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전의 홍살문과 하마비
경기전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 우선 하마비(조경묘에는 이와 다른 하마비가 있음)를 만나게 된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진 풍상에 닳은 비석. 그 앞에서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아울러 경기전 내부로는 잡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리라.
눈썰미가 제법 있는 사람이라면 하마비를 떠받들고 있는 두 마리의 사자(또는 해태, 이하 같음)를 볼 수 있다.
경기전이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고, 그래서 근처에 있던 향교까지도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하여 화산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이 하마비,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것이다.
뒷면에는 1614년 세웠다는 내용이 한 줄로 되어 있으며, 오른쪽 옆면에는 1856년 중각했다는 글귀가 있다.
두 마리의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하마비는 좀처럼 보기 드물고, 또한 셈세하면서도 세심한 정성을 기울인 조각품이란 생각이 든다.
왼쪽 사자(우리가 바라보아서 오른쪽)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것에 비해, 그 옆의 우측 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사자는 수놈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자는 암놈이다.
다시 말해, 두 마리의 사자는 암수 각 한 마리로 조선이 음양오행이라는 이원론적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하마비의 동물상이 사자인지 아니면 해태상인지 정확치 않다.
해태상이라 한다면 경기전 앞산이 승암산, 즉 불을 머금은 화산(火山)이므로 그렇게 배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옛 사진을 보면 하마비의 방향이 본래는 지금과 달리 시내쪽을 향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이 또한 의문스럽다고 한다.
경기전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높이 선 홍살문을 만나게 된다.
홍살문은 궁전이나 관아(官衙), 능(陵), 묘(廟), 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으로, 대개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가운데에 태극 문양을 넣었다.
홍살문에 단청의 오방색 가운데 붉은 색을 칠한 이유는 태양을 숭배하던 의식에서 비롯했다.
태양의 색은 음양에 있어 양(陽)의 색인 붉은색이다. 붉은색이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준다는 이유인데, 동짓날 팥죽을 끓여먹는 풍습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홍살문 가운데에는 삼지창이 만들어져 있는데 삼지창의 목 부분에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삼지창 역시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홍살문에 있는 붉은색과 태극 문양을 통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고 잘 순환하면 양의 기운이 충만해서 건강하고 성공하리라는 믿음을 넉넉하게 읽을 수 있다.
바로 이처럼 홍살문은 경기전을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악한 마음을 경계하고 물리치기 위한 것이이라.
△사찰에 하마비가 있는 까닭?
예전에 세워진 사찰의 일주문이나 천왕문 앞에서 종종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라는’는 의미의 ‘하마비(下馬碑)’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마비가 부처님이 계시는 신성한 곳이므로 모두 말에서 내리라는 의미로 세워 두었을까? 하는 데는 의문이 있습니다.
전주에는 경기전 등 모두 5개의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어르신은 전주향교 앞의 것입니다. 한옥마을의 기와집에 흐르는 빗물은 지금까지의 발자국들을 씻어 내리고 나는 또 새로운 발자국을 만들어 냅니다. 또 씻겨 지면 그만일 것이지만 그것이 씻겨 진다고 내 발자취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빗속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의 또 다른 모습은 답답했던 가슴을 탁 트이게 합니다. 한없이 작은 공간에서 아등바등 거리며 살았었나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의 모든 일이 쉬운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작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미리 겁부터 먹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직 희망이 남았는데 미리 포기부터 하진 않았었는지 하마비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을 냉정하게 뒤돌아봅니다.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세상 모든 게 다 내 중심으로 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일이 다 세상 중심이 된 것 같습니다. 나이 탓은 아닐까요? 하마비는 욕심을 내리고, 잘 난체 하는 내 마음을 가볍게 풀어헤치는 죽비로소이다. 꽃은 피워야 하고 술은 마셔야 하고, 님은 만나야 하고, 물은 흘러가야하고 하마비 앞에서는 내려야 함이 마땅합니다.
△전주향교 하마비
전주향교(全州鄕校, 사적 제379호)는 오목대 밑자락 기린로 변에 있습니다. 설립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1354년(고려 공민왕 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의 위치는 풍남동(경기전 북편)에 있었습니다. 이곳의 하마비는 1519년에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지상 높이 198cm, 폭 49cm, 두께 30cm의 크기로 전면에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 이곳을 지나가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뒷면에 ‘정덕기묘구월일입(正悳己卯九月日立)’이라 새겼으니 중종 14년(1519년)에 해당됩니다.
△관성묘 하마비
전주 관성묘(전북문화재자료 제5호)에도 하마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삼국지에 나오는 중국 촉한(蜀漢)의 장수 관우를 무신(武神)으로 모시는 사당으로 주왕묘, 관제묘라고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 장군 진인이 관우신장의 가호를 받는다고 믿고 자신이 있던 곳에 묘를 세워 관우의 신상(神像)을 안치한 것이 시발점이 됩니다. 전주에는 1895년(고종 32) 관찰사 김성근과 남고별장 이신문이 유지들의 헌금을 받아 건립합니다. 입구엔 앞쪽에 대소인원개하마라 쓰여 있고, 옆면엔 광서17년(1891) 신묘5월립이 라고 쓰인 하마비가 있습니다. 사당 안에는 관우의 상이 있고, 그 양쪽 벽에는 ‘삼국지연의’의 내용을 그린 벽화가 있습니다. 관우의 신성을 믿는 사람들은 매년 초 이곳을 찾아 한 해의 행운을 점치기도 합니다.
