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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전주천의 다리(종합편)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혹은 수백 번 다리를 지나간다. 이러한 일상적 공간이기에 특별한 가치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교적 의미, 또는 지역을 서로의 연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다리는 문화와 삶의 양식을 표현할 터이다. 천년 세월의 강을 건너온 전주의 다리, 내게 말을 걸다. 이제는 문명의 구조물에 지나지 않던 수 많은 다리에 이야기라는 문화의 발걸음이 더해지면서, 우리 곁에 살아있는, 그리고 오랜 세월 함께 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전주의 다리, 사랑을 잇고, 사람을 잇다.

전주 사람들이여! 삶이 곤궁하거들랑 전주천으로 발길을 옮겨 봄이 남긴 고독한 수채화를 보시라. 억세게 운이 좋으면, 새벽 공기를 가르는 날갯짓과 함께 두루미 한 쌍이 회색빛 수묵화 속으로 날아들고 있음을 목도하시라. 오늘, 물안개 피는 전주 수변 생태공원에서 옛 추억을 더듬으면서 아릿다운 풍경화 하나를 건진다.

구비치는 물줄기들이 빼어난 경관을 펼쳐 보이는 이곳의 상큼한 아침. 승암산 아래로 깔리는 물안개의 때깔이 참으로 곱다.

 

 

 

 

 

 

전주 승암산은 중바우(중바위)산을 이르는 말이다. 중바우는 발산 동편에 있는 바위 벼랑으로 된 산의 이름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산 아래 자리잡은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전주천 물은 남관을 거쳐 승암교, 한벽당, 추천대, 비비정, 백구정, 청하 사챙(사창)이 나루를 지나 서해로 흘러들어 간다. 전주천 상류에 자리한 승암교는 2개다.

지금은 사람과 차량들의 통행이 뜸한 곳의 구 승암교는 1977년 7월 15일에 준공, 동서학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바로 위 교동의 승암교는 1990년에 가설했다는 자료가 보이지만 다리엔 2003년 4월 1일부터 2004년 1월 6일까지 공사를 한 것으로 돼 있는 가운데 승암사, 자연생태박물관, 중바위길, 치명자산성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다리가 놓임으로써 전주와 남원까지의 마실길이 더욱 손쉬워지는 등 생활의 편리와 함께 무욕의 세계로 이끄는 사찰과 성당이 더욱 바빠지게 된 것은 아닐까.

다리 건너편 약수터로 유명한 춘향로 방향, 좁은목은 새로 길이 났지만 오랜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 하는 12(曲)으로 유명하다.

전주천의 승암교 아래로는 한벽교, 남천교, 싸전다리, 매곡교, 서천교, 완산교, 다가교, 도토리골교, 구 진북교, 쌍다리(어은1교), 어은교(어은2교), 진북교, 서신교, 백제교, 신평교, 가련교, 추천교로 이어진다.

 

 

 

 

 

 

 

남천교, 용 다섯 마리 전주의 안녕 기원해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의 용뉴에는 ‘어뢰’와 발음이 비슷한 포뢰(蒲牢) 가 새겨져 있다.

포뢰는 용은 용인데 용의 새끼에 해당하는 아홉마리 용 가운데 가장 겁쟁이 용을 의미한다. 후한의 반고가 쓴 ‘서도부주(西都賦註)’ 및 명나라 때 호승지가 쓴 ‘진주선(眞珠船)’이라는 고문헌에 의하면, 용의 아홉 자식 중에 셋째인 포뢰는 마음이 약해 조금만 놀라도 두려워 자주 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포뢰란 겁쟁이이며 울보를 의미한다.

그 포뢰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고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범종을 만들 때 범종이 잘 울라고, 종뉴에 무서움 잘 타 잘 우는 용 새끼인 포뢰를 조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용이란 것은 고래에게 겁을 낸다는 전제하에 나온 설화를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포뢰가 꼭대기에 새겨진 범종을 치는 종채인 당목(撞木)은 고래 모양으로 만들었다. 고래가 범종을 쳐서 용 즉 포뢰를 울리는 것이다.

저 멀리로 남고사의 ‘포뢰’ 소리는 더욱 우렁차다.

남고사에서 전주부중으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가 전주의 전원적 풍경과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라 하여 남고모종(南固暮鐘)이라 하여 완산8경의 하나로 꼽히지는 않았는가.

‘포뢰’같은 용, 그것도 다섯 마리가 곳곳에 자리한 전추천의 남천교를 알고 있는가.

이는 전혀 무섭지 않은 가운데 전주 시민들과 전주시의 무사를 기원하는 민화 속 도깨비 같은 존재요, 생생히 살아 부적처럼 삼백예순다섯날 늘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전주 교동의 남천교 너머 완산칠봉으로 해가 시나브로 넘어가고 있다.

남천교 위에 세워진 청연루(晴烟樓).

이는 완산팔경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寒碧晴煙, 승암산 기슭 한벽루와 전주천을 휘감고 피어오르는 푸른안개)’에서 비롯, ‘한벽’과 ‘청연’을 대구 대구로 사용한 셈이다.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한벽당,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호)가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리라.

 

 

 

바로 그 옆엔 전주시 강암서예관과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년)선생이 살았던 ‘아석재(我石齋)’가 있다.

이는 ‘물과 돌이 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주자의 시 구절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다.

한옥마을을 찾은 날이면 이곳 청연루가 보이는 전주천에서 일몰을 맞이하는 때가 많다.

전주천의 햇살은 물 위에 물감처럼 번져가고, 낙조는 이에질세라 시시각각 색깔과 파장을 달리하며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인다. 전주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보고 싶은 날이면 남천교로 홀홀 단신 떠나야 한다.

