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은 정천면 망화리를 흐르던 정자천의 하류였으나, 지금은 용담댐의 건설로 수몰돼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중국 정자(程子)의 동생 정이의 호가 이천(伊川)이기에 정자천의 하류를 ‘이천’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입니다. 고지도인 『광여도』와 『해동지도』에는 이포 앞을 흐르는 강을 이천이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천의 지명 유래와 관련이 깊은 이포(伊浦)는 이천 변에 위치한 포구라는 의미로, 1872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비로소 등장합니다. 『호남읍지』에 “정자천은 심원동(尋源洞)에서 발원을 하고 이천(伊川)으로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자천에서 이천이라 불렸던 구간인 망화리 일대는 현재 상당 부분이 용담호에 수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수몰되기 이전에는 모정리와 망화리를 이어주던 이천 구간의 다리들은 여름철 홍수가 있을 때마다 물이 불어 오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향민들은 그때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멀리서 수화(手話)로 의사 소통을 하였던 시절을 회고하곤 합니다. 이포 마을은 망화리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수몰됐습니다.
‘찬수는 친구들을 따라 망화리로 놀러가게 됐다. 경운기 소리가 골목을 흔들고 친구들을 태운 경운기는 골목길을 빠져 나와 학교쪽으로 나 있는 신작로를 향해 쏜살 같이 달리고 있었다. 달빛이 너무 황홀하다. 찬수와 친구들은 여의곡(여실)마을을 떠나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친구들의 노랫 소리가 어두운 들판을 울려 퍼지게 했다. 소쩍새가 노래하고 부엉이도 노래를 부른다. 여의곡 마을을 벗어난 경운기는 두곡을 거쳐 신촌을 지나 막 망화리로 나 있는 농롯길을 달리고 있었다. 덜커덩대는 자갈밭이지만 경운기는 어두운 밤길을 잘도 달리었다. 여기저기서 손짓하는 목화밭이며 뽕나무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망화리 언덕배기는 오래된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망화리 다리를 지나면 마을의 입구가 보이었다. 그 당시만하여도 초가집으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도희네 집에도 초가집이어서 병준이랑 상재랑 놀러와 있었고 찬수네 친구들을 싣은 경운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날파리들과 하루살이 같은 해충들이 날아 들었다. 모깃불을 통하여 옷을 말리고 있었다. 강변에서 보면 용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었던 바, 바로 고남미재였다. 꼬불꼬불 이어지는 신작로 사이로 밤 풍경들이며 어둠속에서 들리는 소쩍새 울음 소리와 부엉이의 울음소리가 왠지 음산한지 모르겠다. 물귀신이 나올듯한 섬뜩함이었다. 그래도 혼자 보다 여럿이서 강가에 노는 것 역시 무섭지 않았다. 그날 날 밤을 새고서여 망화리에서 집으로 돌아 올 수가 있었다. 새벽이 되자 운영이는 경운기를 앞세우고 망화리 친구들과 헤어지고 오던 길에 가던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는 김문수(용담호)의 ‘잃어버린 고향(장편소설)’ 제47회의 글 가운데 일부입니다. 사진은 1996년 여름의 모습으로 정천면 망화리(網花里) 들녘이 보입니다. 가운데 큰길은 용담과 금산 가는 국도입니다. 그물로 자라를 잡는 형국인 어망곡(魚網谷)이 이포 쪽에 있고 척금 쪽에는 이목곡(梨木谷)이 있어 그물의 ‘망(網)’과 배꽃의 ‘화(花)’를 취해 망화리라고 했습니다. 2000년 용담댐 건설로 망화리 전체가 수몰되어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용담댐 수몰로 주민은 한 사람도 살지 않고 산과 물만 남아 있습니다.
나 하나의 모든 그리움, 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늘 속앓이를 했던 숱검댕이 가슴이 그래도 이 계절에 퍽이나 고맙게만 느껴집니다. 금빛 햇살이 어찌나 유혹하는지 자연의 향기따라, 이름 모를 들꽃 향기따라 촉촉히 상념에 젖어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나라, 사람이 한울인 나라, 바로 그 나라, 바로 그 망화리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합니다. <글=이종근 기자, 사진=이철수 용담호사진문화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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