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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토리

가을, 단청에 물들다

 

 

 얼마 전 한벽당 옆의 요월대 단청을 새로 한다고 자문 요청이 있어 갔었다. 단청은 목부재를 보호하기 위해 칠하는 것으로 새로운 단청을 올릴 때 마다 옛 것을 지워야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좀 서운할 때가 많다. 마침 전주시 문화재 담당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단청을 새로 올리면 옛 단청이 어떠했는지, 단청 안료가 어떤 것이었는지, 시대가 흐를수록 기록적인 부분에서 안타까움이  많을 것 같다.’고 한 적 있다. 문화재 담당자가 그런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 보존ㆍ관리에 있어서 진일보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옛 것에 대한 자료를 남겨 놓기 위해 단청 부분에서는 문양모사도를 그리게 하고 사진자료를 찍는 정도이다. 정작 단청 안료가 어떤 것이며 접착제는 무엇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자료는 남겨지지 않는다.
  단청의 시작은 정착생활을 하면서 집이라는 건축이 시작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 인류의 혁명은 농사를 짓는 일이었고 그를 위해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정착생활을 위한 “집”은 모든 건물 축조의 동기가 되었고 “집”의 개념에서 공공의 건축물, 궁궐, 사찰 등 건물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 시기는 원추형 막집이 세워졌고 이 단계를 지나면 움집이 형성된다. 움집의 구조는 내부에 수직기둥이 있는 원추형 또는 사각추형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철기문화를 수용하여 좀 더 국가형태를 지닌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나라를 이룩하게 되었고 372년 고구려가 불교를 국교로 인정하면서 문화의 놀라운 발전이 도래하였다. 따라서 375년 초문사와 이불란사 등 우리나라 초기의 불교 건축물이 세워지게 되었고, 이 건축물은 궁궐 건축의 배치방식을 이용하였으나 신 공법의 건축기술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이 시기의 건축물에 대한 정확한 건축유물은 남아있지 않으나 고구려 고분벽화는 이 시기의 건축적 상황이 어떠했는가의 자료를 제공해 주는 역사적인 기록화이다. 이 시기의 건축은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보았을 때 기둥 주두에 동물의 얼굴을 그려 놓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안악3호분이다.(사진 1)

 

 

이와 비슷한 의미의 표현이 부안 개암사 대웅전 장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사진 2) 고구려 고분벽화는 3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의 벽화는 대부분 주인공의 초상화와 생활상을 그렸다. 초상화는 묘 주인을 그린 것으로 주로 불상의 표현과 같은 방식을 채택하였기에 불교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주인공의 초상화 도상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그려진 문양들은 연꽃, 화염문 등의 불교적인 모티브들이다.

 

또한 건축물의 창방에 해당하는 곳이나 포벽에 해당하는 곳들에 현재 불교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문양들이 그 당시에도 사용되고 있었다.(사진 3) 이 시기를 지나면 쌍영총을 비롯한 벽화에서부터 후기의 벽화에 이르기까지 불교적인 성격과 도교적인 신선사상을 동시에 보여 주는데, 채화된 문양의 종류는 다양하여 인동문, 연화문,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 기린, 봉황, 천인상, 기하학문, 운문 등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문양은 여전히 현재의 단청에서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백제는 중국과 교류하면서 세련된 예술문화를 이루게 되는데 신라와 일본에 전함으로써 동방 문화 발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백제 단청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은 충남 송산리 고분벽화와 부여 능산리 고분이다. 이 벽화들은 벽면에 호분을 바르고 그렸으며 재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청, 적, 흑, 백 등의 색채로 되어있다. 또 고출토품인 산경문전 등과 같은 전돌에 그려진 독특한 도안은 그 당시 화공들의 우수한 기량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신라시대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단청의 기법을 전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단청에 대한 신라시대의 가장 좋은 예는 솔거가 그렸다는 황룡사노송도의 이야기이다. 솔거가 그린 노송도는 얼마나 사실적이었던지 새들이 실제의 나무인줄 알고 날아와 앉으려다 벽에 부딪쳐 죽는 일이 빈번하였으나 후대의 승려가 보수를 위해 보채(補彩)한 후로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사실적인 진경화가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목조건물 뿐 아니라 석조물에도 단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고려시대 때 송나라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우리의 많은 문화예술을 보고 기록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 궁궐 건물의 난간은 옻칠을 하고 동화(銅花)를 장식하였으며 단청이 장엄하고 화려하다고 하였고 도시의 주변에 귀족들이 사는 집들에 거의 모두 단청이 되어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궁, 관아건축, 귀족의 집에까지 단청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 단청은 고구려고분벽화처럼 꽃병에 꽃이 꽂혀진 상태의 정물화적인 그림(사진 4)이 포벽 및 벽면에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증거는 수덕사 대웅전 포벽화이다.

 

 

(사진 5)따라서 고려시대까지는 천정이나 목부재에 패턴화 된 문양을 베풀기도 하였지만 회화적인 단청을 오히려 더 선호하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단청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베풀어진 형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 단청의 일반적인 특성은 단청의 문양화된 무늬(사진 6)의 구성과 휘라고 하는 장식 띠와 매화점이라고 하는 장식구성을 이루어 매우 복잡하고, 더구나 차갑고 따뜻한 색의 한난대비, 서로 반대되는 색을 조화롭게 사용한 보색대비 등으로 극히 화려하게 처리하였다. 단청의 패턴화는 조선시대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전에 언급했듯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 후, 국가의 대대적인 사찰 복원에 의해 불가피하게 이루어졌던 것으로, 승려화가들이 전국을 돌면서 그 작업을 다할 수 없어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연화머리초, 녹화머리초, 주화머리초 등의 형식의 도안을 작성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승려화가들이 단청의 패턴화를 이룩하였다면 현재의 단청장들은 어떤 안료를 어떤 방법으로 도채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할 때라고 본다.<자료 제공:전경미 예원예술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돌봄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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