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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사람들

서예가권갑석5주기행사

 

 

 

 

 

 


 산처럼 물처럼 살다간 ‘여산(如山)’의 묵적(墨跡)의 세계를 오롯이 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한국서예연구회(회장 권영수)가 주최하고 전라북도가 후원하는 여산 권갑석선생 서거 5주기 추모 기념 ‘여산묵적(如山墨跡)’ 출판 기념회 및 유묵전이 14일부터 20일까지 전북예술회관 1층 전시실에서 개최된다.(초대 일시는 15일 오후 4시 같은 장소)

 

 특히 이번 행사를 위해 추진위원회(위원장 김광영)와 편찬위원회(위원장 박양재)가 3년 동안 준비 기간을 거쳐 만들어낸 ‘여산묵적’은 유산 권영수, 정암 김광영, 효성 김옥순, 백담 백종희, 효당 정명화 등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백두산천지(원광대박물관 소장)는 그림은 정승섭화백, 시는 김삼룡 전 원광대 총장, 글씨는 여산선생이 쓴 합작품이며, 추일우성(秋日偶成, 호원대 소장)은 전형적인 행서로, 매화와 홍매는 사군자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안국사의 일주문(國中第一淨土道場)은 행서체로, 도갑사의 도선국사성보관(道詵國師聖寶館)은 예서체의 필력이 돋보이는 가운데 교학상장(敎學相長, 전라북도교육연수원)과 사엄생경(師嚴生敬, 전주교육대학교 소장)은 교육자로서의 특징이 엿보이는 걸작이며, 석류는 전라여중학교 교장시절에 쓴 교화로 선생의 예술혼이 잘 드러난다.
 
 ‘적상산 안국사(赤裳山 安國寺)의 일주문 뒤의 편액엔 ‘국중제일정토도량(國中第一淨土道場)’이란 낯익은 글씨를 통해 일상의 무거움 짐을 서서히 내려놓으며, 대바람소리며, 물소리며 새소리며,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예전에 느꼈던 바와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1995년 코발트색 하늘가 아래에 물고기처럼 매단, 단아하면서도 고졸함을 잃지 않고, 웅장한 듯하면서도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이 편액의 그윽한 경지로부터 우리는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선생의 묵적(墨跡)을 만난다.

 

 무욕의 세계로 이끄는 이 상징 문패가 솔향을 머금은 채 사바 세계의 중생들에게 ‘안국(安國)’과 ‘정토(淨土)’의 희망 비나리, 속삭인다. 5욕7정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에, 오늘 만큼은 우뚝 솟은 저 산(如山)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如風如雲) 살다가라 하네. 강물처럼 별빛처럼(如水如星) 흘러가라 하네.

 

 전북은 예로부터 ‘산과 같은(如山)’ 서예가들을 수도 없이 키워냈다. 일찍이 송일중으로부터 두각을 보여 온 이 지역 서단은 차분히 실력을 쌓고 세력을 갖추면서 이삼만, 서홍순, 전우, 이정직, 조주승, 이순재, 서홍순, 이광열, 최규상, 유영완, 김정회, 황욱, 송성용, 최정균, 권갑석선생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를 배출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19세기 추사 김정희(1786~1856), 눌인 조광진(1772~1840)과 함께 ‘삼필(三筆)’의 한 사람인 전북출신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7)선생의 재조명작업이 부실하다고 판단한 여산(如山)선생은 창암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 구름처럼 흘러가고 물처럼 흐르는 자연스런 글씨체)’가 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창암 선생님은 이 고장이 낳은 명필이죠. 야인이었고, 워낙 깊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작업을 주로 해와 제자들이 많진 않지만, 그의 서예술은 보존할 만한 문화적 가치가 충분해요”그래서 창암기념사업회를 꾸려 유묵첩 발간과 서예비 제막 등의 활동을 벌여왔다. 
 

이같은 노력으로 인해 2002년 11월 29일 전주 덕진 체련공원에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으로, 온갖 동물이 생을 즐김을 비유’이란 이삼만선생의 서예비가 세워져 창암(蒼巖)의 글씨가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여산(如山)선생은 ‘산과 같은(如山)’ 스승 소전 손재형(1903-1981)선생을 만났다. 소전의 스승인 무정 정만조와 성당 김동희선생은 또다른 ‘산과 같은(如山)’ 원교 이광사선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라북도 예맥(藝脈)의 도도한 흐름. 그 길은 넓고 길다. 때문에 디뎌온 길도 디뎌갈 길도 단단하다. 아니, 아주 느릿하고 느긋하다. 저 여산(如山)선생처럼. 