슬치에서 시작된 상관 계곡의 물이 의암, 은석 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과 합류하면서 만마, 색장 등 여러 고을 옆을 거쳐 한벽당 아래로 흘러온다.

여기서 물줄기는 계곡의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간다.

바야흐로 남천교의 청연루에 앉아 보니 전주천, 한벽교, 승암산과 동고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의 남천교는 전주시의 자랑거리인 한옥마을과 경기전 등 주요 관광자원과 승암산, 한벽당, 남고산, 전주천 등의 멋진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되, 남천교의 옛 모습을 현대적인 시각에 맞게 2009년 복원 재가설한 교량에 다름 아니다.

이에 전주시는 남천교가 단순한 다리의 기능을 뛰어 넘어 주변 한옥마을과 서학동지역(은행로~전주천좌안도로 연결 교량)의 랜드마크로 활용,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팔짝지붕 형태의 건축물로, 특히 자연형 하천, 한벽당, 아태무형문화의전당, 한옥마을, 은행로 등 전통문화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관광 인프라가 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남천교 왼편에 전주전통문화관과 오모가리탕집 몇 곳이 보인다.

현재 전주전통문화관이 자리한 부근은 전북 지역 최초의 공동주택 교동 시민아파트로,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파트에 눈이 설었던 전주에서 초등학생들의 견학 코스로 활용되기도 했다.

바로 옆 오모가리집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지만 크게 낯설지 않아졌다. 오모가리란 본래 뚝배기를 일컫는 전주지역의 토속어로, 남천의 모래무지조림을 완산8진미로 꼽았다.

옛날의 남천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청정함을 자랑했다.

모래무지는 모래 속을 파헤치면서 생활하는 삼례 한내 전주의 남천을 비롯, 서천, 남고천 등에서 많이 잡힌 가운데 버들잎에 휘늘어진 천변 평상 위에 걸터 앉아 오모가리탕에 소주를 곁들이면 풍류를 모르는 사람도 시 한수가 떠오르는 시절이 있었다.

‘염라대왕께서 “남천 모자(모래무지) 먹어봤냐?” 한다는디’ ‘호남무가(湖南巫歌)’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에 서면 천당으로 보낼지, 지옥으로 보낼지를 심판할 때 팔도별식 33가지를 먹어 보았느냐고 물어본다. 이를 먹어 보았다는 사람은 천당으로 보내고 못 먹어 보았다는 사람은 지옥으로 떠밀어 버리는데, 그 팔도별식 33가지 중에 “남천 모자 먹어 봤냐?”가 끼어 있다.

여기서 남천이란 전주천이고, 모자는 모래무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염라대왕의 심판을 거쳐 천당가기는 애시당초 글렀다 싶었는데, 요즈음 전주천의 물이 많아 모래무지가 엄청 많아졌으니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갑다.

수채화가 최인수씨는

“남천의 맑은 물에서 잡아 올린 피래미며 모래무지 참게와 함께 시래기 듬뿍 넣고 팔팔 끓인 함별땅 오모가리는 수양버들 늘어진 이곳 남천 제방 평상위에서 먹어야 제 맛이 났죠. 우리는 어려서 한벽당을 함별땅이라 불렀다

”고 말한다.

남천교로 이름한 것은 아래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이 남천(南川)이기 때문이며, 니는 전주천이 우회하면서 전주부성의 남쪽을 흐르므로 불리워진 이름 같다.

원래의 남천교는 현 전주교 상류 17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원래는 돌다리였다.

이 다리는 1753년 유실되었다가 김응록, 박사덕 등이 복구 사업을 추진, 1만4,000냥의 돈을 모아 1791년 8월 공사를 시작, 12월 완공했다.

이때 다시 만든 다리 모양을 보고 안경다리(眼鏡橋), 오룡교(五龍橋)라고도 불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로, 각 창 머리에는 용머리를 새겨 놓았다.

이는 승암산이 화기(火氣)을 머금은 형세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인 만큼 음양조화의 균형을 이루게 하고 또한 전주부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을 다리에 담았다.

원래의 남천교는 ‘시냇물을 가로질러 묵직하게 걸터앉은 모습은 마치 하늘이 던져준 듯하고, 땅에서 불끈 솟아난 듯하며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 같지가 않아 탄복을 하였다고 한다’고 한다.

이후 다시 무너진 1901년 관찰사 조한국이 평교(平橋)로 개축했지만 1907년 수해를 입어 부서지자 같은 해 백남선 등의 후원으로 재수축했다.

하지만 3년후 홍수로 유실되어 현존하지 않다가 1957년 12월 전주천 상류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교량으로 놓았다가 2009년 다시 개가설한 것이다.

남천교개건비가 전하고 있다.

1791년 만들어진 남천교의 개건 경위를 기록한 비석으로, 정조 18년(1794)에 건립됐다가, 철종 13년(1862)에 다시 세워졌다. 원래는 현재의 전주교와 남천교 중간에 위치에 있었으나, 전주교대 교정을 거쳐 최근에 원래의 위치로 옮겼다.

특히 전주에서 임실, 남원, 순창 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천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래 전부터 다리가 놓여졌다.