△조경묘 하마비
새 왕조의 건립을 뜻하는 ‘조경(肇慶)’의 가슴 벅찬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은 어떠했을까요. 조경묘(肇慶廟, 전북 유형문화재 제16호)는 경기전 구내 북편에 있습니다.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를 봉안한 곳으로 1771년(영조 47년)에 세웠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1세손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실의 중흥을 꿈꿨던 영조의 강한 의지로 창건됐습니다. 바로 이 무렵, 하마비가 세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이 많다. ‘하마비(下馬碑)’이라는 글귀가 이곳을 지키면서 한 서린 삶을 살다간 마지막 황녀 이문용여사가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경기전 하마비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하마비 2점이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하나는 읍리하마비(邑里下馬碑, 전남 완도군 청산면 읍리 931번지, 전남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1984년 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로 문화재로 지정됐습니다. 또 전주 하나는 경기전 하마비(전북 유형문화재 제222호)는 여느 하마비와는 다르게 판석 위에 비를 올리고, 그 판석을 두 마리의 사자(혹은 해태)가 등으로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태로, 단지 하마(下馬)의 의미로서만이 아닌 경기전 수호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마비를 받들고 있는 두 마리 해태(또는 사자)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석의 형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형태인만큼 조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경기전이 어떤 곳인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이곳의 하마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까닭입니다. 하마비엔 두 줄로 ‘지차개하마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니 이곳에 이르는 자는 계급의 높고 낮음이나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리라. 하마비가 건립된 해는 왜란 때 소실된 경기전이 중건된 1614년이며, 1856년(철종 7)에 중각(重刻)됐습니다. 경기전이 조선왕조의 상징인 태조 어진을 봉안한 곳이고, 그래서 근처에 있던 향교까지도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화산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이 하마비, 수문장의 위력은 대단했을 터입니다. 해태 한 쌍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경기전을 지키는 것은 시대를 관통해 전주 문화의 토대를 이루고 있으면서 당신 곁에 서있습니다.
△조경단 하마비
조경단(전북 기념물 제3호,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의 묘역)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가 갖은 우여곡절 끝에 1900년(광무 4년) 세워졌다는 연구가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전주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이충규씨는 이 하마비는 당초엔 풍비(豊碑)로, 정유재란 때 불탄 경기전 진전을 건립하면서 태조의 공적과 피난간 어진이 돌아온 사실을 담아 세우려고 했지만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한참 후인 1900년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됐다고 주장합니다. 이씨는 비가 만들어진 시기는 경기전이 중건된 1614년 4월부터, 건립이 중단된 인조반정 이전으로 보았습니다. 그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흠집 난 비신은 단 아래에 버려져 있다가 1900년(광무 4년)에 담장 밖 하마비(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대인이든 소인이든 모두 말에서 내려라는 의미)로 세워졌습니다. 그후 완전하게 지금의 자리에 안착한 것은 1972년 이환의 전북도지사때 담장을 만들 때였다고 합니다. 이곳의 하마비는 당시 정치상을 잘 반영한 사적물로, 세상에 나타내지 못하고 백비(白碑)로 묻혀 묵언(默言)으로 그 시대를 대변한 비라 할 수 있습니다. 조경단의 하마비와 조경단비는 건립 당시 다듬어진 것이 아닌, 광해조 때 만들어진 것 임을 밝혀낸 만큼 인조반정과 대한제국 수립 등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된 사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마비를 지나면서
하마비를 통해 하나의 깨우침을 얻을 수 있지 않을런지요? 우리 인간은 본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처럼 명명백백한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갈등의 원인은 인간이면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탐착’에서 비롯됩니다. 재물에 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처자권속에 대한 지극한 애착이 우리를 끝없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부처 가르침의 첫 번째가 바로 ‘버리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마비는 이같은 세속적인 의미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몸이 말에서 내리듯, 하마비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짊어지고 있는 온갖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수행적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자연을 근본삼아 본래 맑은 성품으로 살아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 영혼 맑아지는 날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고 싶습니다. 다시 살게 하고 살고 싶어지게 하는 내 안의 어린 왕자처럼.
여러분들은 신분 높고 낮음을 떠나 누구든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라는 경고문을 인정하시나요? 부정하시나요? 예전 같으면 한옥마을을 지날 때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함이 당연할 터이지만, 지금은 하마비 앞으로 수 많은 차량들이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다닙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젠 그 본연의 기능은 잃어버린 하마비이지만, 아름다운 선인들의 작품으로, 여전히 든든하게 전주 한옥마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어떤 하마비가 가장 연장자 일까’, 한옥마을로 마실을 와서 수수께끼의 정답을 찾아봄직합니다. 답사 코스로 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소 위엄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요. ‘네 이놈 어서 내려라’ 우리네 삶의 죽비같은 존재가 하마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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