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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사람

마이신과 바꾼 마이신닭

 

 

 

- 소장님! 이거 받으세요!

- 이게 뭐에요?

- 소장님은 기억이 안 나는가베? 저번에 그 마이신 말이여~ 그거 먹여서 키운 놈이오. 인삼도 들었으니 해 드시고 힘내시오. 날도 더운디

- 네?

- 소장님이 그때 마이신을 안 줬으면 벌써 죽었을 거구만요. 열여섯 마리 샀는데 두 마리 죽고 다 살았어요. 이게 다 소장 덕이구만.

 

늙으신 손씨, 그가 묵직한 비닐봉투를 건네주시고는 보건진료소를 나선다. 봉투를 들여다보니 신문지로 포장된 물건이 들어 있다. 신문지를 벗기니 다시 비닐봉지로 감쌌다. 닭 한 마리. 아직 채 식지 않은 뜨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마을 강아지들도 인삼 목걸이 걸고 돌아다니고, 집집마다 인삼으로 깍두기를 담아 먹는다는 전설이 흐르는 동네. 손씨는 인삼 농사가 많아 일 부자, 돈 부자로 소문난 부농(富農)이다. 그런데 그분은 보건진료소에 오시면 감기약 처방에 꼭 마이신(항생제)을 넣어달라는 특별 주문을 하셨는데 그것을 병아리에게 먹였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 아버님, 감기에 항생제를 굳이 드실 필요는 없어요. 열도 없고 목도 괜찮은데...

- 아녀! 소장! 나는 마이신 안 들어간 약은 먹으나 마나요. 꼭 넣어 주시구랴. 한쪽이 빨강색인 그 약, 안 넣으면 안 된다고...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던 아버지에게 다른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 어허! 약은 내가 먹는 것잉게. 그 약 먹고도 안 나으면 읍내 병원으로 나갈테니까.

- 그럼 이틀 처방을 드릴테니 드시고, 호전 안 되면 병원에 한 번 다녀오세요.

손씨는 약 포지에서 마이신을 골라 보관했다가 병아리들에게 먹인 것이다. 그 덕분인지 병아리들은 성인 닭으로 튼실하게 자라 삼계탕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성장기를 자랑스럽게 고백하신다. 장날 시장에 나가 병아리를 사다가 마당에 풀어놓았는데 며칠 사이 병든 병아리가 생겨 고민이 생긴 것이다. 동물병원에서도 마이신을 주더라는 누군가의 정보를 입수한 것이었다.

모내기 중 논두렁에서 새참으로 먹은 국수랑 막걸리에 체했는지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김씨 어머니가 오셨다. 소화제와 위장기능개선제를 드렸는데 바로 일어서질 않고 머뭇거리신다.

- 저기... 소장님! 저... 마이신 몇 알만 좀 주면 안될까요?

- 누가 어디 아프신가요?

- 아니... 그게 아니라.....

- 아~!! 병아리 주려고 그러죠?

- 어떻게 아셨대요? 아 글쎄~ 장날 열 마리 사왔는데 벌써 두 마리가 죽었어. 아침에 닭장에 가보니 한 마리가 또 졸고 있더라고요.

- 그런데 어머니, 있잖아요. 이 마이신이 병아리 아픈 것까지 치료되는지는 모르겠어요.

- 그냥 줘봐.

- 병아리 약은 동물병원에 가서 상담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 내가 아주 크고 넓은 고무통에 약 하나 풀어서 며칠 동안 먹을 수 있도록 해볼랑게요.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서 어머니와 나는 멋쩍게 웃는다. 병아리, 개, 돼지, 심지어 집으로 왕진을 나온 동물 병원의 수의사도 노우(老牛)가 되어 더 이상 치료 방법이 없다고 진단 내리고 포기한 소도 보건진료소에서는 딱한 사정을 안고 찾아오는 고객이 된다. 며칠 째 밥(여물)을 잘 안 먹는다고 체한 약이랑 소화제를 달라고 하소연 하는 어머니, 늦은 밤 개가 설사를 한다며 개를 안고 보건진료소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등을 떠밀 수도 그렇다고 그냥 바라만 볼 수 없는 상황들이다.

 

졸지에 마이신으로 공범(共犯)이 된 나는 병아리가 죽어도 책임을 묻지 말라는 말로 최후 방어막을 친다. 오래전 손씨 아버지가 감기약에서 마이신을 골라낸 일, 신문지에 포장한 뜨뜻한 닭 한 마리를 건네받은 일, 장날 시장에서 병아리들을 사다가 풀어 놓고 졸고 있는 그들의 생명이 안타까워 보건진료소에 마이신을 가지러 오는 일. ‘생명’을 향한 애틋함의 결국은 우리의 이기심을 채우려는 것이었나 씁쓸한 생각이 들면서도 병아리에게 마이신을 준 탓에 마이신 먹은 닭을 먹어야 하는 자승자박(自繩自縛)으로 이어지는 아이러니.

올 여름 삼복(三伏)에 삼계탕을 먹으며 이 일을 추억할 것이다. 마이신과 바꾼 ‘마이신 닭’까지 먹었으니.

 

삼복 더위여 오라!

너희와 맞설 보양 무기가 장전되어 있나니.<글.사진 무주상곡보건진료소 박도순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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