남천에는 원래 석교(돌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계묘(1783)-정미(1787) 연간의 홍수로 다리가 종종 무너져 장마때마다 사람들이 많은 불편을 겪었으며, 남천교가 무너진 뒤에는 바로 아래의 싸전다리가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

남천교는 지난 1996년 교량 정밀안전진단 결과 ‘D’급 판정을 받은데다 최근 한옥마을 일대 관광객과 주민, 차량 통행이 날로 늘어나자 이를 철거하고 새로운 ‘명품교량’ 건설에 나서, 지금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리 길이는 82.5미터, 다리 너비는 25미터로 현재의 남천교는 2009년 옛 지도상의 모습을 본떠 건설한 것으로, 무지개 다리 위에 누각을 만들어 전주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풍류를 맘껏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홍예(무지개) 다리 위에 누각이 지어진 형태의 아름다운 남천교는 북으로는 한옥마을의 은행로에 이어지며, 남으로는 서학동 전주교육대학교 쪽으로 통하게 된다.

철부지 세 살짜리 꼬마 김호연(1897-1992)은 이 남천교를 건너 강증산을 만나러갔다는 얘기도 전하며, 완산십경에 ‘남천표모(전주천에서 빨래하는 광경)’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전만 해도 모든 빨래는 남천 등 천변에서 이뤄졌다. 특히 우수와 경칩이 지난 춘분 무렵이면 한벽당 아래에서 남천, 완산교에 이르는 전주 천변은 빨래꾼들로 거의 북새통을 이뤘다.

큰 드럼통을 가마솥 대용으로 온갖 빨랫감을 잿물과 함께 삶아내는가 하면, 빨래질이 끝난 옷이나 피륙 따위를 자갈밭에 널어놓기도 했다.

물가의 좋은 빨랫돌을 차지하기 위해 높은 언성이 오고 가기도 했고, 빨래질의 손을 멈추고 따뜻한 국밥이나 국물로 점심과 새참을 드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전주천 건너편에 있는 남고산이나 승암산의 골짜기에까지 메아리져서 참으로 장쾌한 멋을 풍기기도 했다.

물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이나 천변에서 산책을 하는 모습이 많은 변화는 했지만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특히 요즘은 여름이면 남천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등 전주시민들이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장기와 바둑을 두면서 더욱 맑아진 전주천의 구김살없는 모습을 보며 쪽빛 하늘에 감탄을 하곤 한다.

2010년 상반기에 방송된 KBS 드라마스페셜 4부작 ‘보통의 연애’에 바로 이 남천교의 모습이 나온다.

‘보통의 연애’는 전주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한 드라마로, 재광(연우진)이 자신의 형을 죽인 용의자의 딸인 윤혜(유다인)를 만나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 그들 앞에 놓인 아픈 진실에 맞서게 되는 러브 스토리를 담고 있는 작품.

“당신 아버지 죄가 왜 큰지 알아요? 당신 아버지 죄는 우리 형만 용서할 수있는데, 우리 형은 세상에 이제 없거든. 그래서 큰 거에요. 당신 아버지 죄는임윤택씨 살아 계실 때. 욕했던 분들의 죄는 오늘로써 더 커진 것이다”

재광이 고독하게 바라본 전주천, 남자가 여자 때문에 힘들어 했던 곳이 바로 남천교다.

하지만 ‘보통의 연애’가 아닌, 연인들이 특별한 연애를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남천교이다.

스위스 루쩨룬의 카펠교나 영국 런던 타워브릿지 등 세계 도시들이 독특한 하나의 교량을 상품화해 세계 각국의 관광객을 끌어들여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있는 것처럼 남천교가 그 역할을 다하면서 시민들의

안녕과 전주시의 무궁한 발전을 노래하고 있다.

 

 

 

 

 

 

 

 

싸전다리, 옛일 더듬으며 은빛천국의 무대

 

“옛날에 촌에서 쌀 가져와 갖고 여그다 퍼부서분 디여”

전주부성은 호남에서 가장 번창한 도시로, 조선 왕조의 발상지이며, 또한 영호남의 중요한 통로로 교통이 번화한 곳으로 인물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그래서 전주천에는 예로부터 전주 인근지역으로 왕래하기 위해 남천교, 싸전다리(현 전주교), 서천교, 그리고 완산교 등 다리가 만들어졌다.

전주천의 싸전다리. 옛날엔 이 다리목을 끼고 싸전(쌀가게)이 늘어져 있었다.

그래서 명칭이 ‘싸전다리’다. 바오 아래 설대전다리(현 매곡교)에는 담뱃대 가게가, 소금전다리(현 완산교)에는 소금 가게가 있었다고.

전주사람들은 싸전다리를 전주의 으뜸 되는 다리로 여기며, 명칭은 싸전다리-전주교-싸전다리(1999년 명칭 제정)로 변모를 거듭한다.

싸전다리∼매곡교 구간 동북쪽 제방 위로 길게 펼친 남부시장은 1백여년 전, 당시 ‘남밖장’으로 불리었으며 2, 7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두 다리 사이의 둔치에서는 되쟁이 쌀장수, 담배, 담뱃대, 나무땔감, 우시장 등 온갖 잡상인이 몰려 반은 사람 반은 우마차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들에 떼밀려 저절로 발이 옮겨질 정도였다고 전한다.

싸전다리라는 이름은 이때 붙은 것이라고 이곳 토박이 어른들은 추정하고 있다. 싸전다리는 쌀도가들이 몰려 있는 풍남문에서 가장 가까운 다리로, 쌀과 생활용품을 교환하려는 농민들의 부산한 발걸음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은 아닐까.

1923년에는 남문시장과 서문시장이 통합돼 전라도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다지만 맞은 홍수로 천변 인근의 서민들과 상인들의 피해는 엄청났다.

“(홍수가 휩쓸고 간 뒤) 천변에는 아침 저녁으로 빨래하는 아낙네들로 들어찼다. 주로 남천교와 다가교 부근이 빨래터로 인기가 높았다… 빨래방망이 소리는 전주의 교향곡이었다고나 할까. 빨래하면서 시어머니 흉도 보고 쌀값 오름세를 나누며 시끌벅적하게 입놀림하다가 점심때가 되면 여럿이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다… 드럼통에 빨래감을 삶는 장사꾼이 있었는데, 비싸지도 않는 돈 대신에 장작 몇 개를 주기도 한다….”

