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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사람

허영욱명인의 뻣상모와 자반뒤집기



아버지가 동네에서 소고춤을 곧잘 추셨어요. 보름날이나 모를 심을 때면 풍물굿패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웠죠. 굿쟁이 될꺼냐는 말도 많이 들었는데,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는 말이 맞네요.”

동네에서 소고잽이였던 아버지. 세숫대야를 들고 그 뒤를 따라다니던 아들은 바로 허영욱명인(대한명인 제07-136호 지정, 전주농악전수관 허영욱관장).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뻣상모의 1인자이며, 자반뒤집기의 고수이다. 그가 풍물놀이에 빠진 것은 1969년 전주농림고등학교 농악부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어른들로 구성된 전북농악단 수석단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채상이 주특기였다. “키가 너무 작으니까 소고를 시키더라고요. 당시엔 꽹과리나 장구가 하고 싶어도 선배들이 못 만지게 하니까 몰래 숨어서 연습 많이 했죠.”

담요가 둘둘 말린 듯 천천히 흐르던 시간은 곧바로 이어진 전주농악전수관에서 한꺼번에 낙하선처럼 쫙 펼쳐졌다.

 , 꽹과리, 장구, 북을 나눠 든 농악대가 상모를 돌리며 무대로 진입하더니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시나브로, 갑자기 객석에 흥이 일어나면서 신명으로 철철 넘쳐낫다.

"갱 개개갱 갱 개개갱" 꽹과리가 흥을 돋우자 "덩 궁따궁 덩 궁따궁" 장구채가 좌우로 춤췄다. "둥둥둥둥" "지잉지잉" 북과 징이 가락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이내 어깨가 들썩거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선생이 기다란 흰 종이가 달린 열두 발 상모를 쓰고 나와 돌리기를 했다. 종이가 큰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자 박수가 터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열두 발이라고 했을까?

 1월부터 12월까지 지나면서 희로애락과 새로 다가오는 해를 맞이하고 서로의 묵은 때와 감정을 열 두발 상모에 담아 이를 돌리고 돌리면서 액을 풀고, 희망을 갖기 위해, , 힘을 얻기 위해 돌리는 마지막 놀음은 아니었을까. 상모를 돌린다고 표현함은 어려운 세상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염원이 들어있는 바, 바로 열두 고개로 표현하는 게 삶이 아니던가.

이윽고, 가쁘게 돌아가는 뜀박질이 소용돌이에 휘돌리고 열 두발 상모가 마구 도는 것이 휘몰이다. 어느새 발 디딤새가 단단하더니, 몸을 공중에서 회전시키는 자반뒤집기에 혼을 다 빼앗겼다.

  자반은 생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에 절인 생선을 총칭해 좌반(佐飯)이라고 하며, 사투리 발음이다. 자반 갈치는 소금에 절인 갈치를 말한다. 자반을 구울 때 앞뒤로 돌려가며 익히던 데서 그 모양을 빗대어 나타낸 말로, “몸이 몹시 아파서 엎치락 뒤치락 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의 자반뒤집기는 소고(小鼓)잡이들이 공중에서 연속적으로 몸을 돌려 착지하는 기술. 수백, 수천 번을 연습해야 좋은 소리와 몸짓이 나온다. "소주 한 잔 쭈욱 들이켤 때 손끝까지 찌릿함이 전해지는 것처럼 너희 춤을 보는 관객들도 손끝 발끝 머리끝까지 전율을 느끼게 하라"고 선생이 외쳤다. 어찌 함께 울리지 않고서야 하늘과 땅을 울릴 수 있으며, 하물며 사람들과 어께 동무를 하며 서로 더불어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전주농고시절, 이기주, 백남윤, 나금추 선생 등으로부터 이를 배운 후, 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농악부문 대통령상, 16회 전주대사습전국대회 농악부문 장원(국무총리상)을 수상했다. 1974년 한국민속촌 농악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전주노령민속악회, 보배 사물놀이, 온고을 민속악회 창단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올해로 50여 년째 국악에 미쳐 있다.

좌도가 구성진 맛이 있다면, 우도는 가락이 다양하고 화려해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어울립니다. 지금은 좌도가 활성화돼 있지만, 농고가 민속예술경연대회서 대통령상을 탈 때만 해도 우도 농악이 최고였죠.”

