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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전주 간판과 편액, 먹물 들다

 

 

 

 

 

 

 

 

 

 

 

 

 

 

‘그대여, 오늘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당신 닮은 옥색 한지를 샀습니다. 내맘 가득 담은 종이 위에 물길 트이고 소슬한 바람도 살랑살랑, 고향의 골목이 사라진 지금 삶이 소살거리는 전주 한옥마을에 마실을 나왔습니다(자작시)’

 

전주시 톨게이트에는 한옥으로 만들어져 있는데다가 '전주'라는 한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이 작품이 바로 효봉 여태명(원광대교수)씨의 글씨로, 이를 민체(民體)로 부르고 있다. 고속도로 호남선 전주시 톨게이트엔 '전주'라는 한글 현판이 붙어 있다.

가로 세로 2m70㎝×9m 짜리 큼직한 나무판에 전주라고 새긴 흰 글씨는 어린이가 쓴 것처럼 비뚤비뚤하다. 누구나 ‘나도 저만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쉬운 서법이지만 보면 볼수록 힘과 멋이 넘치는 가운데 당신 닮은 옥색 한지처럼 전주사람들의 멋이 잔뜩 배어나오고 있다.

그의 글씨체는 '민체'(民體)는 백성(=民)의 글씨체(=體)니 누구나 쓸 수 있고, 친근하고, 가지고 노는 게 당연하다.

그 모델은 고전소설 필사본의 글씨체였다.

여태명씨는 민체를 "삼베 옷에 짚신 신고 헤어진 듯 하면서도 풍요로우며 형식은 자유롭고 구속됨이 없이 작가가 시간 별로 달라지는 슬픔과 기쁨, 넉넉함과 배고픔의 진솔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삶이 있고 고통이 있고 그리고 사람이 살아 숨쉬고 있어, 장고 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고를 쳐대는 사람의 모습도 같이 어우러져 있다."고 표현한다. 판소리 한마당처럼, 민체는 민초의 삶 그 자체이다.

고속도로 '전주' 현판은 톨게이트 입구와 출구에 모두 붙어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현판의 글씨체가 다르다. 외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입구 글씨는 자음보다 모음이 크다.

자음은 자식(=子)이고 모음은 어머니(=母)다. 전주에 들어오는 모든 이가 부모처럼 넉넉한 민족의 고향에 안기라는 뜻이다. 첫 글자인 '전'의 'ㅓ'와 'ㄴ' 사이 여백은 전주의 지형을 형상화하고 있다.

반면 전주에서 외지로 나가는 출구에선 반대로 모음보다 자음이 크다. 이는 자식의 성장이다. 전주의 기와 멋을 받아 청출어람하라는 뜻이다.

전주의 최고 상징물중 하나는 북서쪽 호남고속도로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세워진 ‘호남제일문’이다. 조선시대 이후 전주가 전남·북을 통할하는 전라감영의 중심이자,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호남제일문은 애초 ‘북(北)이 허해 부(富)가 드물다’하여 지세상 허술한 북쪽을 누르기 위해 세워졌다는 풍수지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이 문의 유래는 1977년 5월 기존 4차선 진입로에 건립됐다가 1991년 전주에서 개최된 전국체전때 진입로 확장으로 헐렸고 1994년 8월부터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문은 전주IC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여의동 대로에 길이 43m, 폭 3.5m, 높이 12.4m의 규모를 자랑하며 당당하게 서있다. 문의 현판은 당대 최고 서예가였던 강암 송성용선생의 작품으로 낯선 사람들에게는 전주의 고풍을 그대로 전해주는 문패이자 도민에게는 고향의 상징적인 존재다.

전북을 예향의 고장으로 서게 한 전통은 이처럼 셀 수 없이 많다.

민족의 한과 애환을 풀어낸 판소리와 농악, 풍요로운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버무려진 맛의 문화 등 다급하지 않은 성품과 순후한 인심이 예향을 만들었다. 그 중심에 은은하게 묵의 기운이 흐르는 ‘문향’이 있다.

전북의 서단은 예향을 빚어낸 문화적 전통들을 자양분으로 꽃을 피웠고, 수백 년의 전통을 간직한 채 세계를 향해 묵의 향기를 발하고 있다.

일찍이 창암 이삼만 시대부터 두각을 보여 온 이 땅의 서단은 차분히 실력을 쌓고 세력을 갖추면서 석정 이정직, 벽하 조주승·유재 송기면·설송 최규상, 석전 황욱·강암 송성용·남정 최정균·여산 권갑석 등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를 배출해 왔다.

이들이 있어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독자적인 호남 서맥이 뿌리를 내렸고, 서예를 테마로 한 국제행사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와 강암서예관·우관서예관 등 격조 있는 전시장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전주가 예스럽고 소박한 멋과 기품 있는 철학을 가진 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편액과 간판으로 즐비하다.