“완산다리에서 현재 전주교 중간 지점까지 천변쪽으로 판자촌과 하꼬방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이 하꼬방은 천태만상의 복마전을 이뤘다. 종이방, 주점, 국수집, 수제비집, 옷전, 기름집, 개고깃집이 양쪽으로 꽉 들어찼다.…”(송영상의 ‘전라도 풍물기’)

싸전다리는 본래 자그마한 나무다리(木橋)에 불과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22년 콘크리트 다리로 새로 지어진다.

싸전다리는 일제시대에 일본사람들이 사탕을 만들어 팔기도 했으며, 1936년 대홍수 때에도 유실되지 않은 유일한 다리로,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근대 교통망으로 이어지는 교통로 역할을 해냈다.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고 더 많은 물산을 싸전다리로 집중시켰다. 지금의 다리는 1965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노인들의 내기 장기, 화투놀이가 성행하게 된 것은 지금으로 20여 년 전부터이다.

싸전다리는 전주의 큰 길목인 팔달로 끝머리에서 남원, 순창으로 이어지는 다리로, 옛 남문밖시장(지금의 남부시장)의 거점이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쌀장수들이 자리를 잡아 싸전다리(米廛橋, 미전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렇다. 조선말기 상거래가 이루어진 곳으로는 전주천변을 따라 펼쳐진 장들을 들 수 있다.

전주교, 즉 싸전다리 밑으로론 ?싸전?이, 매곡교 근처에서는 ?쇠전?, ?설대전?이 섰었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쇠전과 설대전 맞은편 부남 은송리 앞의 전주천변은 초록바위 아래까지 ?나무전?이 펼쳐졌다.

싸전다리는 삼베자루에 반도 되지 않게 담은 쌀자루, 팥, 깨, 콩은 물론 보리며, 콩깻묵 누룩을 팔았으며, 전국을 상대하는 쌀 거상도 자리잡았다.

이른 새벽, 각종 곡물을 거둬 들이는 거상들이 있는가 하면 헐값에는 팔지 않겠다는 고집스런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장사를 했으며,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라도 만년지기나 오랜만에 만난 사둔처럼 농사 얘기, 애들 혼사 얘기들을 정답게 나누기도 했을 터이다.

지금의 싸전다리는 1964년 4월 29일 착공, 1965년 9월 5일에 완공된 것이다.

당시 시공청은 호남국도건설국, 시공자는 (주)삼협사로, 공사 금액은 1,858만2,594원이 투자된 다리로, 전주-남원 간선도로가 뚫리면서 새로 놓였다.

폭 25m, 길이 78m로 그 때만 해도 국내에서 손꼽히는 교량으로, 개통식장에서 호남국토건설국으로부터 전주시에 인계됐다.

당시 전북일보 기사에 따르면 남원 순창을 연결하는 이 다리는 하루에 1만7000여명의 통행자와 800여대의 자동차, 수많은 우마차가 다녔다고.

싸전다리는 새로운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전주부성을 둘러 흐르는 전주천을 중심으로, 동편으로는 낙수정에서 흘러내린 물길과 기린봉 북록에서 시작된 모래내가 인근 마을들의 물줄기 되었고, 남쪽으로는 남고산성의 물길을 모아 흐르는 산성천, 남고산, 보광재에서 흘러내린 물이 공수내를 이루어 전주천의 물길을 더한다.

다시 말해, 남고천은 구이면 평촌리와 경계에 있는 보광재(280미터)에서 발원, 흑석골을 지나 남문시장의 전주천 맞은편의 곤지산 동쪽 기슭에서 싸전다리 서편의 전주천에 흘러든다.

비록 지금은 하천정비공사로 1970년대 이후 인근의 초록바위가 자취를 감추고 공수내 물길은 하천복개로 인해 모습을 상실된 지 오래지만 과거엔 초등학교 소풍 장소로 올 정도로 각광을 받던 곳이었다.

완주군 구이면의 평촌사람들이 산나물이며, 약초 등을 팔러 보광재를 넘어 싸전다리로 나갔을 것이며, 구이,운암쪽으로 길이 나기 이전까지 전주사람들이나 구이사람들이 넘나들었던 길로 활용됐을 것이란 이성재 화백의 설명. 또, 싸전다리는 완주 상관의 길목으로, 땔감을 전주로 나와 팔려는 사람들이 꼭 건너야만 하는 다리였다.

하지만 싸전다리 바로 밑 초록바위 부근에서는 천주교인 박해가 있었고 동학농민군의 수장인 김개남장군이 사형을 당했다.

남부시장에서 싸전다리를 건너 다가산 쪽으로 돌면 왼편에 ‘초록바위’라 불리는 곤지산 자락의 바위 언덕을 만나게 된다.

홍수 제방공사를 하면서 상당부분이 깎여 현재로서는 바위의 모습을 완전하게 확인할 수 없지만, 기록에 의하면 초록바위는 다가산 아래 그 산세가 갈마음수격(渴馬飮水格)으로 ‘말이 풀밭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명명했다고 전한다.

초록바위는 좁은목, 숲정이와 함께 ‘3대 바람통’으로 불리웠다. 조선시대 참형자들을 효수하던 나무들이 산정에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등골이 오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초록바위는 진북동에 위치한 숲정이와 더불어 전주에 있었던 사형장으로, 1866년 병인박해 이후 계속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장소였다.

