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왕말(水王村):전주고등학교 서쪽 담장 일대
전주가 왕도(王都)였음을 말하는 동네 이름이 있다. 바로 물왕말(水王村)이다.
우리는 흔히 물왕말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왕물', '물왕멀'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말'은 옛 제도의 마을을 말했고, 국어 사전에는 마을의 준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유명사인 물왕말을 변형된 물왕물 혹은 물왕멀로 부르는 것은 좋은 이름을 두고 별명을 부르는 것과 같으니 이 기회를 빌어 바르게 불러 주기를 바란다.
물왕말은 전주고등학교 서쪽 담장을 따라 뻗은 도로가 동초등학교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 도로 양편의 동네를 일컬어 부르는 이름이다.
이 마을을 물왕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후백제의 왕 견훤이 이곳에 왕성(견훤성)을 쌓고 나라을 경영한데서 연유됨이다.
이를 고증한 전영래 원광대학교 교수의 《전주(全州)· 동고산성개괄 조사보고》에서 살펴보면 "고토성(古土城)은 부북오리(府北五里)에 있다 하였는데 이가 견훤도성(甄萱都城)의 외성(外城)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주부사(全州부史)(1943년 발행)에서는 현 전주시청 노송동(老松洞) '물왕말'(水王村)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라고 설명하면서 전주부사 도성(都城)의 대요를 살필 수 있는 다음의 글을 인용하였다.
"전주역(현 전주시청) 동(東) 반태산(盤台山, 속칭 반태미)의 구릉지는 후백제견훤왕궁지로 보아도 대과(大過)없으며 또 승암산(僧岩山) 남동방성황사소재(南東方城皇祠所在) 산곡(山谷)의 성지가 동왕궁(同王宮)에 가장 인접한 산성으로 보인다."
"전주역 동(東, 현 전주시청 동), 고산가도(高山街道, 전주중앙성당에서 코아백화점 옆으로 해서 전주농고 앞을 지나 고산에 이르는 도로)와 구(舊) 동정리에 통하는 도로(전주고교 동편에서 서낭댕이를 거쳐 진안으로 가는 도로)의 중간에 낀 일련의 구릉지대는 고래(古來)로 후백제왕 견훤이 쌓은 토성지로 전해져 왔고 특히 이곳은 왕궁지로 추정되는 증거가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연화문화당(연화문와당)도 그 물증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이 지역이 전주의 고성지(古城址)중 가장 형승지(形勝地)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일대의 민가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왕고(往古)의 왕성의 건축초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각형석재(角形石材)나 대형천석(大形川石)이 무려 일만여개가 현존하고 있는 점이다."
그리고 전영래 교수는 "중심왕궁 · 관아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곳은 전주부사에서 지적한대로 전고(全高)에서 반태산에 이르는 중노송동 일대였을 것으로 1930년대에 건물초석 1만여개가 산견(散見)되었다는 점이나 신라식 연화문와당이 출토되었다는 점으로도 짐작이 간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고토성재부북오리(古土城在府北五里) 유기지(有基址) 견훤소책(甄萱所策)'이라 한 것도 이곳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책 사조조에 '여단 재부북오리라 하였는데, 이 여단지가 바로 반태산 이므로 이 고성지는 반태산 일대임을 알 수 잇다."라고 결론했듯이 물왕말을 포함한 반태산, 전주고교, 동초등학교가 있는 일대가 견훤성이었고 중심왕성지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전고 서편도로가 담장 끝 부근까지만 개설되고 반태산이 전혀 개발되지 않고 있을 때) 물왕말의 친척집이나 친구집에 갔을 때 이곳에는 바가지샘(동네 공동 우물)이 네다섯 곳에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빈태산의 중턱였음에도 불구하고 맑은 물이 흘러 넘치는 샘이었다.
이곳 일대가 견훤왕성이었다면 아마도 이곳에서 솟는 우물에서 왕성의 필요한 물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아지고 또 후백제가 고려에 통합되어 왕성이 없어지고 우물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니 이 마을의 이름을 왕이 먹던 샘물이 있는 마을이라해서 물왕말(水王村)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한다.
유장우선생 수상집(守堂 柳章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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