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심연의 세계를 가진 명상의 작가
진환 (陳瓛, 1913-1951)
진환은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기용(錤用)이다.
일제 강점기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진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1년만에 중퇴하고 독학으로 미술에 입문하였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도 그는 강한 의지로 21세 때 일본 유학을 실행해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자유롭고 진보적 성향의 그룹전에 꾸준히 참여하면서 일본 미술대학 졸업 후에는 미술학교 강사를 귀국때 까지 하였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10년 째 되던 1943년, 집안의 급한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하여 고향에 정착하였고, 일본에 두고 온 작품을 국내로 가져오려 하였으나 일본의 패망과 광복이라는 긴박한 시국상황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집안 어른들의 주선으로 전주 출신 규수와 혼인하였고, 작품활동을 하면서 부친이 설립한 무장농업학교의 교장으로 일하였다.
1948년 홍익대학교 미술과가 신설되어 초대교수로 취임했고, 학교일과 함께 작가로서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던 중 6.25동란으로 1.4후퇴 때 고향근처의 피난길에서 유탄에 맞아 38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의 사후 32년만인 1983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첫 유작전이 열렸다. 유족들이 소중히 보관해온 일부 작품들과 자료들로 개최되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유실되어
유작은 유화 8점과, 수채화 및 드로잉 등 30여점이 전부이다.
그의 작품은 많은 생각과 자기성찰, 사물에 대한 연속된 관찰을 통해 작업에 몰두 하였다.
황토색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작품은 자연주의적이고 향토적 서정성을 짙게 담아냈으며 대부분의 작품들이 소를 소재로한 것으로 민족의 현실을 반영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격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잚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감한 진환은 민족의식이 강했고 교육자로서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아동을 위한 그림 동요집을 제작하는 일에도 몰두하며,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진환은 미술전문가들에게도 낯선 이름이다. 그는 망각 속에서 재평가의 기회를 기다리며 미술사에서조차 누락된 식민지시대의 서양화가다. 진환과 같이 비중 있는 작가면서도 철저하게 무명으로 일관해온 경우도 흔치 않다.
우리나라 인기 작가인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소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오히려 진환은 이중섭보다 먼저 소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려왔으며, 이중섭의 <가족과 서귀포>라는 작품과 진환의 <천도와 아이들>이라는 작품을 비교해서 보면 많은 유사성이 보인다.
그에 대한 자료가 빈약하고 유작의 수가 적은편이라 할지라도 그에 대한 평가가 다시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서보훈 A-옥션 전무이사
그림1. <진환 사진>
그림2. <자화상>, 종이에 수채, 50 x 38 cm, 1933
그림3. <겨울나무>, 종이에 수채, 30 x 24.5 cm, 1941
그림4. <우기8>, 캔버스에 유채, 34.8 x 60 cm, 1943
그림5. <계절잡묘>, 종이에 수채, 78.5 x 54 cm, 1942
그림6. <쌍방울(자작동요집)>, 25.6 x 20 cm
그림7. <그림동요집(부분)>, 종이에 수채, 25.5 x 40.5 cm, 1949
그림8. <날개달린소>, 목판에 유채, 33 x 23.5 cm, 1935년경
그림9. <구두>, 종이에 수채, 29 x 38 cm, 1932
그림10. <천도와 아이들>, 마포에 유채, 34 x 88 cm, 1940
그림11. 이중섭 <가족과 서귀포>
그림12. 이중섭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