지금의 싸전다리는 여름이면 인근의 노인들 놀이터로 변한다. 전주시가 맑은 물 운동으로 쉬리가 서식할 정도로 깨끗해졌지만 물장구치는 아이들도 없다. 빨래하는 아낙은 더욱 없다. 초록바위가 있었던 곤지산은 반쯤 깎여나가 흉물스런 배꼽을 드러낸 채 아스팔트 도로 위로 헉헉 품어대는 것도 싸전다리 인근 요즘 풍경이다.

요즘의 전주 싸전다리(구 전주교) 밑은 그야말로 은빛천국이다.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은 연중 내내 노인들로 넘쳐난다. 예닐곱명씩 그룹을 지어 오순도순 화투를 치기도 하고, 노랫가락에 춤을 추기도 하고, 구경에 바쁜 이들도 눈에 띈다.

싸전다리를 찾는 어르신들은 60대부터 90대까지 연령제한이 없는데다가 봉동 이서 임실 김제 심지어 남원에서까지 원정을 오는 경우도 있다.

전주에 노인들이 편안한 쉼터로 이곳만한 곳이 없어서 일까. 물가에 고기잡는 중대백로의 날갯짓이 볼거리다. 다리 밑에 앉아 있자니 ‘옳거니!’ 한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유연대에서 어은골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은 가운데 산등성이 하나를 두고 두 갈래로 에워싸는 산세를 형성한다.

그 산 아래 전주천변 쪽으로 자리잡은 동네가 도토릿골과 어은골이다. 도토릿골은 산의 지형이 마치 배의 돛대와 닮았다고 하여 ‘돛대골’로도 불렸다.

다가교를 지나면 도토릿골교(1999년), 구 진북교(1975년), 쌍다리(어은1교, 1962년) 어은교(어은2교, 1990년), 진북교(1996년), 서신교(1996년), 백제교(1991년), 사평교(2007년), 가련교(1997년), 추천교(2000년)가 잇따라 모습을 드러낸다.

다가교를 지나면 첫번째 만나는 다리가 도토릿골교다. 도토릿골과 마주한 부성쪽으로 석보가 하나 있었는데 그 석보에서 지금의 태평동쪽, 이전 시기에는 장재뜰에 생활용수를 대는 물길이 하나 있었다. 그 물길을 따라 비석거리와 물방앗골이 형성된다.

일제시대 비석거리 뒤쪽에 유곽골목이 있었는데 그 유곽 골목에서 전주천을 넘어 맞은편에 도토릿골이란 마을이 있었다.

도토릿골은 돛대골, 주동, 진송마을 등으로 불렸으나 가호 수는 대여섯에 불과한 조그마한 동네였다. 도토릿골과 어은교 사이에 길게 뻗어내린 산자락 부근에 일본인 작부들이 기거하는 유곽이 들어섰다는 김남규선생의 기록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 말로는 도토릿골 쪽 유곽에 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야 했으며 그래서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당시 방귀 꽤나 뀌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유곽이 생긴 것은 왜인들이 전주부성의 서문과 부근의 성벽들을 허물고 형성한 근대적 도시 공간의 끝부분에 자신들을 위한 욕망의 배설 창구를 만든 까닭이다.

학날 끝 즉 왜인 유곽이 있던 그 자리에 예전에 ‘잉어바우’가 있었는데 일제시대에 금을 채취하기 위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또 그 때 나온 돌을 가지고 전주천 제방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잉어바우’ 자리에 도토릿골교가 세워졌다.

이 다리는 1936년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38년 태평동의 일제시대 명칭 상생정의 이름을 따서 상생교라 하였다가 해방 후 진북교라 불렀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도토릿골 다리라고 불렀으며, 지금 그 자리에 도토릿골교가 다시 세워졌다.

전주시청에서 전주초등학교를 지나 도토리골로 진입하는 이 다리는 동네지명인 도토리골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들고 있는 모습의 다리 난간의 문양이 매우 정겹다.

구 진북교는 1936년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가설하여 당시 태평동의 구 명칭인 상생정의 이름을 따서 상생교라 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상생교를 진북교라 부르게 되었다. 최근에 서살미자락에 진북터널이 뚫리면서 전주천에 놓인 다리가 진북교가 되고, 원래의 진북교는 구 진북교가 되었다.

1950년대 말, 살인교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는 난간이 썩어 없어진 채 방치되어 숫한 인명피해를 보아왔다고 1960년 말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다시 주민들의 통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도토리골 진입로로 쓰였던 이 다리는 어은골 쌍다리와 함께 전주천의 오래된 명물다리로 남아있다. 편도가 불가능한 차가 겨우 한 대 지나갈 수 있는 다리다.

최근 들어 구도심과 신도심 지역을 이어주는 진북교에는 해바라기꽃 무늬로 새롭게 단장한 교량 측면에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됐다.

진북교 바로 인근엔 호암산(화산공원) 중턱에 자리잡은 아담한 절이 하나 있으니 진북사다. 신라 말 도선(827∼898)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다.

창건 당시에는 (전주 4고사 중 북쪽에 위치 한다고 해서) 북고사(北固寺)라고 했다고 하며 전라관찰사 이서구가 전주부성의 북쪽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북사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전주시 진북동 도토리골 우측산 절벽에 위치하며 신라 고승 도선국사가 북고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그후 관찰사 이서구가 전주부성의 북쪽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북사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

전주에는 동고사, 서고사, 남고사, 북고사(진북사) 등 4고사가 있었다. 동고사는 전하는 말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왕조시대 이전부터 창설된 절이라고 한다. 그 처음 위치로는 승암산 배부분, 지금의 동고사 자리로 여겨진다. 도량 천년의 연륜을 산다는 귀목나무 머리를 짚어 유지(遺址)라고도 말한다.

