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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전주용머리고개

전주의 풍수좌향은 사신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신(四神)은 사신은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 등 네 마리의 신성한 영물들로 모두 상상의 동물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등에서도 이 사신을 등장시켜 수호를 바라는 염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비단 그림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나타난다.

전주 지명에도 사신도가 배열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기린, 남쪽으로는 봉황, 서쪽으로는 용, 북쪽으로는 거북을 두었다. 동쪽의 기린봉은 산세가 곧게 솟아났으며, 남쪽의 봉황암은 고지도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봉황암 앞에는 봉황지로 현재 효자동 근처였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단다.

전주의 서쪽은 완산칠봉의 용이 서쪽으로 향하여 용트림하고 있으며, 용의 머리 부분이 현재의 용머리고개(龍頭峴)다. 북쪽으로 읍성 내에 현무지(玄武池)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지리적으로 기린봉의 산세가 도솔봉으로 이어오다가 읍성쪽으로 내려와 금암동(현 KBS방송국 전주총국)에 거북바위(龜岩)가 위치하고 있다.

전주읍성과 풍수 체계가 파손 유린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침략기 무렵으로 보인다는 해석이 많다.

경기전에 소학교를 세우고 오목대와 이목대를 절단냈으며, 용머리고개로 길을 내고 심지어는 동익헌을 없애고 길을 내었다. 조선왕조의 본향인 전주의 풍수지리 구도를 훼손시켜 조선왕조의 국혼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것으로 본다는 송화섭교수(전주대)의 설명이다.

항공 사진으로 보면 용머리고개는 유연대와 어은골 뒷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이 몸체인 것이 신기할 만큼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야말로 힘차게 솟음질 치는 용의 머리 부분이다.

그 용머리고개가 지금 움푹 패이고 잘려 나가 말만 용이지, 그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실이다. 동학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할 당시 원평, 삼천을 거쳐 용머리고개를 지나 전주성에 들어 왔다.

이때가 1894년 4월 27일(음력). 동학농민군에게 새벽은 승리의 여명과 함께 밝았다. 전주성이 내려다 보이는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동학농민군들은 단숨에 성을 차지해버릴 기세였고, 이제 세상은 그들의 손에 있다고 믿었다. 전주성 안에서는 이미 파직된 전임 감사 김문현이 병졸 하나 없는 상태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었다.

군사는 중앙에서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차출되었고, 후임 감사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으며 남아 있는 관속들은 모두 농민군과 내통을 한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농민군이 서문 쪽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자, 김문현은 포기할 수 없는 성 대신에, 성 밖의 민가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 수천 채의 민가가 삽시간에 불타올랐다.

그러나 불길은 농민군을 잠시 저지하는 대신, 관군의 발등을 찍었다. 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민심은,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 더 큰 불길이 되었다. 정오 무렵, 땅을 갈아엎듯 터져오르는 대포소리와 수천 발의 총성과 함께, 마침내 서문이 깨지고 남문이 열렸다.

전주성의 함락이었다. 무엇이 땅밖에 모르던 농민들에게 쟁기 대신에 창과 칼을 들게 했는가. 들의 나락을 거두는 대신에 사람의 목을 거두게 했는가.

현재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과 서완산동 사이에 있는 이곳은 강감찬이 용의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전설을 포함, 마한의 기운이 쇠진한 용이 승천을 하지 못했다는 전설 등 민중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왔다.

항상 어둠의 끝에서 아침이 오듯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는 남부시장 사람들의 삶처럼. 꼬치산마을(따박골)은 6,25전쟁 후부터 점술가와 무속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조선시대 점술인들이 일반인들의 천대를 피해 전주성문(서문) 밖에 하나 둘씩 자리하면서 생기기 시작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용머리고개의 연대와 유래 등이 정확히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로, 선조들이 용머리 같다는 고개라 하여 龍頭峙(용두치, 용두현, 용두)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오면서, 용의 형상을 닮은 큰 인물의 출현을 바라고 또 바랬다. 국도 1호선인 경목선(서울-목포)이 지나는 곳으로 먼 옛날 호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물론 김제, 금구로 나가는 고개이기도 했다.

