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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훈옛그림

염재 송태회

 

 

 

 

 

 

 

 

 

 

올곧은 소신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품은 서화가 염재 송태회 (念齋 宋泰會)(1872-1942)

 

1872년 전남 화순군 동복면 사평리 출생으로, 조선말기 문인화가로 전남 화순 동복에서 살다간 사호 송수면(沙湖 宋修勉 1847-1916)의 조카로, 그의 부친은 송수면의 형으로 긍면(兢勉)이다. 3남으로 태어난 송태회의 자는 평숙(平淑), 호는 염재(念齋), 말년에는 염재옹(念齋翁), 염재거사(念齋居士)라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문(詩文)과 서예에 뛰어나 16세에 형 재회(在會)와 함께 최연소로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동몽진사(童蒙進士)’로 불렸다. 송수면이 호열자(콜레라)로 3남을 모두 잃어 대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송태회가 송수면에게 양자로 와서 한 동안 살았다고 한다. 이후 송수면이 1남 1녀를 낳자 그는 본가로 돌아갔으나 송수면의 문하에서 서화를 익혔고 화법을 이었다.
 1909년 잠시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육영에 뜻을 품고, 낙향, 보성군 사립보성학교, 능주군 사립육영학교, 순천군 송광사에 있었던 사립보명학교 등에서 한문을 가르쳤다. 문장과 서예에 두루 뛰어나 지역 고승과 문인들의 비문과 현판 등을 많이 써서 영암 도갑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구례 천은사 등 전남지방의 유명사찰에 남아있다. 1920년 고창 오산고등보통학교(현 고창중고등학교) 한문교사로 초빙된 이후 고창으로 이주해 조선역사와 한문, 서화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하였다. 이 학교는 고창고보로 개칭된 후에도 민족교육적 학풍 때문에 타지방의 뜻있는 학도들이 많이 전입해 와 학생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서부(書部)에 「해서」로 입선한 후 1924년 제3회, 1928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에 글씨로 각각 입선했다. 1925-1929년 곧 3회에서 8회까지, 그리고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는 사군자로 입선, 글씨로 3회, 사군자로 6회 입선했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송태회는 고창과 전주를 기반으로 전국에서 전시회를 하며 활동하였다. 송수면의 화풍의 영향을 받은 강건한 필치의 산수화를 그렸고 산수화와 사군자 등 다양한 화목(畵目)을 잘 그렸다.
 송태회의 글씨는 영암 도갑사 <월출산도갑사>, 장성 백양사 <청운당>, 순천 선암사 <장경각>, 순천 송광사 <향수원>, 고흥 능가사 <대웅전>, 구례 천은사 <설선당>, <수홍루> 편액 등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찰에 특히 많이 남아있다./서보훈 A-옥션 전무이사

 

그림1. <고사인물도 10폭>, 종이에 수묵, 124 x 31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2. <문인화 6폭>, 종이에 수묵, 130 x 31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3. <매화, 포도>, 종이에 수묵, 163 x 48.5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4. <문인화 12폭>, 종이에 수묵, 101 x 32.5 cm, 개인소장, 1928, A-옥션 제공
그림5. <서예 4폭>, 종이에 먹, 130 x 31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6. <예서>, 종이에 먹, 131.5 x 34 cm, 1929,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7. <행서 10폭>, 종이에 먹, 101 x 33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8. <림천양지(林泉養志)>, 종이에 먹, 26.5 x 84.5 cm, 개인소장, A-옥션 제공
그림9. 염재 송태회 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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