서고사는 서산(황산,황방산)의 중턱에 있는 사찰로 유명한 ‘효자천(孝子泉)’이 있으며, 남고사는 남고산성 내에 위치한 절로 만경대,천경대,억경대 등에 둘러쌓여 있다.

북고사(진북사)는 완산칠봉 중 용두봉의 자락이 북으로 흘러내리는 유연대 북서단 속칭 부엉바위절(호랑이 아가리터)라 부르는 곳(진북터널 옆)에 있다. 관찰사 이서구 선생의 고사가 담긴 절로 경내엔 오백년 내내 숲정이 바람 속에서 다소곳이 지키는 미륵불의 품에 선 고요가 흐른다.

진북사는 창건 이후 기록들은 남아있지 않는다. 현재의 진북사는 1922년 김성근이 중건,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 미륵전, 산신각, 요사(적묵당) 등이 있고, 유물로는 창건 당시의 것으로 전해지는 석조미륵불상이 남아 있다.

진북사 미륵불상에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30 년대에 미륵불이 절 인근에 사는 한 노파의 꿈에 미륵이 나타나 ‘나는 전주천변에 있는데, 현재 매우 괴로우니 편안하게 옮겨주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다. 다음날 노파가 나룻배를 타고 이 절 아래의 전주천변 늪으로 가서 이 불상을 찾아냈다.

몇년 후 이 절의 신도들이 미륵전을 짓고 미륵불을 남향으로 세웠는데, 이번에는 미륵불이 일꾼들의 꿈에 나타나 동향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그 일꾼들이 무거워서 옮기기 어렵다고 하자, 손만 대면 움질일 것이라고 했다. 다음날 주지와 일꾼이 미륵불을 모신 불단에 손을 대자 저절로 동향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전주천에는 대형 철근콘크리트 다리가 속속 들어섰다. 80년대 전주시 서신.중화산동지역이 개발되면서 시가지와 연결하는 다리가 신축되기 시작해 예수병원을 연결시키는 다가교와 서신동지역 주민들의 통로인 서신교가 들어섰다.

이어 어은터널과 진북터널이 뚫리면서 어은교와 진북교가 건축됐고 전주도심을 통과하는 교통량 분산을 위해 서부우회도로가 개설되면서 백제교가 신축됐다.

전주시 진북동 어은터널 밑에 거주하는 어은골 및 도토리골 주민들의 유일한 시내 진입로였던 ‘쌍다리’와 ‘(구)진북교’는 ‘도토리골교’와 ‘진북교’가 새로 들어서면서 자전거도로 정도로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으로 변했다.

 

 

 

전주 진북동의 쌍다리(어은1교)는 태평성결교회 앞에, 어은교(어은2교)는 진북초등학교 앞에 자리한 다리로, 1975년과 1990년에 각각 건립됐다.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어은골과 중앙동을 잇는 보행자용 다리가 나란히 놓여 있어 흔히 쌍다리라고 부른다. 쌍다리는 50여년 동안 전주천을 지켜오고 있다.

징검다리가 고작이었던 개설 당시에는 어엿한 위용을 과시했겠지만 지금은 왜소하고 남루하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더욱이 현대식 교량보다는 낮게 설치돼 있어 전주천에 큰물이 지면 (물에)잠기곤 한다.

전주천의 잠수교인 셈이다. 걸핏하면 범람하다 보니 익사사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다리 주변 주민들에게는 양쪽을 이어주는 소통로 구실을 했다. 특히 서쪽의 화산 아래에 있는 어은골 주민들에게는 시내로 가는 관문이나 다름없다.

 

 

원래 이 다리는 전주천 바닥으로 차량교행은 어렵고 사람만이 왕래가 가능한 좁은 다리였다. 하지만 어은골에 인구가 늘면서 원래 다리 옆에 차량교행이 가능한 다리를 옛 다리와 약간 띄워 놓았다.

그렇고 보니 다리가 두 개가 되어 사람들이 쌍다리로 부르고 잇다. 그러나 이는 정식으로 이름이 없는 다리로 이젠 어은골 쌍다리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어은골 주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소통과 통행의 장이다,

전주 천변 진북동 쌍다리 부근은 신구.김수미의 ‘간 큰 가족’과 김혜수.천호진의 ‘좋지 아니한가’가 촬영된 곳이다.

‘간 큰 가족’에서 휠체어를 탄 김노인과 마누라(김수미)의 추격신은 전주천 쌍다리에서 촬영됐으며, 특히 전북에서 전체 분량의 70% 가량이 촬영된 ‘좋지 아니한가’는 진북동 도토리골과 어은교(쌍다리)를 주요 거점으로 하고, 완산교에서 서신교까지 영화 속 주요 장면이 대거 촬영됐다.

마치 전주천 풍경을 화폭 가득 담기라도 하듯 버드나무, 돌다리, 철봉에 매달려 운동하거나 조깅, 산책하는 아저씨,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운동하는 아주머니, 천변 주변의 야경 등이 잘 담겨져 있다.

서신교(롯데아파트 앞)와 쌍다리에 이르는 구간에서 이 가족이 다시 정상적인 가정으로 돌아오는 중요한 장면이 촬영됐다.

그러나 전주천 좌안도로 확장이 추진되면서 어은골 쌍다리 철거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전주시는 자연재해위험지구로 지정된 진북동 어은골지구와 전미동 진기들마을, 삼천 덕적마을, 팔복 야전지구에 대해 교량 설치 및 배수문 개선, 좌안도로 확장 등의 사업을 벌인다.

