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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사람

청려장(靑藜杖)

 

 

모기 입이 비뚤어지고 뜨거운 한낮의 햇볕도 누그러져 풀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처서(處暑)이다. 귀뚜라미 소리 간간이 들려오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바람이 선선하다. 사무실 에어컨 청소도 해야겠고, 선풍기 날개에 쌓인 바람 때도 씻어야겠구나. 차를 마시며 밀린 진료 기록을 컴퓨터에 입력한다.

모니터 너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민씨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보건진료소 쪽으로 걸어오신다. 한 손에는 검정 비닐봉지를 감으셨다. 잠시 후 현관문 열리는 소리!

- 소장님 계신가요?

- 어서 오세요. 어머니!

- 손 좀 치료를 해줘야겠어요.

하던 일을 멈추고 일어섰다.

- 다치셨어요?

- 다친 지는 한참 됐는데 참다 참다 하도 아파서 와봤네요.

- 네.

왼손을 감싸고 있는 검정 비닐봉지를 조심스럽게 풀어본다. 다시 두 번째 손가락에 두툼한 드레싱 뭉치가 나타난다. 권투 장갑처럼 둘러감은 헝겊과 굵은 고무줄과 다시 그 안을 감싼 조각난 헝겊을 걷어내니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 그랑게 말이요.

상처 부위에 얇은 헝겊을 덮고 그 위를 고무줄과 끈으로 손가락은 물에 퉁퉁 불어터진 모습으로 허옇게 드러났다. 드레싱이 되어 있는 것을 풀어내자 깊게 파인 상처가 또 까맣게 변해있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 이게 왜 그런거죠?

- 아~ 글씨 누가 명아주로 지팡이를 맹글믄 허리 아픈 것도 낫고 오래 산다고 하길래 우리 고추 밭 가에 그것들이 났는디 봄내 일부러 뽑지 않고 뒀지~ 가실에 저거 다 크면 낫으로 쪼아서 지팽이를 맹글어야겠다 생각하고는 한 보름 전에 낫으로 그걸 끊다가 그만 손가락을 다쳤어요.

어머니의 말씀은 계속 되었다.

- 피가 어찌나 나던지... 입고 있던 속옷을 낫으로 잘라서 상처를 칭칭 감아 맸는디 계속 피가 나서 실로 꽁꽁 묶었지요. 집에 오니 손가락이 하도 저려서 끈을 풀었더만 툭툭 건드는대로 다시 피가 나고 또 피가 나고... 할 수없이 이렇게 묶어 두고는 다시는 풀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지요. 그렇게 그냥 지낸거라요. 피가 안나오니까 살것드만요.

- ......

- 그란디 한 열흘쯤 지났으까? 어디선가 썩는 냄새가 나는 거라요. 첨엔 이게 무슨 냄새인가 도대체 모르것더니 아 자세히 봉게 내 몸에서 나는 냄새더라니까. 그래서 이렇게 쫒아왔네요.

- 그런데 상처 부위가 왜 이렇게 까맣게 된 건지....

- 아~ 그거는요. 누가 그 솥단지 아래 까망 숯검댕이 끄스름을 긁어서 바르면 잘 낫는다고 해서 그걸 좀 발라봤구만요.

나는 처참한 어머니의 손가락을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열흘 이상이나 고무줄에 숨통이 조였을 혈관이며 근육이며 인대며 손톱에 이르기까지 고통들이 구겨진 종이가 펴지듯 되살아나는 듯 했다. 잘못된 처치로 인해 생긴 또 다른 고통들로 어머니는 밤새 잠을 제대로 주무시기나 했을까?