진안군도 마찬가지다. 완주군에서 진안군으로 넘는 길에 ‘홍삼 한방의 고장 진안’이라는 상징어를 여태명씨의 글씨로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서예를 통한 도시의 품격이다.

특히 전주한옥마을을 걷기만 해도 글씨의 호사를 경험할 수 있다. 최명희문학관의 ‘독락재’, 전주한옥생활체험관의 ‘세화관·단영실·다경루’, 전주전통술박물관의 ‘수을관·계영원·양화당’, 전주전통문화관의 ‘경업당·화명원’, (사)문화연구창의 ‘자만재’, 전주동헌의 ‘풍락헌’ 등을 비롯해 문화 시설과 유적, 음식점과 숙박업소, 공방 등 어느 건물에 걸린 이름자만 살피며 걸어도 아주 특별한 서예전시장이 되기 때문이다.

또, 남창당한약방, 전동성당, 한방문화센터, 최명희문학관, 오목대 사랑채, 미선공예, 미당 등은 한글 간판과 편액들이다.

한옥마을을 노니는 글씨들은 산민 이용, 심석 김병기, 효봉 여태명, 무산 이승철, 중하 김두경씨를 비롯해 강암 송성용의 필맥을 잇는 이당 송현숙, 취석 송하진, 그리고 미산 송하선, 하산 서홍식, 백담 백종희씨 등 이 땅을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필획들이다.

가람 이병기가 시를 쓰던 곳으로 더 유명한 양사재의 현판과 주련은 여산 권갑석씨의 글씨다. 세월을 짐작케 하는 고택의 향기가 획 하나하나에 새겨 있다.

오목대에 오르면 석전 황욱의 글씨가, 학인당의 문을 열면 성당 김돈희와 효산 이광렬의 글씨가 반긴다. 전북예절원인 삼락헌에도 오래 묵은 글씨의 향이 곳곳에 서려 있다.

뿐만 아니라 전북도청과 전북도립미술관의 문패 글씨는 완판본을 집자해 만든 것으로 더욱 더 글자와 문자예술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컴퓨터로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라 한 글자 한 글자 수공의 힘이 살아 있는 아주 귀한 글씨들. 그래서 전북의 편액과 간판들은 의미뿐 아니라 서예의 전통과 현대의 아름다움을 잘 조화시킨 예술성도 돋보인다.

글씨의 호사는 우선 눈이 반갑고, 소리 내 부르면 입과 귀가 즐겁다. 글의 의미까지 알면 오감이 더욱 차오른다. 그래서 전주는 예나 지금이나 ‘온(ON)고을’이다.

 

‘꼭두새벽, 살포시 내려앉는 이슬에 놀라 부스스 깨어나는 오목대의 애기똥풀처럼 구김살 없이 살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경기전의 대나무, 비바람에 찢겨져 흩어지느니 차라리 목을 꺾는 비장함 전주 양반들의 선비정신인가요. 밤이면 태조로의 밤을 수 놓는 청사초롱 하나 둘씩 불밝혀 전동성당도 반짝반짝. 코발트색 하늘 아래로 빨강 물감 짠듯 부서지는 아침 햇살, 태조영정 하도 지엄해서 국보랍니다. 수원백씨의 ‘학인당’ 솟을대문 시나브로 밀치고 들어서면 싸리비 자국 고운 마당 살째기 목례. 댓돌 위 신발, 금재 최병심선생인가요, 그 정갈함 더욱 더해지는데 굴뚝 연기, 하루만 날려도 세월 천년이십니다. 처마 훑고 지나가는 바람에 울리는 승암사의 풍경 소리, 누구를 위한 울림입니까. 은행로와 노송천 ‘또랑또랑’ 실개천 따라 아기자기하게 늘어선 집들마다 역사의 향기가 있고, 5미6감 찾아 숨바꼭질 너무 푸져 매일매일 잔칫상 차려놓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의 또랑새비(또랑새우)는 흔적없이 사라져 한정식집의 토하젓으로 대신하며, 이강주 한 잔 술에 ‘기린토월(麒麟吐月)’ 흥건히 넘치십니다. 왕도 견훤의 한 품어서 인가요, ‘부성삼화(府城三花)’ 진달래, 검붉은 기운 서려 있어라. 이내, 키 작은 처마, 이마를 맞댄 양, 어깨를 겨누는 듯 포개진 골목 너머 소리문화관의 가얏고 소리, 적이 남고모종(南固暮鐘) 불러오네요(자작시)’

 

전라북도 예맥(藝脈)의 도도한 흐름, 그 길은 넓고 길다. 디뎌온 길도 디뎌갈 길도 단단하다. 느릿하고 느긋하다. 온고을 ‘전주’의 간판과 편액, 먹물과 만나는 오늘, 이 조그만 조각배 서신에 살듯한 정을 담아 보낸다. 싱그러운 온고을 쥘 부채 하나 손에 쥐고 고샅 어귀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가을날에는.<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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