이곳 4곳의 마을은 모두 폭우로 상습 침수피해를 입는 지역으로 재해예방을 위한 사업이 불가피한 지역이다. 좌안도로가 확장될 경우m 도로가 높아지면서 쌍다리는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높고, 방치할 경우 재해위험이 높아 철거될 예정이다.

최근 들어 쌍다리 옆에 인공 개울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은 어린이들이 물속식물과 물고기들의 사는 모습을 관찰하며 체험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곳이다.

도토릿골을 지나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쌍다리가 보이고, 이곳을 건너면 바로 어은골이다.

어은골은 옛날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들이 은둔했던 은사골로도 잘 알려진 곳으로, 숨은 잉어의 혈 같은 골짜기 형상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어은골 또는 어은동이라 불렸다.

하지만 ‘전주천에 있는 고기가 숨었다가 가는 곳’이라서 어은골이라고 한다는 말도 전해진다.

어은교(漁隱橋)는 말 그대로 고기 ‘어’와 숨길 ‘은’자를 써서 물고기와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으론 틀림없다. 물고기가 숨어있던 곳이라고 하면 될까. 한글학회 지명총람에는 어은동(엉골) 동쪽, 숲정이와의 사이에 있는 자리로 적혀 있다.

‘엉골’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어은골은 배산임수 지형이다. 뒷 편인 서쪽에는 화산이 있고, 앞 편인 동쪽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있다.

1960∼70년대 엉골은 ‘똥통 천지’였다. 전주 시내 분뇨를 이곳에 부어 놓으면 서신동이나 중화산동 사람들이 거름으로 사용하기 위해 퍼갔다고 한다. 어은골과 쌍다리는 그러니까 이곳이 전주 부성의 외각 지역이면서 여기까지를 전주 부성 주민들의 생활권역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해 온 셈이다.

어은교는 어은터널이 생기면서 시내와 터너를 잇기 위해 새로 생긴 다리다. 어은교를 건너 길을 따라 어은터널을 지난면 중화산동 시가지에 이른다.

쉬리와 수달 원앙이 사는 전주천.

몇해 전에는 전주천 어은교 아래 시멘트 벽면에 아이들의 고사리 손으로 표현한 아름다운 작품이 걸리자 회색빛의 벽면이 오색 빛깔로 물들었다.

어은교 아래에서 열린 꼬마들의 공공미술프로젝트 ‘전주천에 아지트를 만들어요’을 갖기도 했다. 요즘 어은교 다리밑에는 마땅이 갈곳이 없는 노인들로 붐빈째 삼삼오오모여 장기와 화투를 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다.

어은골 너머로는 바구멀, 재뜸, 구석뜸 등이 있었다. 이곳 사람들과 매너머, 전룡 지역 사람들은 유연대의 끝자락 부근에 있는 장고개로 모인다.

이곳에 장도 서고 주막도 있어 그 자체가 별도의 생활권역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곳 사람들은 바구멀과 재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서신교를 넘어 장재뜰에 다다른다. 서신교 역시 이곳에 신시가지가 생길 것을 예측한 선조들의 예지를 담아낸 것 일지도 모른다,

자연속의 평화로움과 편안한 느낌은 진북교에서 만날 수 있다.

노후되고 회색빛 콘크리트로만 되어 있어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았던 진북교를 자연의 여유로움과 맑고 깨끗한 느낌, 활기찬 생명을 해바라기로 모티브화해 부분적으로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모습으로 전주 천변을 찾는 시민들에게 자연 속의 풍요로움과 편안한 느낌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다.

전주의 관문인 백제교는 후백제 유적지에서 출토된 전통 기와 와당의 연꽃문양을 디자인한 교량 난간에 야간 경관 조명이 설치됐다.

전주 삼천교는 이 일대에서 성행한 전주기접놀이의 역동적인 율동미를 형상화한 커다란 곡선의 조형물과 교량의 일체형 구조를 갖게 하는 전체의 경관 조화가 크게 돋보인다.

신풍교는 깊은 밤 창호 문에 묻어나는 아름다운 달무리처럼 전주시의 전통과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운치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림교는 전주의 근.현대 100년의 역사, 시민들이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전주의 이야기들, 그리고 빈촌이 존재했던 전주천, 옛 전주의 명물인 미원탑,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동문, 100년이 지난 역사를 가진 전동성당 등 우리에게 낯선 듯 친근한 전주의 모습들을 근대에서 현재까지 전주의 역사를 '거닐다‘라는 표현에 상징이다.

하가지교 육교는 선자(扇子, 부채)의 풍류를 나타낸다.

아름다운 전주 천변을 바라보며 부채를 펼친 옛 선인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조형화해 바람으로 가득한 도시 공간에 우뚝 선 존재처럼 당당히 존재하고 있다.

하가지구 보도육교가 아트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교량은 전주의 서쪽 전주 천변 인근의 하가택지개발지역 안에 있으며 지역의 메인 도로를 관통하는 주된 보행공간 역할을 수행한다.

활짝 만개한 교량 상단의 구조물은 주변 풍경과 대조를 이루며 교량에 강한 시각적 특성을 부여한 것이다.

재료는 단순함과 절제미를 살리기 위해 유리, 철, 목재를 선택하여 합죽선이라는 컨셉에 부합되는 이미지 구현을 통해 지역의 상징성을 표출하고 새롭게 택지개발된 지역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교량은 전주 천변을 연결하는 녹지띠와 어우려져 시민들에게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도시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북일초등학교의 육교 역시 전주다운 맛이 배어나는 공공시설물의 하나다.

