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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스토리

후백제 궁궐터


-견훤의 못다 이룬 꿈으로 다시 청하는 잠/

견훤의 생애는 아프다. 한 번씩 돌이켜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멘다. 전주사람들은 그래서 오랫동안 견훤과 후백제를 애써 외면해왔을 것이다. 후백제 수도의 궁궐이 정확하게 어딘지조차 밝히려고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발굴 의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후백제에 대한 관심은 아주 최근에야 시작됐다.
'가련하구나. 완산 아이여(可憐完山兒) 아비 잃고 눈물만 흘리고 있네(失父涕連濡)' 완산주 어린아이들이 오랫동안 불렀다는 동요다. 전주사람들은 이 참요가 들려올 때마다 속이 편치 않았을 게 분명하다. 후백제 도읍을 전주로 정했으니 후백제 군사들의 주축은 아무래도 완산의 아들들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후백제는 서기 900년부터 936년까지 만 36년 동안 존재하다가 멸망했다. 일제 36년과 같은 기간이니 결코 짧은 세월은 아니었던 셈이다. 즐겨 부르는 노래를 18번이라고 하듯,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18이라는 숫자와 일이 연관될 때가 많다. 결혼 몇 년째죠? 사업을 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하고 물으면 18년째라는 대답이 이상하리만치 많다. 후백제 역사나 일제 강점기도 18년이 두 번 이어진 기간이다. 혹시, 방년 18세도 그런가?
견훤은 후삼국의 절대 강자였다.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 중에 항우와 비견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견훤이 사랑했다던 젊은 부인 대목에 이르러서는 항우의 부인 우희(虞姬)를 연상할 수도 있겠다. 당연히 왕건은 유방 쪽이다. 오죽했으면 일방적으로 쫓기고 매 맞고 패배만 하던 왕건이 천우신조로 패권을 잡은 뒤에는 차령이남 사람들은 등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혹시 모르겠다. 완산골 사람들은 그 무렵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던 집단적 공포로 인해 후백제를 멀리했던 것일지도….
후백제 궁성은 전주의 물왕멀과 인봉리 방죽 터, 그리고 문화촌 일대에 존재했다는 주장이 요즘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종래에는 동고산성 일대라고 했는데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한다. 거칠고 험한 곳인데다 식수로 마실 물이 귀한 지형이기 때문이란다.
물왕멀은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우물 중 으뜸인 우물, 혹은 왕이 마시던 우물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전주 토박이들도 옛적 이곳에는 아주 큰 규모의 우물이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 뿐 아니다. 곽장근 군산대 교수에 의하면 이 일대에서 궁성 혹은 왕성으로 추정되는 성벽의 흔적을 발견했다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궁궐 위치를 전주부 북쪽 5리라고 기록돼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 일대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내가 물왕멀 도읍설을 자꾸 지지하는 듯 방정을 떠는 건 나 혼자 답답했던 때문이다. 이거 도대체, 어딘지나 알아야 그저 구경을 가든 삽 하나를 들고 가서 미력이나마 발굴을 돕든 할 것 아닌가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전라북도와 전주시, 국립전주박물관이 모두 나서서 후백제 궁궐터를 찾고 또 발굴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무려 천년 세월이 넘게 흐른 뒤 이제 비로소 견훤의 고진함을, 그 우직함을 이해하고 품 안에 두고자 하는 걸까?
견훤은 죽기 전에 유언했다고 전해진다. 완산주가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논산 연무가 그곳이다. 맑은 날이면 견훤왕릉에서는 모악산이 보인다고 한다.이병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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