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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다리

<11> 추천대교

‘완산지’에는 전주부성의 3대 다리인 남천교, 서천교, 추천교만이 등재되어 있다. 그런데 흔히들 전주부성에 남천교와 서천교를 비롯해 싸전다리, 쇠전다리(연죽교), 소금전다리, 사마교 등 여섯 개의 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추천교를 합하면 모두 일곱 개다.

사마교를 지나면 도토리골 앞으로 나무다리가 나오며, 도토리골 나무다리를 지나 전주천과 삼천이 만나는 자리에 전주부성의 마지막 다리라고 할 수 있는 추천교가 보인다. 추천교는 지금의 추천대교에 해당하지만 원래의 자리는 아니란다.

 

‘완산지’에는 추천교가 석교로 나오는데, 고지도상에는 나무다리 형상을 하고 있으며 추천교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위로 한내를 건너 삼례역과 비비정이 자리했다. 이처럼 전주천에는 석교를 비롯, 나무다리, 징검다리 등 생각보다 많은 다리가 있었다.

전주 가련산에는 6.25 때 전사한 학도병들의 넋을 기리는 충혼탑이 있다. 가련산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북쪽 산자락에는 하가동과 아랫가르내, 서쪽 자락에는 웃가르내, 남쪽자락에는 사평이 있다.

아랫가르내의 다른 이름은 하가리(下可里)다. 아랫가르내 북쪽으로 가르내에 놓인 다리가 추천교(湫川橋)다. 이전에는 용산다리 혹은 전주교로 불리기도 했다. 전주천은 양편에 고사뜰과 사평뜰을 두고 북진하다가 고사뜰 북쪽 꼭지점에서 삼천과 만나 가래여울을 형성한다. 전주천이 건산천의 물길을 받아 삼천과 합류되는 구간에 다름 아니다. 이곳부터 만경강까지 이어지는 물줄기를 추천(楸川) 혹은 가래여울, 가리내(가르내), 사탄, 추탄(楸灘)이라고 부른다.

가래여울에 놓인 다리가 바로 추천교로, 이는 약 400여년 전 추탄(楸灘)의 효행을 기려 명명된 이름이다.

일찍이 가르내(현재의 하가마을) 일대는 전주이씨들의 집성촌이었다. 호가 추탄(楸灘)인 전주이씨 후손 이경동의 아버지(達誠公)가 중병으로 어느 날 밤 사경을 헤매었다.

이경동은 급히 인근 비석날(현재 팔복동 버드랑주)에 사는 명의한테 찾아가 처방약을 받아들고 귀가를 서둘렀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주천이 삽시간에 범람했다. 이경동은 앞뒤 가릴 것 없이 물을 건너기 위해 전주천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물살이 양쪽으로 쫘악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다. 홍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다급한 이경동은 한 걸음에 집으로 달려왔다. 그의 부친은 얼마 후 기사회생했다. 물론 냇물은 추탄이 건너간 다음 다시 합쳐졌다. 이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의 효성에 하늘도 감동했다며 칭송이 자자했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나무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가 바로 추탄의 추 자를 딴 추천교(楸川橋)다.

전주 외곽 지역에 놓인 이 다리들 속에는 고단했던 삶의 흔적과 효열을 중시했던 시대정신의 일면이 들어 있다. 한번 지어진 이름은 세월의 무게를 켜켜이 담아내며 그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그 속에 담긴 사연과 정황을 되살리는 셈이다.

냇물이 갈라진 웃마을을 상가리(웃가르내), 밑으로 갈라진 마을은 하가리(아랫가르내)라고 지금도 부른다.

추탄 이경동은 황방산 아래 마전 마을(지금의 서신동) 출신이다. 추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황강서원에 제향된 황강 이문정의 후손이며, 조선의 개국공신 이백유의 손자다. 그는 우승지 벼슬을 지낼 때 왕비 윤씨의 폐비를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이경동은 대사헌, 예조참판, 병조참판, 동지중추부사, 동지경연사 등의 벼슬을 역임한 후 낙향하여 추천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년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팔복동 황방산 밑에는 이경동의 효행을 기린 비가 있다.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지의금부사 사헌부 대사헌 추탄선생 조대비(嘉善大夫 兵曹參判兼 知義禁府事 司憲府 大司憲 楸灘先生 釣臺碑)’라고 새겨져 있다.

전주 팔복동에서 덕진동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놓인 추천교는 현재 추천대교(1997.10.24-2000.5.8)로 명명하고 있지만 용산대교(용산평이란 지명에서 유래), 전주대교로 불리우기도 했다.

다리 밑 몇몇 남지 않은 족발집은 예나 지금이나 공단에 다니는 사람들의 일상의 곤궁함과 피로를 날리면서 얼얼한 중독성을 주고 있다. 하반영옹의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산업도로다리로도 불리웠다고.

아랫가르내의 동쪽으로는 호반촌이 있다. 1970년대 택지조성사업 때 만들어진 동네다. 아랫가르내에서 가련산 자락을 따라 나있는 길이 있다. 이곳으로 내려 가다보면, 아랫가르내를 막 벗어나서 조그만 다리가 하나 있었다. 이 다리를 구성다리라고 했다.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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