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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추석과 최명희

'한여름에 물들인 봉숭아의 붉은 꽃물이 손톱 끝으로 조금씩 밀려나가 반달이 되고 있을 때, 백로(白露)를 넘긴 달빛은 이슬에 씻긴 듯 차고 맑게 넘치면서 점점 둥글어져, 어린 마음을 더욱 설레게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달력을 들여다보며 날짜를 짚어보고, 다시 손가락을 꼬부려 꼽아보면서, 몇 밤을 자고나도 또 몇 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애가 타던 명절, 추석.'

 

최명희의 수필 「한가위 언저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가위 즈음이면, 집집마다 명일을 쇠려고 부지런히 빨래를 하는 통에 낮에는 간짓대로 받쳐놓은 빨랫줄에 눈부신 빨래가 나부끼고, 밤에는 그것들을 손질하여 다듬는 다듬이 소리들이 달빛 아래 낭랑하였을 겁니다.

 

“간치내(鵲川) 작은 아부지 오시네요.”
큰집 마당에 아직 들어서기도 전에, 사촌 언니의 반가운 목소리가 고삿으로 울려오는 것이, 아마 아까부터 길목을 내다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목소리에 탐스럽게 익어 벌어진 밤송이의 아람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리고 연지(嚥脂)같이 물든 대추나무 대추들이 저녁 햇살에 수줍게 빛났다.
객지로 나간 아우들과 오랜만에 만난 큰아버지는 날렵한 칼로 밤을 치면서, 며칠 전에 선산에 벌초한 이야기며, 올 농사는 어디 논의 것이 제일 낫게 되었다는 말씀들을 나누셨다.
그리고 뒤꼍에서는 감․밤․대추․배․사과 같은 햇과일들을 정갈하게 챙기고, 토란을 뽑고, 햇벼를 찧어서, 선영에 처음으로 바칠 음식을 빚느라고 눈부시게 하얀 쌀을 씻고 있었다. 아아, 그 빚어도 빚어도 끝이 없던 송편, 그리고 전을 부치는 흥겨운 기름소리.('한가위 언저리' 중)

 

소슬한 바람이 전주향교 담장너머로 일렁일 무렵,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을 서로 붙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흥겨운 춤사위를 자랑합니다. 시나브로, 코발트색 하늘에 쟁반 같은 달이 솟아오르기 시작하면 내 마음도 가야금산조의 선율처럼 애절합니다. 명륜당 은행나무에 걸린 보름달아! 은은한 종소리처럼 세상에 골고루 빛을 밝혀다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로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서 고샅으로 나가고 싶은 한가위가 바로 눈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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