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아버지의 행동이 수상하다. 앉으시라고 몇 번을 권했는데도 됐다면서 서 계신다. 뒤에 오는 환자들에게 계속 순서를 양보하신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구나. 나는 이씨 아버지가 양보한대로 진료를 마쳤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진료실에 둘이서 마주 앉았다.
- 아버님, 무슨 걱정 있으세요?
- 소장님! 저기... 우리 집 큰 일났구먼요. 어짜면 좋냐 말이오~
이씨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시더니 호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신다.
- 이것 좀 봐주시게. 우리 집 할망구 말이여. 한 가지도 아니고 네 가지나 되는 암에 걸렸다는 통보가 왔네. 이것 때문에 할망구랑 나랑 며칠 동안 잠도 못자고 요새는 서로 말도 안한다네.
건네주는 봉투를 열어 종이를 꺼내서 읽어 내려갔다.
- 어? 아버님, 잠깐만요. 이거 진짜네요! 어쩌죠? 정말 큰일 났네요~!
- 나야 여든이 넘었응게 인생 살 것 다 살았지마는 왜 나를 냅두고 우리 할망구냔 말이여! 불쌍해서 어짜나.
- 그러게요. 유방암, 자궁암, 대장암에 간암까지.
- 아 글씨, 암이라는 것이 한 가지만 걸려도 큰 일인디, 네 가지나 걸렸다니 이를 어쩌냔 말이오~
- 아이고, 아이고, 우리 아버님, 어머님 불쌍해서 어쩐대요?
나는 과한 너스레를 떨며 아버지를 더욱 놀라게 해드렸다.
- 아버님, 이제 어쩌실거에요?
- 아직 아들 딸들한테 연락도 안했다네. 새끼들이 놀래 자빠질 거구먼요.
- 제가 대신 연락해드릴까요?
- 아녀 아녀! 소장님! 아직은 연락할 때가 아니라네.
이씨 아버지는 손사래를 치신다.
- 아버님! 이제부터는요, 어머니가 해달라는 거 다 해주시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돈 아끼지 말고 맘대로 사서 드세요. 보고 싶은 아들네 딸네 집 마음껏 다녀오세요. 옆집이랑 다투고 혹시 아직까지 감정 풀지 못한 것 있으면 화해하시고, 또 흠... 손자들 얼굴도 미리 미리 보고 오시고, 아직 어머니가 몸이 불편한 것은 아니니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고 여행도 다녀오시고요.
- 그러게 말이네.
- 암 수술 받고나면 항암 요법 받아야죠, 링거 일곱 개 여덟 개 줄줄이 달고 침대에 누워서 코에 끼운 호스로 죽 받아먹으면서 인공호흡기 코에 끼우고 말이죠. 욕창 생기고 아프고, 엄청 고생을 할 건데 그때 후회하지 마시고요.
나의 너스레는 점점 심해진다.
- 아, 그러게 말입니다. 그거야 소장님 말이 맞지요.
한숨 섞인 대답을 하시더니 L 씨는 금방 눈물을 글썽이신다.
이씨가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보여주신 종이는 어머니 이름 앞으로 발송된 ‘건강검진’ 안내문이었다. 출생년도(짝수, 홀수)에 따라 암 종별 연령 및 검진 주기에 맞춰 실시되는 ‘암’ 건강검진 안내문이다. 분변잠혈검사를 통하여 검사하는 대장암(만 50세 이상 1년에 1회 매년 검사)부터 만 30세 이상 여성의 자궁경부암, 만 40세 이상 여성의 유방암, 만 40세 이상 남녀 위암, 간암에 이르기까지 건강검진 안내문에는 손바닥 만한 크기에 검사 대상과 방법, 비용, 주의 사항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 아버님, 암이 무서우세요?
- 무섭지 그럼!!
- 뭐가 무서우세요?
- 어허! 소장님 보시게나! 암이 걸렸다 하면 안 무섭겠는가?
- 어차피 사람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뭘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누구나 당하는 일이지만 어머니에게는 그게 좀 일찍 왔다는 거죠.
- 그래도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라네.
- 언제 돌아가실건데요?
- 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평균 수명이 연장되면서 건강 수명이 늘어나고 건강에 대한 관심과 자가 관리, 예방 사업 등의 중요성이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넘쳐나는 건강검진과 건강 정보를 담은 인쇄물의 홍수, 인터넷 바다에는 쓰레기 같은 정보가 넘쳐나고 그나마 볼만한 정보들은 유료서비스니 돈을 내라한다. 이 정보들을 우리는 얼마나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가.
정보를 다루는데 있어 기초가 되는 ‘기능적 의료정보 이해능력(Functional health literacy)’은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능력이다. 제한된 기능적 의료정보 이해능력이나 부적절한 의료정보 이해능력은 건강성과 뿐 아니라 의료비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되고 있다.
의료정보 이해능력이 낮은 노인들은 만성질환의 유병률(고혈압 52.2%, 당뇨 20.2%, 골다공증 29.6%, 만성폐쇄성폐질환 28.1%)이 높고, 그에 따라 의료이용요구도가 높으나 그들의 기능적 의료정보 이해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낮다. 특히 농촌에 살고 있는 노인들의 교육 수준이 낮다보니 문장 이해능력이라 국문 해독 능력이 없다.
농촌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노인을 대상으로 기능적 의료정보 이해능력과 이와 관련된 영향요인을 파악한 조사연구에서도 대상자의 기능적 의료정보 이해능력의 평균점수는 총 15점 만점에 6.7점의 낮은 수준으로 응답자의 52.4%가 중간 이하의 낮은 수준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건강검진 안내문은 친절한 내용을 담아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배달되었지만 해독할 능력이 없어 몇 글자 아는 글자만으로 안내문을 해석하여 오류를 범한 이씨 아버지. 그와 부인은 ‘암’이라는 글자에 사로잡혀 며칠 동안 잠을 못 주무시고 애를 태웠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전전긍긍하셨을 두 분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들의 낮은 이해 능력은 누구를 탓해야하는 걸까.
- 아버지! 이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요, 어머니 말씀인데요, 아마 100살도 넘게 장수하실 것 같다고 하는데요?
- 아니, 소장님! 그게 무슨 소리여?
- 여기에 적힌 것은 어머니가 네 가지 암에 걸렸다고 알려주는 내용이 아니라 어머니 몸에 네 가지 암이 있나 없나 검사해봅시다. 약속된 시간에 병원에 검사받으러 오시라고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 아니, 그게 정말이여?
- 그럼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장난이 좀 심했지요?
- 아니, 그게 참말이냐고?
- 네!
- 허허허허. 그려?
이씨 아버지는 몇 번이나 더 참말이냐 참말이냐 확인하더니 꼬았던 다리를 풀고 어이없다는 듯 웃으신다. 보건의료원 건강검진실에 검사 일정을 문의하고 예약 가능 여부와 필요한 것들을 확인하여 알려드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고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돌아서는 아버지를 불러 그동안 마음고생 많으셨다며 꼬옥 안아드렸다.
이씨 아버지에게 네 가지 없어 기분 좋은 날.
진료실에 봄 햇살이 눈부시다..<글.사진 무주상곡보건진료소 박도순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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