을 택한 일타홍의 목숨과도 바꾼 사랑에 숙연해진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이안사와 고려때 전라도 전주의 명기 애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와 이매, 술과 풍류를 좋아한 호탕한 성격의 송강 정철과 관비, 여덟살 어린 나이에 장원 급제한 이시향과 초선, 개국공신 함부림과 전주 관기 막동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함부림(咸傅霖, 1360년~1410년)은 1392년에 이성계가 득세하자 길재, 이색, 정몽주의 길을 가지 않고 병조의 정랑으로 도평의사사와 경력사(經歷司)의 도사를 겸했다. 이 해 7월에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추대한 공으로 삼등공신이 된다.
그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이다. 함부림이 조선 팔도 감사를 모두 역임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나.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에 “우리 조정에서 팔도(八道)의 감사(監司)를 모두 지낸 사람은 단지 두 사람뿐으로 함부림(咸傅霖)과 반석평(潘碩枰)인데, 반석평은 또 오도병사(五道兵使)도 지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았다.
태종 2년(1402) 1월 20일 충청도 관찰출척사
태종 5년(1405) 7월 8일 경기도 관찰사
태종 6년(1406) 윤7월 13일 경상도 관찰사
태종 8년(1408) 7월 8일 풍해도 관찰사
충청, 경기, 경상, 황해 4개도의 감사를 지낸 것으로 조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함부림의 졸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경기·충청·전라·황해 4개도의 관찰사를 지냈다”고 하여, 경상도가 빠지고 대신 전라도가 추가돼 혼란스럽다.
그러나 위 모두를 다 인정하더라도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기록은 없으므로 함부림이 팔도 감사 모두를 지냈다고 할 수 없다.
△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품
함부림은 정종 2년(1400) 1월 24일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다음해 태종 1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재임기간이 1년 2개월 정도 된다. 태종 1년 1월에 다시 안렴사제로 돌아가 조휴(趙休)가 전라도안렴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은 3월에 하였다. 전라감사 재임 중에 그는 <석전의식(釋奠儀式)> 간행을 추진하여 후임인 조휴와 전주판관 허조(許稠)에 의해 간행을 보게 되었다. 권근의 『양촌집』에 <석전의식> 의 발문이 전한다.
<용재총화> , <연려실기술> 등에 전라감사 때 기생과 얽혔던 일화가 전한다. 그가 젊었을 때에 화류계에서 방랑하였으나, 직무에 임해서는 신중하였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전라감사로 선정을 베풀어 소문이 자자하였다. 전주기생을 사랑하여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호패를 주고 몰래 따라오라고 하였다. 기생이 전주부윤 이언에게 이를 고하고 하직인사를 올리니 이언이 함부림을 절조 있는 선비로 여겼는데 하품의 인물이라고 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함부림의 솔직함을 좋아하고 이언의 빡빡함을 비웃었다.
<태종실록> 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에 전라감사로서 치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그의 성품을 논하면서, “함부림은 강직하여 지키는 바가 있고, 조정에 서서 과감하게 말하고 업무 처리에 민첩하여, 이르는 곳마다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 경기, 충청, 전라, 황해 도관찰출척사와 동북면 도순문찰리사를 역임하였는데, 청렴결백한 것으로 자임하여 감사의 위엄을 떨치고, 일찍이 굽히거나 흔들리지 않으니, 부내(部內)가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라고 하였다.
18세기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보면 8도의 감사를 모두 지낸 사람은 함부림과 반석평(潘碩枰)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다.(이동희 예원대교수)
강원도 강릉시 홍제동에 있는 함부림의 묘에는 1907년 그의 후손 함동호(咸東鎬)가 지은 묘갈명이 있는데 '팔도감사를 지냈다(歷八道伯)'는 내용이 있지만 후세에 세워진 것이라는 점에서 사실 여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그는 조정에 있을 때는 바른말을 하여 관리로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고려 말기에 출사한 인물로, 이때부터 화류가로 방랑해 풍류남아로 명성을 떨쳤다.
다음은 야사(野史)와 조선해어화사, 용재총화 등에 전하는 이야기다. 막동은 의술에 재능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전라감사로 전주에 머물게 됐다. 으레 감사방에는 감사를 모시는 기녀가 있어 객고를 풀어주고 여러 가지로 위로해주었다. 그러면 풍류를 아는 감사는 마음이 풀린다.
“내 여러 지방에 가보았지만 너같이 똑똑한 기녀는 처음이구나.”
“소녀는 전주 태생이옵니다. 이제 전주에서는 이름이 알려졌으나 한양에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기녀들은 모두 한양으로 올라가야 출세의 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 전주 기생 막동 역시 감사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갈 생각을 품고있었다.
“오냐, 좋다. 너만 따르면 한양이고 어디고 가자꾸나.”
“대감의 말씀이 정말이오리까?”
“그렇다. 거짓말이야 하겠느냐!”
함부림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일이 갈수록 젊은 여성이 마음에 들었다. 저녁이 되어 그녀의 위로를 받으면 새로이 생명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함부림은 명재상이라 불리며, 무슨 일에든지 근엄하고 성실하여 공사를 잘 처리했다. 함부림의 나이 오십이 거의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장년의 힘이 남아 있었다. 오히려 기녀 막동에 대한 연연한 마음은 더욱 커갔다.
풍류남아로서 화류계에서 많은 기녀를 마음대로 꺾은 그도 이제는 철이 드는지 한 여성에 대한 정이 더욱 깊어가는 듯했다.