옛날에는 구제날망 또는 제말랑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일제시대에는 완산교 다리를 건설하여 용의 형태인 산능선을 도로로 개설, 용의 허리를 끊은 후로부터 용머리 고개라 불리어 왔다는 구전도 보인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청동기 사람들 부싯돌로 튀는
햇볕 몇 낱이 바삭거린다.

 

조선낫은 풀무질로
버얼겋게 익어가고
징소리 몇 줄기, 쇠붙이 여음이
잉걸불이 된다.

 

산천초목의 귀를 깨우는 담근질
물과 불이 만나서 상생(相生)하며
날이 서는 명도(名刀)
불꽃으로 얼룩거리는
위험한 지각(知覺)의 빛을 털고
어둠을 베어내는 생애의
스스로 조선낫이 된다.
뜨겁던 가슴을 열고 나와
차거운 새벽이 된다.(소재호시인의 용머리고개 대장간에는)


'용(龍)을 타고 앉았구나, 올망졸망 사는구나. 별 가까이 사는 마을, 달 안 떠도 달맞이 꽃. 밤이 오면 오손도손 꿈을 안고 초롱초롱. 안개꽃 미리내가 골골이 흘러들어, 가슴마다 창문마다 망초 이불 포근하다. 어디 간들 더듬더듬 이런 사랑 찾을런가, 사랑사랑 내 사랑아. (전주세계소리축제 단가 노랫말공모 당선작 김광원시인의 민초가 가운데)'

 

'사랑사랑 내 사랑아'를 힘껏 불러보면 좋으련만 출,퇴근길 이곳은 교통지옥과 다름이 없는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

다만, 한일민속대장간의 김한일씨(64)와 광명대장간의 김창수씨(37)를 통해 옛일을 견주어볼 수 있을 뿐이다. 달구면 달굴수록 강해지는 무쇠같은 전주인들의 삶이 힘찬 망치칠과 담금질을 거쳐 언제, 어느 때 승천(昇天)하는 용으로 거듭날 것인가.

 

 

용머리고개의 전설 둘

 

 

하나, 강감찬장군, 승천 못한 용을 묻다

 

 

강감찬장군이 이곳에 있을 때였다. 어느 해에 가물어서 몹시 걱정하다가 하루는 하인을 시켜 지금 막 내를 건너는 초립동이 있을 터이니 그를 곧 데려오라고 일러 보냈다. 말대로 과연 그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다.

강감찬이 그를 보면서 호령하되 "이렇게 가물어도 못본체하고 지나가다니 괘씸하노라."라고 말했다. 그 초립동은 사실은 용이 둔갑한 것이었으니 죽음을 면하고자 승천하며 비를 내리게 하고 떨어져 죽었다. 강감찬은 그 용을 후히 장사지내 주고 묻어 주었다고 한다.

 

 

둘,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

 

 

마한(馬韓)의 기운이 쇠잔할 당시 민가에서 머리는 하나인데 몸뚱이가 둘이 달린 소를 낳은 이변이 생겼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일수이신(一首二身)?이 태어나고 홍수가 범람하는 것은 용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라고 하자 인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이때 전주천은 좁은목에서 폭포로 떨어진 물이 지금의 다가산 밑에서 급히 소(沼)를 이루어 물이 많았고, 물살 또한 급류였다. 전주천에서 자란 용이 천년을 기다려 승천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전주천의 물을 모조리 삼킨 후 하늘에 오르려고 힘을 쓰다가 떨어지고 말았는데, 힘이 빠져서가 아닌, 천 년에서 하루가 모자란 것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용이 떨어진 곳은 완산칠봉의 계곡으로, 당시만 해도 사람이 다니지 않은 원시림이었다. 승천하지 못한 한(恨)을 품었던 용(龍)의 머리가 지금의 용머리고개에 떨어졌으며, 용머리의 형상이라고 하여 용머리고개로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