전주천의 옛 다리

남천교(南川橋)

본래 싸전다리 상류 170미터 지점 강암서예관을 못 미친 자리에 위치한 돌다리(石橋)였다.

남원방면으로 넘어가던 다리로 무지개다리․홍교(虹橋), 안경다리(眼鏡橋), 오룡교(五龍橋)라고도 불렀다. 다섯 개의 창을 가진 무지개 모양의 다리였으며 각 창 머리에는 하늘을 삼킬 듯이 눈을 부릅뜨고 앉은 다섯 개의 용머리를 새겨 놓았는데 승암산이 화기(火氣)을 머금은 형세여서 이를 방지하고 전주부성의 재난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전주의 부성을 기준으로 남쪽에 흐른다하여 전주천을 남천이라 부른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싸전다리

남부시장에서 평화동을 넘는 다리로 옛날에는 나무다리(木橋)였다. 싸전다리라는 이름은 옛날에 이 다리목을 끼고 좌우에 싸전(쌀가게)들이 늘어져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전주교가 됐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사람들이 사탕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1922년 전주교가 건립되었는데 전북 최초의 콘크리트 시공이었다. 이 전주교는 1936년 대홍수 때에도 유실되지 않은 유일한 다리였다.

매곡교(梅谷橋)

남부시장 건너 완산칠봉 안쪽 마을에 매화꽃이 많아서 매곡교라 붙여졌다. 매곡교에서 서천교까지 담배장수들이 늘어앉아 좌판을 벌인 연유로 설대전다리(煙竹橋연죽교), 다리 밑에 우시장이 열려 쇠전다리로도 불렸다.

초록바위 아래까지 나무시장이 펼쳐졌으며 일제강점기말 매곡교에서 완산교 사이에는 종이, 책, 옷가지 등을 비롯하여 국수, 수제비, 개고기, 기름, 개떡 등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서천교(西川橋)

남천교가 남원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라면 정읍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은 서천교였다.

현재 완산교가 용머리 고개를 넘는 국도상에 있었지만 예전에는 완산교자리에 서천교가 놓여져 있었다.

원래는 흙다리(土橋)였으나 순조대 관찰사 한용구, 조인영, 이규현 등의 노력과 성내 백성들의 성금을 모아 1833년 돌다리(石橋)를 놓았다. 탄탄하기란 마치 땅바닥을 딛는 것 같았으며 놓여진 돌들의 모습은 고기비늘처럼 눈부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는 그 후 홍수로 붕괴되었으며 1845년에 전주부성 사람들을 동원 개축하였다. 1896년에는 승지 김창석이 사재를 털어 개축했으나 오래되지 않아 무너졌다.

그후 1931년 박기순이 서천교 다리돌을 옮겨 완산에 청학루(靑鶴樓, 옛 국악원)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 대신 목교(木橋)를 현 서천교가 있던 자리에 놓았으나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됐다.

완산교(完山橋)

옛날 소금가게들이 있어 소금전다리(鹽廛橋, 염전교)라 불렸다.

1922년 전주교와 함께 콘크리트로 완산교가 놓여져 용머리고개를 넘어 정읍방면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6년 대홍수 때에 유실되었으나 그 이듬해 다시 완공하였다.

다가교(多佳橋)

현재 신흥학교 자리에 사마제가 있어 사마교(司馬橋)라고 불렸다. 일제강점기때는 이 다리를 대궁교라 하였고, 전주의 대표적 사정(활터)인 천양정이 있어 사정다리라고도 했다.

옛날에는 이 다리를 건너 다가정, 사직단, 향교의 사마제 등이 있었으며 고개를 넘으면 화산서원(華山書院)이 있었다.

도토리골교

전주시청에서 전주초등학교를 지나 도토리골로 진입하는 이 다리는 동네지명인 도토리골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들고 있는 모습의 다리 난간의 문양이 매우 정겹다.

구 진북교

이 다리는 1936년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38년에 다시 가설하여 당시 태평동의 구 명칭인 상생정의 이름을 따서 상생교라 했다.

해방 후에는 상생교를 진북교라 부르게 되었다. 최근에 서살미자락에 진북터널이 뚫리면서 전주천에 놓인 다리가 진북교가 되고, 원래의 진북교는 구 진북교가 되었다. 1

950년대 말, 살인교라고 이름붙여졌는데, 난간이 썩어 없어진 채 방치되어 숫한 인명 피해를 보아왔다고 1960년 말 보수공사가 진행되어 다시 주민들의 통로로 사용되었다.

도토리골 진입로로 쓰였던 이 다리는 어은골 쌍다리와 함게 전주천의 오래된 명물다리로 남아있다.

어은골 쌍다리

구 도심에서 어은골로 이어지는 다리로 한쪽은 인도로, 한쪽은 차도로 이용되고 있는 다리이다.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전주천의 오래된 명물다리이기도 하다.

어은교(魚隱橋)

동네 이름인 어은골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최근 어은터널이 뚫리면서 생긴다리로, 이 다리는 어은터널로 이어져 중화산동으로 넘어가는 다리이다.

진북교(鎭北橋)

모래내에서 학생회관을 거처 진북터널로 이어져 어은교와 함께 중화산동으로 넘어가는 또 하나의 다리이다.

진북교라는 이름은 진북터널이 위치한 산자락 옆에 위치한 진북사의 절 이름을 빌어 이름지어졌다.

가련교(可憐橋)

현 하가지구 내의 가련산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남동으로 뻗은 산맥과 남서로 뻗은 산맥과 연결되지 못하고 홀로 솟은 모습을 보고 어찌 이어지지 못했는가의 뜻을 담고 있다.

2011년 초, 가련산로가 뚫리면서 덕진동과 서신동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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