 

명아주. 이 풀은 풀잎에 제초제가 닿아도 또르르 이슬방울처럼 굴러떨어져 독한 제초제에도 끄떡없이 잘 살아나는 녀석이다. 나물로 먹더라도 삶아서 보관하면 물러지는 풀이어서 생것으로 뜯어다가 그늘에 잘 말려서 정월 보름이면 삶아서 무쳐먹거나 볶아 먹었지. 길가나 논둑, 밭, 담장 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해살이 풀로 뽑아도 뽑아도 많이 나는 풀, 봄에 싹이 나서 가을까지 자라나는 대로 내버려두면 어른 키를 훌쩍 넘어 버리는 질긴 생명력의 명아주. 줄기가 올곧게 자라 지팡이나 부지깽이로 쓰이는 그런 풀이다.

 

명아주 줄기로 만든 지팡이를 청려장(靑藜杖)이라고 부른다. 푸를 청(靑), 명아주(藜), 지팡이 장(杖)... 중국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후한 시대에 ‘유향’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노인이 나타나 청려장 지팡이로 땅을 세차게 두드리자 불빛이 환하게 일어났고, 그 빛으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친다고 전해져 ‘효행(孝行)식물’로 분류된다고도 한다. '본초강목’에도 ‘청려장을 짚고 다니면 중풍이 안 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고 중풍이 걸 린 사람도 쉽게 낫고 신경통에도 좋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그 오래된 전설이 어떻게 우리 어머니에게까지 전해지게 된 것일까?

명아주를 베려다 손을 베고 만 어머니, 철철 흐르는 피를 막을 수 없어 입고 있던 속옷을 찢어 상처를 동동 감아 맨 어머니 손가락은 살려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생리식염수를 상처 부위에 부어가며 세척한다. Aseptic(무균성)을 무시하고 비누칠하여 박박 문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 어머니, 병원에 가셔서 사진도 찍어야하고 검사도 해야 합니다.

- 아이구~ 지금 얼마나 바쁜데 병원에 가라니요?

- 이거 염증이 더 심해지거나 제대로 치료 안하시면 어머니 손가락을 절단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사용하지 못 할 수도 있다고요.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다소 충격적인 훈계(!)로 말씀드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이렇게 심하고 복잡하고 치료 시간도 오래 걸릴 것 같은 환자에게 제대로 된 검사 하나 할 없는, 농어촌 등 보건의료를 위한 특별조치법의 한계에 부딪힌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 진료소에는 어머니 상처에 비하면 항생제도 약하고요, 그러다 보니 치료가 잘 안되거든요. 손가락 안에 있는 인대나 근육이 다쳤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비장의 무기로 추가 공격을 해도 내 변명들은 너무나 빈약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안다. 이 어머니는 병원에 갈 리가 없다는 것을. 바빠도 너무 바쁘다. 엉덩이까지 줄줄 내려온 바지춤을 치켜 올릴 시간이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 후에도 서너 차례 소독과 드레싱 교환을 위하여 보건진료소에 오셨고 급기야 아들에게 연락하여 병원 검진을 권유드렸다. 병원에서는 볼 것도 없이 절단 치료를 권유하더라면서 깜짝 놀라 다시 보건진료소에 오셨다.

- 소장님까지 치료를 못해준다고 하면 이제 보건소도 안 올랍니다.

- 아뇨, 오셔야죠. 병원에 못 가신다니 할 수 없죠.

- 나는 상처가 나도 원래 잘 낫는 체질입니다. 걱정마시라요.

- 어머니, 이게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냐고요?

 

초가을에 다친 어머니의 손가락은 가을 추수를 마치고 한겨울 즈음에 치료가 완료되었다. 다치는 것은 한 순간, 치료되는 것은 오랜 시간. 흉터는 남았지만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는 후유증을 남기지는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명아주 지팡이. 그 지팡이가 건강을 지켜주는 청려장이라고 믿고 행하는 또 다른 어르신들은 안계실까.

사람은 몇 살까지 살아야 이만하면 충분히 잘 살았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늘 길로 오르는 날, 청려장(靑藜杖)은 어머니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까.<글.사진 무주상곡보건진료소 박도순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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