함부림은 ‘내 어찌 된 셈인가’하고 홀로 생각하며 장차 전주를 떠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막동은 이럴 때면 달려들었다.
“대감, 이제 가시면 언제 오시나요?”
“다시 오기 어렵다.”
“그러시면 천첩을 아주 버리시나요?”
“버릴 수가 없구나.”
함부림은 막동을 버리기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럴 때면 막동은 감사에게 더욱 매달렸다.
“소녀도 한양으로 갈 터이니 이곳에서 관기의 적을 뜯어버려 주셔요.”
“오냐. 그러면 내가 호패를 주마.”
함부림은 막동에게 호패까지 떼어주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떠났다.
전주의 관기로서는 출세할 좋은 기회였다. 임과 이별한 후 잠시 있다가 막동은 집안일을 정리하고, 한양으로 올라갈 차비를 했다. 언제 오라는 한양의 기별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자기 일이 끝난 후 막동은 전주부윤에게 하직을 고했다.
“사또, 쇤네는 한양으로 가겠나이다.”
막동이 부윤에게 말했다.
“무슨 소리냐? 관기는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아니오이다. 전에 내려오시던 감사를 따라갑니다.”
“전의 감사라니, 동원군 함부림 대감 말이냐?”
“그러하오이다.”
“안 될 말이다. 동원군은 우리나라의 명재상이시다. 더구나 지금 대사헌으로 있는 분이 관기를 떼어 간다는 말이냐? 거짓말이렷다.”
전주부윤은 좀처럼 믿지 않았다. 막동은 함부림 감사가 주고 간 호패를 내놓았다. 그래도 부윤은 믿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헌부의 대사헌으로서 관기를 부른다는 문서까지 내놓았다. 이제는 부윤 이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국가의 감찰을 맡은 법관이 어찌 관유물인 관기를 데려간다는 말이냐? 기막힌 노릇이다. 나는 그래도 함 감사는 절개 있는 선비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아주 하품 인간이로구나.”
이언은 매우 불쾌해하며 막동을 보냈다.
이제부터 전주 관기는 어엿한 대사헌의 첩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함 감사는 관기를 한양으로 불러왔으면서도 그녀를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다.
“대감, 어인 일로 불쾌하게 생각하시나이까?”
“대사헌으로서 관기를 건드릴 수 없어 그런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만난 함부림은 전날 전주에서 놀았던 생각을 하고, 다시금 옛정을 이어보았다.
함부림은 청년 시절의 방탕한 생활이 원인이 되었는지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눕게 됐다. 한번 자리에 누워 세간의 일을 잊고 있으니 더욱 처량해질 뿐이었다. 그런 중에 자기 앞에 있던 딸이 병들어 죽었다.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전에 부리던 종 한 사람이 병간호를 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술도 먹지 않으며 본부인은 커녕 첩 한사람도 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때로는 끼니까지 걸렀다. 삼등 공신에 봉군까지 받은 사람이 아주 꼴사납게 된 것이다.
한편 막동은 감사의 손에서 다시 관기로 들어가 의녀가 되어 여의로서 이제는 궁중에서 자리를 튼튼하게 잡았다.
막동이 기생 일을 계속하던 중,다른 기생이 발작을 일으켰다. 막동은 침착하게 응급처치를 했다. 이를 본 한 남자가 뜻밖에 제안을 하는데 그 남자는 어의 '허도'였다. 막동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입궐을 제안한 것이다.
태종의 후궁이 병이 들었지만 어의가 남자라는 이유로 치료를 거부했다. 당시에는 여인들이 남자 의원에게 치료받기를 꺼려해 죽는 일이 많았다.
자신의 행실이 밝혀질게 두려운 함부림은 반대를 하지만 태종은 결과를 보고 결정키로 했다.
막동은 의술 공부에 매진을 했고 마침내 효빈을 치료를 하게 됐다. 효빈이 치료 도중 혼절을 했지만 치료를 잘해 그 이름이 드높았다.
막동은 함부림이 불우한 생활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병중에 찾아왔다.
방 안에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함부림은 대변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여의는 손수 방을 치우고 누워 있는 함부림을 바라보았다.
“대감 쇤네가 왔소이다.”
막동이 귀에 대고 한마디 했다.
“누구냐?”
“전주에 살던 관기입니다.”
“응, 그러냐? 이제 알겠다.”
“대감, 왜 이렇게 초라하게 지내십니까?”
“세상은 일장춘몽이니라. 아마 전날 풍류장에서 잘 놀던 죄가 닥쳐 온 모양이다. 그러니 나의 일은 걱정 마라. 그래, 너는 잘 지내느냐?”
“쇤네는 대감의 천거로 궁중에 들어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한 일이다”
막동은 지난날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판서까지 지낸 함부림은 얼마 후 1410년에 쉰한 살에 세상을 떠났다.
'턴코트(turn coat)'는 변절자를 의미하는 단어로, 전쟁 중 상대 진영의 코트로 바꿔입은 자를 뜻한다. 전쟁 중 어제까지만 해도 같은 편이었던 자가 적으로 돌변하는 것은 매우 끔찍한 경험일 터이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적들을 향해 돌격해야 할 아군이 방향을 바꿔 나에게 돌격한다면, 아마 그 전쟁의 승자와 패자는 그 순간 바뀌지 않을까? 막동과 함부림을 통해 잠시 가져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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