 완산8경의 하나인 ‘한벽청연(寒碧晴烟)’은 전주천이 물안개를 일으키며 흐르는 모습을 옥류동 한벽당에 앉아 조망하는 청아한 풍경을 말하지만 추억 서린 새벽 이슬이런가. 여산(如山)선생은 이같은 아쉬움을 떨쳐내고 미래의 희망을 담아 전주풍남제전위원회(현 풍남문화법인)가 출향 인사와 전주 시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만든 ‘완산팔경’ 병풍에 다가사후(허소라시인), 위봉폭포(이운룡시인), 한벽청연(최승범시인) 등 3점의 한글 서예를 휘호, 단아함과 역동적인 필력으로 독창적인 서체를 뽐냈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작 ‘백두산천지’는 합작품으로, 현림 정승섭화백과 김삼룡박사의 시, 그리고 여산(如山)선생의 한글 서예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정읍사비 글씨와 정산종사 빗돌(고은시인)도 한글 서예의 융숭한 멋과 힘찬 필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작품은 한문 행,초서의 곧고 우아한 서체의 필법 세계가 단연 돋보인다.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하는가. 익산 숭림사 일주문 편액를 비롯, 월출산 도갑사, 금산사 조사전, 실상사 천왕문, 오목대의 대풍가 등 작품마다 구증구포(九蒸九曝,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리기를 거듭하다)를 통해 숙성되면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예술 세계가 뜨끈한 숭늉 누룽지처럼 펼쳐진다. 간간히 창암 이삼만과 원교 이광사, 소전 손재형선생의 흔적들이 필묵에 실어 또다른 울림을 줄때는. 
 

현림 정승섭화백이 문방사우를 그리고, 월전 장우성선생이 난을 치고, 여산(如山)선생이 한자로 제(題)를 했던 대작 ‘부작란(不作蘭)’ 기명절지도를 보면, 특히 이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여산(如山)선생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연서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서 독자성을 추구하며 일가를 이룬 작가다.

 

 예서로 쓴 ‘반야심경’ 병풍이 선생의 대표작의 하나며, 행초서로 쓴 유여예(遊於藝), 행초서로 쓴 산고수장(山高水長), 향원익청, 귀원전거(歸園田居), 산중문답(山中問答), 그리고 마이산 등 작품이 수 없이 많지만, 특히 ‘귀거래사(歸去來辭)’ 병풍은 더욱 선생만의 독특한 예술성이 돋보이는 가운데 탈속의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제3회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2001년 10월 6일~11월 5일) 본 전시에 선보인 행초서는 작품의 명제가 없지만 선생인 손수 지은 ‘자작시’로, 지필묵과 함께 해온 사람으로서 평소에 가슴에 품은 서예 사랑과 향토애가 물씬 풍겨나기도.

 고창 무초회향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선생의 행초서 ‘답설(踏雪)’이란 시를 보면, 전체적으로는 정제되고 균형 잡힌 필의가 자유로우면서도 씩씩하고 변화가 풍부하다. 

 특히 맑고 우아한 신체가 자연스러움에 합치하는 장법과 탁 트림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깔끔히 정리되는가 하면 먹빛이 생생하고 풍만하면서도 매끄러운 맛이 드러나 보인다.

 제3회 세계 서예 전북 비엔날레에 선보인 특별기획전 ‘천인천자문(千人千子文)’은 해,행,초,예,전서 등 한문 5체가 망라됐다.  이 천자문의 한 자(字)당 글씨 크기는 가로 세로 13cm, 16폭 병풍으로 크기가 20m에 달한 가운데 1,000명의 중견 서예가가 2개월 간에 걸쳐 천자문을 한자씩 써 모았는데, 첫 글자 ‘하늘 천(天)’은 여산(如山)선생이 바로 그 주인공이 됐다.

 

 그래서 ‘감동과 메시지를 담아낼 수 없다면 명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소천할 때까지도 작품에 매진하는 등 ‘상락정진(常樂精進)’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여산(如山)선생의 마음가짐과 예술혼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귀감이 되고 있다.

 한국서예연구회 권영수회장은 “선생은 내 삶속에 서예는 한몸이다 하시며 80이 넘도록 붓과 함께 하며 서예교육자의 자화상을 남기셨다”며 “서예의 맥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남기고 간 사랑하는 제자들이 선생에 대한 추모의 마음들을 모아 유고전과 유묵집 제작을 위해 모두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이종근기자

 

여산 권갑석선생은
 
 

 

서예의 대가 여산(如山) 권갑석(權甲石, 1924-2008)선생은 익산출신으로, 전주사범학교를 졸업,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입선 4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특선 4회, 국전 제21회 서예부 최고상을 수상,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차지한 바 있다.그후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등을 역임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서예전람회 운영위원장,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서가협회 고문을 맡기도 했었다.
 교사 시절 본격적인 서예 공부를 시작한 그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선과 특선을 수상하며 두각, 지역 서단의 거목으로 성장했다. 교단에서 정년 퇴임하면서 현역 생활을 정리한 지 오래로, 30여년 전부터 손수 꾸려온 한국서예연구회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일궈가기도 했다. 신춘휘호대전과 한국서예대전 등을 통해 서예의 저변 확대에 특히 많은 공을 들인 것이다. 2002년엔 제10회 목정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서가협회 공동의장, 창암 이삼만 선생 기념사업회장 등으로 활동한 데 따른 수상이었다. 조선후기 명필 창암 이삼만 선생의 서예비가 전주 덕진체련공원에 세워진 것도 그의 집념 때문이었다.
 선생은 지난 1944년 교육계에 입문, 1989년 정년퇴임 때까지 46년 동안 교직에 몸담아모면서 익산시와 군산시 등에서 교육장을 지낸 바 있으며, 살아 생전 6회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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