호남농악의 상쇠들은 상모라는 모자를 쓰는 바, 그 위에 다는 날짐승의 깃털 장식을 부포라고 부른다. 호남우도의 상쇠는 뻣뻣한 대공 위에 정연하게 깃털을 꽂은 뻣상모, 호남좌도의 상쇠는 삽살개의 꼬리처럼 부들부들한 부들상모를 쓴다.

그는 특히 뻣상(채상)의 거의 우리나라 마지막 명인으로 외상, 양상, 나비상, 자반뒤집기 등 전 과정을 소화해내고 있다. 호남우도의 멋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풍물의 빠른 기량을 같이 유합해 그만의 독특한 춤사위를 형성, 우리나라 채상의 최고로 일컬어지는 진정한 까닭이다.

"우리 지역 사람들은 마치 강이라든지 들을 닮은 것처럼 순하고 푸짐하고 넉넉해요. 그래서 호남우도농악은 들이 넓은 곳에 발달했습니다. 전라도 지역으로 본다면 이리나 정읍, 부안, 보성까지를 모두 호남우도농악이라 지칭합니다." 한때는 하루에 1-2천여 회씩 자반뒤집기를 했지만 지금은 나이 때문에 그보다는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채상은 명불허전, 호남우도농악을 대표하고 있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

 “코끼리가 터벅터벅 걸어가도 그곳에서 미()가 나오듯이 전통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항시 어른들에게 귀가 먹먹하도록 들었던 말이에요. 기술적으로 농악을 화려하게 흉내 낼 수 있지만 본질에서는 이 담겨야 해요. , 옛 어르신들은 종종 논 한 필지를 갚는다는 말을 썼지요. 똑같은 가락을 쳐도 멋있게 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을 의미하지요

그의 꿈은 우도농악을 전국에 보급하는 것이다. 20058월부터 시작한 전주시민국악교실은 전주시에서 일부 보조를 받고 있지만, 무료로 진행되는 국악교실에 그의 부담은 크다.

   한때 해양경찰로도 일했던 그가 다시 본격적으로 농악을 시작한 것은 87년부터. 이때 전주농고 농악부 출신들과 함께 전주노령민속악회를 만들어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장원을 거머쥐었다.

그는 농고가 생명과학고로 바뀌고 농악부도 없어진 지금, 그는 모교에 풍물패를 만들어 다시 한 번 대통령상을 안겨주고 싶다고 했다. “온 몸에 한이 맺혀있다 보니 아무래도 춤사위가 다르겠죠. 특히 자반뒤집기를 할 때면 온 세상을 다 뒤집는 것 같습니다.”

올해로 우리 나이 예순 넷인 그는 오늘도 느릿느릿 어루만지다, 들썩들썩 요동치고, 사뿐사뿐 재기 넘치다가, 숨 가쁘게 몰아피는 이 놀이를 이어간다. 농악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를 마친 것도 이같은 숱한 명인이 있어서는 아닐까. 그의 울림이 전주를 넘어 전 세계로 울려 퍼질 날은 언제일까.

'징징 박박' 휘몰아치는 풍물의 흥이 더 없이 좋은, 질펀한 놀이터 더 깊은 속으로 빠져들게 하면서 푸진 굿가락을 나에게 선사한 오늘.

그는 한이 있다면 상모놀이로 날려버리고, 서러움이 있다면 부포짓에 던져버린다고 했다.

길의 끝에서 꽃과 나비로 피어난 뻣상모의 흥에 취해 돌고 잦은 가락 속에 서로는 어깨를 들썩이고 어느 새 판은 하늘과 별, 구름, 그리고 달을 벗삼네. 세상만사, 모든 응어리들을 오늘 만큼은 훌훌 떨쳐버리고 뛰자 뛰자, 그리고 또 뛰어나 보세나. 그는 삼백예순다섯날 언제나 코발트빛 하늘에 더 길게, 더 널따랗게 열두 발 상모를 드리운다. 곡절 많은 이 풍진 세상의 파고를 무사히 잘 넘을 수 있다는 모두의 희망과 바람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