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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이야기

줄포이완용비석,거꾸로 세워지다


청렴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기에 박수량 선생의 백비가 공직자들에게 소리 없는 울림을 주고 있다. 조선 중기 때의 문신 박수량(1491~1554) 선생의 비석엔 아무런 글자도 없다.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 있는 그의 묘 앞 비석은 그래서 ‘백비’(白碑)라고 불린다. 형조판서, 한성판윤, 우참찬, 중추부사 등 38년 동안 조정의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쳤던 그는 서울에서 변변한 집 한 칸 갖지 못했을 만큼 청렴했다. 암행어사 탐문에서도 “시골집에서도 끼니때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을 정도다.
박수량 선생은 6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묘를 크게 하지 말고 비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명종이 청백리의 죽음을 슬퍼해 서해 바다에서 빗돌을 골라 하사했다. 자손들은 “청백했던 삶을 비문으로 쓰면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알려 누를 끼칠 수 있다”며 백비를 세웠다. 임금의 하사품을 무시하지 않고 선대의 유언도 지킨 셈이다.

최근 청백리의 표상으로 꼽히는 박수량 선생의 백비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정부 부처 공무원들이 호남의 대표적인 선비의 고장인 장성을 찾아 백비를 견학하는 현장학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1858∼1926)은 전북과 인연이 깊다. 이완용은 구한말인 1898년 전라관찰사(지금의 도지사)를 지냈고, 인생 끝까지 일제에 기생하다 죽어서 묻힌 곳 또한 익산이었다. 이완용의 공덕비가 한때 부안군 줄포면 면사무소 후정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898년 가을 밤, 갑자기 큰 해일이 들이닥쳐 줄포 지역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으로까지 밀렸다.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부안 변산구경을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이같은 참상을 살피고 부안군수 유진철에게 난민구호와 언뚝거리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제방은 견고하게 수리됐고 오늘의 대포가 생겼다. 이후 일제때 서반들 매립공사가 이뤄져 오늘의 줄포시가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이듬해 부안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비를 장승백이(지금의 장성동)에 세웠다. 이른바 공덕비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는 수난을 맞았다. 비석은 개인에 의해 보관돼 오다 1973년 당시 줄포면장 김병기씨가 3,000원에 구입, 줄포면 면사무소 후정에 세워 놓았지만 1994년 ‘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철거됐다. 지금은 줄포면사무소 지하 창고에 반파된 채 거꾸로 선채 보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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