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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의 행복산책

전라감영 선자청

 

 

전주 부채는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과 장인 정신이 결합됐다. 대나무 살과 한지의 날개를 타고 뻗어나가는 바람의 기세가 남달랐다. 전주는 역사를 관통하는 바람의 기세를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을 한 가닥씩 가려 뽑아 살을 만들고, 그 살에 사람들의 염원을 견고하게 심어 놓은 것이 전주 부채다. 전주는 조선시대 호남제일성으로, 전라도를 통괄하는 전라감영이 위치했던 곳이다. 감영에 부채를 제작하고 관리하는 선자청(扇子廳)이 있었다. 전주 옛 지도를 보면 선자청은 4채의 건물로 구성됐으며 매우 큰 규모였다. 전라감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왼쪽 상단부터 약재를 다루는 심약당(審藥堂)과 법률을 다루는 검율당(檢律堂), 그리고 그 밑으로 진상청(進上廳)이 있었다. 이를 둘러싸고 한지(韓紙)를 만들던 지소(紙所)와 한지를 인출하는 인출방(印出房)이 배치됐으며, 그 남쪽 방향으로 선자청(扇子廳) 4채가 매우 크게 자리했었다.

반석리(현 서학동)와 가재미골(현 인후동)은 부채를 만드는 선자장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경국대전을 통해 지방의 지장(종이 뜨는 장인) 분포를 보면, 전주와 남원이 각각 23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앞서 고려시대엔 전주의 간장지(簡壯紙)와 선자지(扇子紙)가 우수하다는 내용을 임원십육지 이운지(怡雲志) 동국지품(東國紙品)에서 찾을 수 있다. ‘송나라 사람이 여러 나라 종이를 평가하는데 반드시 고려 종이를 최상이라 한다. 당시 여러 나라의 공폐(貢幣) 종이 중 전주. 남원의 선자지, 간장지, 주유지(注油紙), 유둔(油芚)은 천하에서 제일이다’고 했다. 또 성호사설 인사문 생재엔 ‘닥나무는 전주 만마동의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19세기 완산부 지도를 보면 6칸의 맞배집 건물 2동과 2칸의 팔작집 2동이 있어 모두 16칸 규모의 선자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선자청 위쪽으로는 종이를 뜨고 관리하는 지소도 있었다. ‘전라도관찰사영지’를 보면 칠첩선, 백첩선, 칠별선(漆別扇), 백별선(白別扇) 등이 기록됐다. 또 군액(軍額)에 영장인(營匠人)이 2,000여 명으로 돼 있다. 선자청에서 1920년까지 부채 제작이 이뤄졌다.

 

그러다가 1921년에 전북도청사가 들어서면서 사라졌다. 현재 완산경찰서 뒤편 사거리 모퉁이, 대한생명 빌딩 건물 부근이 그 위치로 추정된다. ‘매일신보’ 1941년 7월 1일자를 보면 전주 부채의 한해 생산량은 70 여 만 자루에 이르렀으며,  특히 여름이면 전국의 시장에 전주 부채가 판매됐다고 했다. 해방 후 석소마을(아중리), 가자미마을(인후동), 새터, 상황당, 안골 등 5개소에 부채마을에 형성 이를 제작, 판매했다. 1970년대 선풍기가 보급되기 이전까지 이같은 상황은 계속됐다. 전라감영 복원이 되는 이즈음, 그 옛날의 선자청을 살려 특색있는 전주가 되도록 하기 바란다./이종근(삽화 새전북신문 정윤성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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